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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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6화
46화
“사람 말 귀 못 알아듣는 분이시네. 그럼 제가 이 마당에 장난이라도 하는 줄 아쇼?”
운조평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꺾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떨린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오히려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너는 누구냐?”
“백부님의 조카요.”
풍천은 처음과 같은 거짓말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하게 했다.
위태곤조차 정말인지 거짓인지 헷갈려서 바로 말을 못했다.
운조평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목소리가 조금 까칠하게 흘러나왔다.
“그럼 네놈의 백부는 누구냐?”
“욕은 빼고 말하쇼. 듣는 놈 기분 안 좋으니까.”
“……뭐라?”
좌중이 조용해졌다.
어이가 없어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사람,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람, 걱정이 태산처럼 쌓이는 사람, 속으로 ‘저 미친놈이 죽으려고 작정했군.’하는 사람…….
화청백은 풍천이 자신보다 말싸움에서 있어서만큼은 훨씬 고수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란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흑운신마마저 겁내지 않다니. 정말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었다.
‘풍천, 잘한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초령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오늘 이후로 너를 미워하지 않으마.’
그때 풍천이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더니, 턱을 쳐들고 물었다.
“근데 당신은 누구쇼? 누군데 성주의 둘째 제자인 위태곤을 제치고 대장 노릇하는 거요?”
휘청.
신검문 사람들은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세웠다.
그럼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운조평은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조금 전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그런데도 모른 척 묻는다. 이놈이 지금 장난하나?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들었을 텐데?”
“이름이야 들었죠. 나도 귀가 있으니까. 내가 알고 싶은 건 신분이죠.”
“본성의 팔대신마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푸하하하하!”
풍천은 광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대소를 터트렸다.
저놈이 왜 웃는 거야?
사람들은 의아함과 불안함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웃음을 멈춘 풍천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히 들어봤죠. 내가 뭐 강호초출인 줄 아쇼?”
그런데도 몰라?
적아를 불문하고 모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구출대는 긴장이 누그러지고 굳었던 몸이 풀어졌다.
단숨에 그들을 압박할 것 같던 신마성의 무사들은 상대가 하찮게 보였다.
작지만 큰 변화였다. 그러나 모든 신경이 풍천에게 집중된 데다가 변화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바로 그 팔대신마 중 한 사람이니라.”
운조평은 ‘네놈이 이래도?’하는 마음으로 말하고는 풍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팔, 대, 신, 마!”
풍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또박또박 소리쳤다. 그리고 운조평과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난 또, 팔대신마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서 악귀처럼 생긴 미친 늙은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중에는 당신처럼 그럭저럭 봐줄 만한 사람도 있었군요.”
칭찬이야, 욕이야?
평소라면 어린놈이 감히 자신에게 말장난하냐면서 단숨에 목을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장난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놈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어쨌든 그도 더 이상은 말장난에 휘말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이제 유령적을 내놓아라.”
“내가 왜 당신에게 유령적을 줘야 하죠?”
운조평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도 아니고, ‘나’다. 거기다 ‘당신’이라는 말투도 귀에 거슬리고.
‘나이도 어린놈이 잘못 배웠군. 이런 놈은 작신 두들겨 패서라도 제대로 키워야 하거늘, 어떤 놈이 애비인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그가 누군가? 마도제일성 신마성의 팔대신마 중 하나가 아닌가?
그는 지금까지, 예의 운운하는 것은 정파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해 왔다.
욕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아주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정 신경이 거슬리면 그냥 죽여 버렸고.
그런데 풍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인내심이, 잔파도에 모래성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듯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는 초절정의 고수답게 꾹 참고 풍천을 닦달했다.
“여기까지 온 것은 유령적의 진위를 가리고 백초령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그야 물론이죠.”
“그러니 유령적을 나에게 건네라. 진위를 가려야 하니까.”
“진위를 가리는데 꼭 당신이 해야 합니까?”
“물론이다. 지금 이곳에서 유령적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왜 당신밖에 할 수 없다는 거죠?”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뭐 알 필요 없다면 어쩔 수 없죠.”
풍천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초령 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유령적을 드릴 테니 일단 초령이를 먼저 풀어주쇼.”
“진짜가 확실하면 풀어줄 것이다. 걱정 마라.”
“걱정 마라? 푸하하하하! 에이, 그걸 어떻게 믿어요?”
“이 운조평이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냐?”
“당신이라면 마도 놈들의 약속을 대뜸 믿고 목숨을 맡길 수 있겠수?”
이 목을 비틀어 죽일 놈이!
운조평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풍천과의 거리는 이 장 정도. 한 걸음이면 놈의 코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손을 뻗으면 목을 움켜쥐어서 바닥에 패대기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전에 품속에 든 유령적을 빼앗아야겠지.’
그때 풍천이 귀신처럼 운조평의 마음을 눈치 채고 가슴속에 든 주머니를 부여잡았다. 비록 가짜 유령적이 든 주머니가 아니라 돈주머니지만.
“허튼 생각하지 마쇼. 조금만 수상한 짓을 하면, 초령이를 포기하더라도, 유령적을 부숴 버릴 거요!”
“흥! 그럼 네놈들도 모두 죽을 텐데?”
“하, 하, 하!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왔을 때는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왔는데,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요?”
말싸움에서는 운조평도 풍천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니 그도 더 이상 윽박지르지 못했다.
눈썹을 씰룩거린 그는 위태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계집을 건네줘라.”
“사숙.”
“뒤가 막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위태곤도 모르지 않았다. 건네준다 해도 빠져나갈 확률은 백에 하나도 안 되었다.
