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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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52화
52화
반소규는 풍천에게 조롱을 당한 것이 모두 석벽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석벽을 노려보며 다가갔다.
그리고 몇 번 석벽을 두들겨서 두께를 짐작하고는, 쌍장에 공력을 잔뜩 주입해서 연속 후려쳤다.
쾅! 쾅! 쾅!
석벽은 반소규의 무지막지한 장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삼 장 만에 무너졌다.
순간, 사람들은 불빛에 드러난 석벽 안쪽의 통로를 바라보고 표정이 얼어붙었다.
붉은 핏물이 흥건한 통로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다섯.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까지도 심장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반소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안을 노려보며 석벽을 넘어섰다.
적련방 무사들이 앞으로 나가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대원보의 무사들입니다.”
“상태는?”
“모두 죽었습니다.”
반소규는 수하의 대답에 통로 안쪽을 노려보았다.
자신들과 거의 동시에 들어온 대원보 무사들이 죽었다.
적련방의 무사들은 무사할까?
솔직히 자신할 수가 없었다.
범인은 신마성 놈들일까, 아니면 제 삼자일까?
그때였다. 통로가 또다시 진동했다.
우르르릉.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뜻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스멀거리는 듯한 두려움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를 즈음, 통로의 저 안쪽에서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욕설과 비명.
“가보세.”
옆구리에 매달린 칼을 빼든 반소규는 짓눌린 목소리로 말하며 통로 안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유화통을 든 자가 바로 뒤를 따라 달렸다. 빠르게 달리는데도 유화통의 불꽃은 흔들리기만 할 뿐 꺼지지는 않았다.
풍천은 백초령과 함께 약간 뒤로 처져서 따라갔다.
‘느낌이 안 좋아…….’
2
통로의 굽이를 세 번 꺾어지자 광장이 나왔다. 풍천 일행과 반소규 일행이 만난 광장과 크기도 비슷했고, 청광석이 박힌 것도 같았다.
그곳에서는 십여 명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다섯 명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신마성 무사들이었다.
반소규 일행과 풍천 일행이 통로에서 나오자, 신마성 무사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물러나서 다른 통로로 달아났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달아나는 신마성 무사들을 쫓을 생각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승일아!”
“영호야!”
일곱 명이 쓰러져 있었다. 그 중 남궁세가의 사람이 다섯이었고 신마성 무사가 셋이었는데 그들 모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광장에 들어선 풍천은 신마성 무사들이 달아난 곳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들은 이곳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어둠뿐인 통로 안으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들어갈 수가 없다.
구룡회의 세력과 남궁세가를 안으로 들여보낸 것도 신마성의 계획이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이 안에서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제기랄, 결국 유령총 전체가 함정이란 말이군.’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유령적과 백초령을 유령총에서 맞교환하자고 한 걸까, 아니면 처음에는 단순하게 맞교환만 할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계획을 바꾼 걸까?
처음부터 그랬다면 빠져나가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계획을 짰을 테니까.
그러나 나중에 계획을 바꾼 거라면? 분명 어딘가에 빈틈이 있을 것이다.
‘위태곤의 말투와 행동으로 봐서는 나중에 계획을 바꾼 것 같아. 유무가 확실치도 않은 유령총의 비밀보다, 유령총의 비밀을 욕심내고 달려드는 자들을 모두 이곳에서 죽이기로.’
그 생각을 하자 몸이 오싹 떨렸다. 신마성이 택할 최후의 방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떠오른 것이다.
‘어차피 얻지 못할 비밀이라면 무덤으로라도 활용하겠다는 거겠지. 빌어먹을!’
그가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속으로 욕을 퍼붓는데, 반소규가 남궁세가 사람들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괜찮소?”
차가운 표정의 중년인, 남궁도영이 고개를 돌리고 포권을 취했다.
“덕분에 위험을 모면했습니다.”
“아, 여기는 신검문 사람들이오. 여기 이 공자는 신검문주님의 대제자인 화 공자요.”
“화청백입니다.”
“그대가 신검일수 화청백? 상황이 좋진 않지만 어쨌든 만나서 반갑군. 나는 남궁도영이라 하네.”
화청백은 신검무제 백무천의 대제자다. 하남에서 떠오르는 세력인 신검문의 후계자. 화청백을 바라보는 남궁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희들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형제들을 잃었으니 정말 고맙고 죄송할 뿐입니다.”
“너무 마음 쓸 것 없네. 강호인이 칼에 맞아 죽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죽음이 아니겠나? 이들도 마도의 하늘인 신마성과 싸우다 죽었으니 한을 품지는 않았을 거네.”
무인이 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형제들이 죽었거늘 그 말을 그렇게 냉정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풍천은 남궁도영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에 고집 세고 마음씨 독한 꼴통이 하나 있다더니, 저 사람이었군.’
손속이 독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남궁세가의 사람들조차 거리를 둔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소문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성격이 차갑고 호승심이 강해서 그렇지, 소문처럼 못된 사람은 아닌 것 같군.’
그때였다. 신마성 무사들이 달아난 통로 안쪽에서 비명과 공포에 질린 경악성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으아아악!”
