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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5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3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54화

 

54화

 

 

 

 

 

 

“여기도 있다!”

 

그때 뒤로 밀렸던 용수명이 흑의인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의 검에서는 조금 전과 달리 시퍼런 검기가 넘실거리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검기성형?”

 

흑의인은 용수명의 검세를 보고 기광을 번뜩였다. 그는 기종탁의 목을 치려던 검을 틀어서 용수명의 검을 막아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런 방향 전환, 그 와중에도 검력에 변화가 거의 없다.

 

가히 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라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상승의 검공이었다.

 

쩌정!

 

용수명은 두 걸음을 물러나서 이를 악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갈 곳도 없는 삼 장 넓이의 좁은 장소.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진실일 뿐이었다.

 

‘크크크, 이 용수명이 이곳에서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용수명아! 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놈아! 이제야 네가 얼마나 별 볼일 없는 놈인 줄 알겠느냐!’

 

감정이 격해진 그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하하하! 죽일 테면 죽여봐라! 하지만 네놈도 팔 하나는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여기 검각의 공자님도 계시다, 개자식아!”

 

구양종도 미친 듯이 소리치며 함께 달려들었다.

 

흑의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자는 죽음을 각오한 자다. 거기에 광기까지 있다면 더욱 어렵고, 그런 놈이 실력마저 있다면 일말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앞의 두 놈은 최소한 그 중 둘 이상을 갖춘 놈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놈들이 제거하기 제일 쉬울 줄 알았거늘…….’

 

일행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 둘이 한 조에 속했다. 누구라도 자신 있었다. 설령 팔대신마가 있다 해도.

 

그런데 제거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몸을 조심해야 할 판이 되었으니 그로선 어이가 없었다.

 

바로 그때, 뒷골이 바짝 당기고 털 끝이 바짝 섰다.

 

동시에 동료의 고함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예 형! 뒤!”

 

흑의인은 검을 휘둘러 용수명과 구양종의 공세를 막아내고는, 우측으로 일 보 정도 죽 미끄러진 뒤 왼발을 축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순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예리한 검세가 뻗어 나왔다.

 

“헉!”

 

흑의인은 다급히 몸을 젖히며 검을 사선으로 올려쳤다.

 

쩡!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을 것 같던 검이 그의 검과 부딪치며 방향이 틀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튕겨지지는 않고 목 부위에서 미끄러지며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크윽!”

 

나직한 신음을 흘려낸 흑의인은 재빨리 발을 놀려 옆으로 미끄러졌다.

 

‘지미, 제대로 된 검만 익혔어도 확실하게 처리했을 텐데.’

 

풍천은 상대의 목을 베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그쯤에서 만족했다.

 

“수명! 구양종! 둘이 한 놈도 상대 못해!”

 

그는 용수명과 구양종의 자존심을 확실하게 뭉개주고는, 다시 뒤로 몸을 튕겨서 통로에 있는 흑의인을 상대했다.

 

“걱정 마라!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자는 우리가 맡을 테니까!”

 

“너나 잘해!”

 

용수명과 구양종은 악을 쓰며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흑의인은 어깨가 쩍 벌어질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쪽 팔을 제대로 못 쓰는 상황. 이제는 해볼 만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되자, 화청백과 석초산을 몰아붙이던 자도 미미하게 흔들렸다.

 

최대한 빨리 제거하고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하거늘, 이제는 이길 수 있을지 그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놈이 흔들렸다!’

 

화청백은 상대의 기세가 약화되었음을 느끼고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흔들렸을 때 승기를 잡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안 올지 몰랐다.

 

‘희생이 생기더라도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해!’

 

석초산은 화청백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를 악물었다.

 

강력한 충격에 내력이 뒤틀린 듯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흑의인을 공격했다.

 

그때였다. 튕겨져서 한쪽 구석에 처박혔던 궁이정이 물러서는 흑의인을 향해 비도를 던지고 달려들었다.

 

어둠속에서 날아가는 비도는 그 어떤 공격보다도 위협적이었다.

 

따당!

 

흑의인은 칼을 번개처럼 휘둘러서 비도를 튕겨냈다. 비도를 눈으로 보고 쳐내는 것이 아니라 날아드는 동선을 차단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두 번째 칼질로 궁이정의 허리를 갈랐다.

 

궁이정은 허리로 날아든 상대의 도를 왼손에 든 비도로 막고, 오른손으로 도신을 붙잡았다.

 

흑의인의 도는 궁이정의 허리를 세 치 정도 파고든 상태에서 멈췄다.

 

“크크크…….”

 

궁이정은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흑의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도를 비틀어 궁이정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 시간은 목숨이 오가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궁 조장!”

 

화청백의 검이 흑의인의 심장으로 뻗어가고, 석초산의 검이 흑의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퍽! 서걱!

 

두 사람의 검에 흑의인은 어깨가 꿰뚫리고, 한쪽 팔이 반쯤 잘리고, 얼굴을 가렸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그는 그 상태에서도 도를 휘둘러 두 사람을 떨쳐냈다.

 

떠더덩!

 

그러고는 몸을 날려 자신이 나온 통로로 되돌아갔다.

 

동료가 피를 뿌리며 몸을 피하자, 흑의인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 형’이라 불린 자도 용수명과 구양종을 떨쳐내고는 통로 안으로 빨리듯이 들어갔다.