다만 문제는, 백초령이 함께 죽겠다고 설칠 경우였다. 그는 백초령이 다치거나 죽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일이 틀어지면 제일 먼저 백초령을 제압해야겠어.’
결정을 내린 그는 시마청을 돌아다보았다.
“시 장로님, 백초령의 밧줄과 혈도를 풀어주십시오.”
운조평으로 인해서 기를 못 펴고 있던 시마청이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며 풍천을 쳐다보았다.
“케케케, 그놈 주둥이는 알아줘야겠군.”
솔직히 그는, 거만한 운조평이 풍천에게 당하는 게 고소했다. 무공 좀 강하다고 자신을 무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저런 놈에게 쩔쩔매다니.
그래서 두말하지 않고 위태곤의 말에 따랐다.
만일 밖에서 단둘이 만났다면 죽이기 전에 술 한 잔 정도는 사줬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그가 백초령의 밧줄을 다 풀어주었을 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잠깐!”
풍천이 손을 척 들더니 시마청을 말린 것이다.
또 뭐야?
사람들이 모두 풍천을 바라보았다.
풍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뭘 말이냐?”
“유령총에 정말 유령이 살고 있수?”
미친놈!
운조평은 인내의 끈이 끊어지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풍천은 그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말고……. 어이, 강시 양반, 초령이를 이리 보내쇼.”
시마청의 하얀 얼굴이 상기되었다.
술 한 잔 사주고 싶던 마음이 싹 달아났다. 감히 자신을 강시라고 부르다니.
그는 백초령의 마혈을 풀어주지 않고 풍천만 노려보았다.
그때 풍천과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운조평이 그를 강요했다.
“보내주시오, 시 장로.”
시마청은 기분이 두 배로 상했다.
젊은 놈에게 강시 소리나 듣고, 꼴 보기 싫은 운조평에게 강요당하고.
그러나 어쩌랴, 지휘자는 운조평인데.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백초령의 마혈과 아혈을 풀어주었다.
“가라, 계집.”
백초령은 마혈이 풀리자 몸을 움직여보았다. 뻣뻣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어 번 몸을 틀어본 그녀는 풍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풍천!”
순간, 위태곤의 눈빛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저놈이 풍천?’
못생겼다고 했다. 비검당의 일개 조장이라고 했다.
그 바람에 생각도 못했다. 비검당의 일개 조장이 화청백에게 함부로 말한다는 것도 그렇고, 자신이나 시마청, 운조평을 말로 농락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사이 백초령은 풍천의 앞까지 달려갔다.
풍천은 히죽 웃으며 백초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코앞까지 다가온 백초령이 손을 잡더니 풍천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돌렸다. 만난 기쁨에 서로 끌어안기라도 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견원지간처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구양종은 주먹을 움켜쥔 채 파르르 떨고, 위태곤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끌어안으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더한 짓을 하면 머리를 잘게 부숴 버리겠어!’
그런데 상황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 조금 다르게 흘렀다.
“흑흑, 이 멍청아! 내 얼굴을 봐! 이게 지금 괜찮은 것처럼 보여!”
풍천의 얼굴 세 치 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백초령은 울먹이면서도 풍천의 가슴을 후려치며 빽빽 소리쳤다.
“그래도 다친 곳은 없잖아. 그 정도면 됐지.”
“공자묘에서 구했으면 이렇게 고생할 것도 없잖아!”
그거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풍천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조평이 그에게 불만을 쏟아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상봉의 기쁨은 그쯤에서 멈추고, 이제 유령적을 내놓아라.”
“거 급하기는…….”
풍천은 운조평을 째려보고는 백초령의 막힌 혈을 마저 뚫어주었다.
운조평은 태연한 풍천의 행동에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놔두었다.
백초령의 별 볼일 없는 공력이 회복된다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
풍천은 백초령의 혈도를 풀어준 후 뒤에 서 있는 화청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보쇼.”
화청백은 머뭇거리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지금 줘도 되는 걸까?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에 줘도 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몇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백초령도 같은 생각인지 풍천에게 소리쳤다.
“아직 주지 마! 주더라도 우리가 안전하게 빠져나간 다음에 줘!”
하지만 풍천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백초령을 풀어줬다는 것은 저들의 계획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다. 팔대신마 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저들에게는 유령적을 얻는 것 외에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다.
‘유령적으로 저들을 압박하면, 일단 유령적을 든 사람 외에 나머지 모두를 죽이려 할 거야.’
설령 그로 인해서 유령적이 부서진다 해도. 어차피 진짜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러니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되는 거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개자식에, 남자도 아니거든. 그렇죠?”
풍천은 천하에서 제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처럼 말하며 운조평을 바라보았다.
‘그렇죠?’라는 말은 그와 운조평이 눈을 마주친 순간 나왔다.
운조평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 어이가 없었다.
“그, 그럼…… 유령적이 너에게 없단 말이냐?”
“하, 하, 하. 강호가 하도 험해서 말이죠. 만약 내가 죽으면 화 공자가 부수기로 했죠. 뭐 잘못됐나요?”
“그럼 네가 가슴을 움켜쥔 것은 뭐더냐?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해서 한 행동이란 말이냐?”
“나는 당신을 속인 적이 없는 데요? 내가 언제 품속에 든 것이 유령적이라고 했습니까?”
그런 말한 적은 없다. 다만 그렇게 느끼게 했을 뿐.
풍천은 가슴을 다시 움켜쥐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돈주머니죠. 정말 어렵게 모은 건데,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아깝지 뭡니까. 그래서 한 번 더 만져본 거죠.”
이 패죽일 놈이!
운조평의 온몸에서 살기가 풀풀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