“네놈들은 누구…… 크억!”
통로를 통해 다른 광장으로 들어서던 신마성 무사들은 광장 한가운데에 네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뿐, 그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네 사람을 공격했다.
그들에게는 신마성 무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었으니까.
광장에 서 있던 네 사람은 신마성 무사들이 달려드는 걸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느릿하니 검을 빼든 그들은 신마성 무사들의 공세가 코앞까지 다가온 뒤에야 손을 썼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 사오 초. 숨 서너 번 쉴 시간에 다섯 명의 신마성 무사들은 심장이 갈라지고 목이 잘린 채 죽어갔다.
동료들의 피가 허공에 뿌려지며 피안개가 피어나자, 남은 세 명의 신마성 고수들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들은 누구……”
“그건 지옥에 가서 물어봐라.”
네 사람 중 하나가 나직이 말하며 상대의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가공할 경력이 실린 검은 상대의 도를 튕겨내고는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심장을 갈랐다.
“크억!”
반소규는 홱 고개를 돌려 통로를 노려보았다.
“저 안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소. 쫓아가 봅시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겠소?”
반소규의 말에 남궁도영이 호응했다.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했다.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곱 명의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놈들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모두 일어나라. 놈들을 쫓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형제들의 시신을 반듯하게 눕혀놓고 일어섰다.
두 사람이 당장 달려갈 것처럼 말하자 풍천이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죠.”
남궁도영은 풍천을 쏘아보았다.
“자넨 누군가?”
“풍천.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 그쯤하고, 조금 전의 소리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이상한 점? 무슨 말인가?”
“싸움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반소규가 풍천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만큼 강한 자가 나타났다는 말 아니겠나? 겁나면 자넨 이곳에 남아.”
그러고는 말을 나눌 시간도 아깝다는 듯 풍천의 말을 더 들어보지도 않고 곧장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궁도영은 반소규의 뒤를 따라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풍천의 말을 듣자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는 의문을 푸는 것보다, 자신의 앞에서 죽어간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두 사람이 통로로 뛰어들자 적련방 무사들과 남궁세가 사람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풍천은 적련방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모두 통로로 들어가자 화청백을 돌아다보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따라가 보세. 어차피 우리만 여기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니까”
풍천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사견을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유령총이 주는 중압감에 짓눌린 터라 말한다고 해서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초령이 너는 내게서 멀리 떨어지지 마.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걱정 마. 너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거니까.”
하여간 말하는 것 하고는…….
풍천은 백초령을 흘겨보고는 훌쩍 몸을 날려서 천장에 달라붙었다.
이유를 물을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천장에 달라붙어서 청광석을 빼냈다.
하나보다는 두 개가 더 나을 것이고, 두 개보다는 열 개가 나을 것이었다.
풍천은 재빨리 세 개의 청광석을 챙기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화청백을 바라보았다.
“쫓아가죠.”
화청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통로로 들어갔다.
3
화청백과 석초산이 앞장서고 그 뒤를 구양종과 용수명이 따라갔다. 부상이 심한 나한조는 궁이정이 부축하고 그나마 경상인 기종탁과 구자암, 진관악이 그들을 보호하며 움직였다.
풍천은 후방을 맡겠다며 백초령과 함께 맨 뒤로 처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겁이 나서 뒤로 처진 듯 보였다. 구양종이 고개를 돌리고 노려보는 것만 봐도 몇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상대해봐야 손해 볼 게 뻔하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뿐.
하지만 풍천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뭐 꼭 싸우기 싫어서 뒤로 처진 것은 아니라구. 이런 미로는 제일 강한 사람이 뒤에 서야 돼. 그래야 갑작스런 상황에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거든.’
그렇게 통로에서 네 번 꺾어지자 지금까지 지나왔던 두 곳의 광장과 비슷한 크기의 지하광장이 또 하나 나타났다.
광장 바닥에는 여덟 명이 쓰러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반소규와 남궁도영이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화청백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반소규는 이마를 찡그린 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죽어 있었네. 그런데 모두 신마성 사람들이군.”
신마성의 무사들이 당했다면 반가워해야지 왜 저런 표정일까?
“이들의 죽음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풍천이 화청백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들을 죽인 사람들은 구룡회나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설령 그쪽 사람이라 해도, 이 두 분이 아는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그럼 누가…….”
“이 안에, 유령총의 미로 내부에 우리가 모르는 자들이 있단 말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곳은 유령총. 이름부터가 사람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반소규가 풍천의 주장을 부정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네. 천하의 누가 신마성과 구룡회를 동시에 적으로 삼으려 한단 말인가? 거기다 남궁세가까지 말이야.”
풍천은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또 모르죠. 그리고 말입니다. 여긴 유령총입니다. 진짜 유령이 이 안에 있을지 누가 압니까?”
‘미친놈!’
‘저런 놈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지.’
잔뜩 굳었던 사람들의 눈길이 풍천을 향해 집중되었다. 아마 눈빛에 화살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면 풍천은 지금쯤 벌집이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초령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 변태자라가 유령총에 유령이 산다고 했는데…….’
그때였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석문이 내려오더니 통로를 막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