 

통로 안에서 흑의인 하나를 상대하고 있던 풍천은 두 흑의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부리나케 통로를 빠져나왔다.

 

‘이크!’

 

그가 제아무리 귀신을 농락하는 신법을 지녔다 해도 좁은 통로에서 세 명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흑의인들은 더 이상 풍천 일행을 상대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나중에 만나면 가만 안 둘 거야!”

 

풍천이 그들의 뒤에 대고 악을 썼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흑의인들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궁 조장!”

 

석초산이 급히 궁이정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궁이정은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움켜쥔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청광석에서 비친 푸르스름한 빛과 핏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궁이정이 몸을 던져서 상대의 빈틈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싸우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일행 중 몇은 부상을 입었거나 죽었을지 몰랐다.

 

“괜찮은가? 어디 좀 보세.” 

 

석초산이 상처를 살펴보려고 하자 궁이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도기에 장기가 완전히 잘리고 혈맥이 파괴된 상태였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부단주…… 동생을…… 부탁…….”

 

“바보 같은 사람. 왜 이리 무모한 짓을 벌인 건가?”

 

“어차피…… 제 실력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놈들이 물러갔으니 됐…….”

 

파르르 떨리는 궁이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로 끝이었다. 궁이정은 웃음 띤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궁 조장!”

 

석초산은 슬픔을 참으며 잇새로 각오를 다졌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반드시 자네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하늘에서 지켜봐라, 궁이정!”

 

그 사이 풍천은 기종탁이 끌어안고 있는 구자암에게 갔다.

 

심장이 뚫린 구자암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구자암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풍천은 고개를 돌려 용수명과 구양종을 째려보았다.

 

“둘이서 그걸 못 막고 사람을 죽게 만드쇼?”

 

용수명과 구양종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의 실력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합공하고도 적이 동료를 죽이는 걸 막지 못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구양종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고리가 보여도 잡아당기지 말아야지.’

 

그때 백초령이 풍천에게 다가왔다.

 

“풍천, 괜찮아?”

 

백초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동안 봐온 그녀와 달리 나약해 보이는 모습.

 

풍천은 가슴 속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보호본능을 감추지 못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 바닥에 떨어진 청광석이나 줍자고. 귀한 물건 같던데…….”

 

“지금 청광석이 문제야!”

 

백초령이 눈을 치켜뜨고 빽, 소리쳤다.

 

사람들도 모두 풍천을 쏘아보았다. 이 판국에도 욕심을 부리다니.

 

그러나 풍천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그럼 깜깜한 곳에 그냥 들어갈래? 내가 뭐 청광석이 욕심나서 그러는 줄 알아?”

 

백초령은 그제야 풍천의 뜻을 알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러네. 알았어, 주울게.”

 

“내 것이 여섯 개야. 혹시 다른 사람이 가져가나 잘 봐.”

 

사람들의 풀어졌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럼 그렇지. 풍천이 누군데?’ 그런 눈빛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상 때문에 한쪽에 앉아 있던 나한조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맞아! 바로 그자야!”

 

“무슨 말인가?”

 

석초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한조를 바라보았다.

 

나한조는 흑의인들이 사라진 통로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궁 조장을 죽인 자가 누군지 생각났습니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나한조를 바라보았다. 석초산이 입술을 씹으며 물었다.

 

“누구지?”

 

나한조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비록 잠깐 본 거 뿐입니다만……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는 쟁천도 조광 같습니다. 이 년 전, 그 자가 싸우는 모습을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쟁천도 조광?”

 

석초산이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한조는 강호의 고수 수천 명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석초산은 그걸 알기에 나한조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쟁천도(爭天刀) 조광.

 

그가 강호에 모습을 보인 것은 몇 번 없지만, 도를 쓰는 사람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강호에 나올 때마다 도의 대가를 찾아다니며 비무를 벌였다. 그리고 지난 오 년간, 그에게 일곱 명의 고수가 무릎을 꿇었는데, 그에게 패한 일곱 명 중에는 팽가의 오대고수 중 하나인 팽호도 있었다.

 

정말 그가 조광이라면 흑의인들 역시 그와 비슷한 위명을 지닌 고수들이라는 말이 아닌가.

 

대체 그런 고수가 이곳에 몇 명이나 들어왔을까? 누가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그런 의문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후드득 떨었다.

 

그 사이 풍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또 다른 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구 형을 죽인 놈의 성이 예 씨라고 했지?’

 

 

 

4

 

 

 

한편, 흑의인들과 마주친 것은 풍천 일행만이 아니었다.

 

남궁도영은 피로 범벅이 된 채 통로를 달렸다. 수하들의 목숨을 건 방어로 겨우 몸을 빼낸 그는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함께 죽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동안 잘나지도 못한 놈이 잘난 줄 착각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줘서 미안하다!’

 

오초 만에 내상을 입었다. 십초가 흐르자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그 사이 조카나 다름없는 수하 셋이 쓰러졌다.

 

그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수하들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대주!”

 

“숙부! 이곳을 빠져나가서 저희들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그는 그 와중에도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수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도주할 결심을 한 것이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만이 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후로도 수하들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죄책감과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가야 했다.

 

심장이 갈라지고 머리가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으아아아!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던 놈이었더냐, 남궁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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