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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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5화
45화
“허어, 저런 틈바구니 안에 계곡이 또 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라. 정말 궁금하군요.”
그때 느긋한 자세로 뒤쪽에 서 있던 초로인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바로 들어가지 않을 건가? 놈들이 유령총을 열게 되면 늦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반소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말처럼 길쭉한 오십 대 중반의 초로인, 도인처럼 도관을 쓴 그는 방주의 의형인 벽선자(碧扇子) 호궁선이었다.
담청이 그를 딸려 보낸 것은, 그가 기관에 정통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곧 올 겁니다. 모두 모이면 함께 들어가지요. 아마 그들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상대는 신마성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온 것을 알고 저 안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 힘을 최대한 모아서 대응하는 게 나았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해. 오늘은 반드시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고야 말 거다.’
반소규가 내심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몸을 돌린 반소규는 협곡을 둘러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셨으면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어차피 신마성을 상대하려면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메아리치며 협곡을 울린 그의 목소리가 잔잔해질 무렵, 협곡의 아래쪽에서 불쑥불쑥 사람들이 솟구쳤다.
모두 백여 명 정도. 신검문과 검각과 경천산장의 연합세력 무사들이었다. 구출대가 사찰에서 하루를 더 머무른 덕에 적련방과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반소규를 보더니 정말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름 아닌 신검문의 정무당주 조환이었다.
“허어, 이게 누구요, 반 형이 아니시오?”
“신검문에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같은 구룡회의 일원으로서 도와야 하지 않겠소?”
“신검문을 대신해서 이 조환이 고맙게 받아들이겠소이다.”
“본방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게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어쩌겠소? 서운하다고 해서 어려움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다.
유령총이 관련된 이상 구룡회 모두가 알 권리가 있다. 그런데 검각과 경천산장에는 알렸으면서 왜 적련방에는 알리지 않았냐는 추궁이다.
하지만 조환은 반소규의 추궁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워낙 일이 다급해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소이다. 이해해주시구려.”
반소규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지금은 힘을 합칠 때이지 따지고 싸울 때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기선을 충분히 제압한 상태. 그는 눈을 돌려, 신검문 일행의 뒤쪽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남궁세가와 대원보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적련방의 반소규라 하오. 남궁세가에서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남궁세가의 사람들 중 사십 전후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반소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남궁도영이라 하오. 나는 유령총이 구룡회의 것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그러니 구룡회는 본가를 추궁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내가 잘못 안 거요?”
왠지 까칠한 말투.
반소규는 상대의 이름을 듣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자가 한월검(寒月劍) 남궁도영?’
그도 그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냉정하고 오만한 성격에 고집이 세다고 했다. 거기다 무공은 남궁세가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하고.
남궁세가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남궁도영이 그들을 이끌고 있을 줄이야.
왜 남궁세가에선 이자를 보냈을까? 말썽이 생길지 모른다는 걸 알 텐데.
혹시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상대의 의도에 말려 들어선 안 되었다.
“내 어찌 대 남궁세가의 한월검을 추궁할 수 있겠소? 다만 평소 우리의 일에 관여하지 않던 남궁세가가 느닷없이 나타나니 놀라워서 물어본 것뿐이외다.”
“긴말할 것 없이 간단하게 묻겠소. 힘을 합쳐서 신마성과 싸우자고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은 유효한 거요?”
“물론이외다.”
“그럼 우리의 일은 뒤로 미룹시다.”
반소규의 눈빛이 싸늘하게 반짝였다.
‘듣던 것과 다르군. 역시 강호의 소문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단 말이겠지.’
“좋소. 이 반모 역시 원하는 바외다.”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은 거 같은데, 누가 앞장설 거요?”
“반모가 앞장서겠소.”
그때였다. 계곡 아래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함께 들어갑시다.”
사람들은 계곡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족히 오십 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반소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이마를 좁혔다.
‘빌어먹을, 천붕성 놈들과 금천문 놈들도 냄새를 맡았군.’
하지만 겉으로는 무심한 목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신마성 놈들과 한바탕할지도 모르는데, 동료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신검문과 적련방, 검각, 경천산장, 천붕성, 금천문, 남궁세가와 대원보. 팔파의 무사는 모두 삼백이 넘었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틈바구니를 통해 유령곡으로 향했다.
신마성의 성주 직속 무력인 삼단(三團) 중 신마호령단(神魔護令團)의 단주 전당문은, 협곡의 반대편 절벽 근처 나무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소를 지었다.
“후후후후,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곳이 지옥이란 것도 모르고 잘 들어가는군. 오늘 이후로 강호가 한바탕 시끄러워지겠어.”
숫자는 삼백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각 문파의 주요 고수들로 족히 전력의 이 할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유령곡에서 죽으면 구룡회와 남궁세가에 적잖은 타격이 될 터. 앞으로 불어댈 태풍을 감당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전당문은 삼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모두 틈바구니로 사라지자, 옆을 향해 나직이 명을 내렸다.
“구명, 놈들이 완전히 유령곡으로 다 들어가면 입구를 차단한다.”
“알겠습니다, 단주.”
제8장. 죽음의 유령탑(幽靈塔)
1
탑은 독립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유령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탑을 세운 듯했다. 하단부의 너비가 오 장밖에 되지 않는데, 통로는 십 장도 더 되는 것이다.
중앙으로 뻗은 통로의 너비는 일 장 반 정도. 삼 장 간격으로 등불이 켜져 있어서 안을 살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풍천은 벽에 새겨진 조각을 훔쳐보며 통로를 따라 걸었다.
벽의 조각은 외부에 새겨진 조각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더욱 섬세하고,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사지가 잘리고, 끓는 물에 삶아지고, 타오르는 불속에서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
뒤엉킨 남녀는 절정의 환희에 몸을 떨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열락에 빠진 자들은 절규하며 죽어가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듯했다.
―살려줘! 나를 이곳에서 꺼내줘!
절정의 환희에 젖어 있는 여인이 손을 흔들며 유혹했다.
―힘들게 살 것 없어. 어서 이리와, 이리 오면 극락의 기쁨을 누리게 해줄게!
등줄기는 서늘한데 손안에서는 땀이 고였다.
상상을 조각한 것이 아니다. 직접 보고 겪지 않은 자라면 어찌 저토록 생생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랴.
이들은 왜 이런 조각을 새긴 걸까? 정말 당시 벌어진 상황을 조각한 걸까?
풍천은 유령총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 많이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기분 더럽네.’
2
이십 장가량 들어가자, 통로가 끝나고 광장이라고 해도 될 만한 곳이 나타났다.
원형의 광장은 직경이 십 장 정도 되었는데, 사방 네 곳에 달려 있는 등잔이 요사스런 빛을 흘려냈다.
구출대는 광장이 나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위태곤과 시마청, 그리고 백초령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커다란 석문 앞이었다. 한쪽에는 아수라가, 한쪽에는 나찰이 새겨진 석문은 높이가 일 장가량 되었는데, 세 사람은 그 앞에 서서 구출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태곤이 앞에 서 있고, 그 옆에 시마청이 서 있었다.
백초령은 밧줄에 묶인 채 위태곤의 뒤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구출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빛이 창백하고 피곤함에 절어 있었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이전보다 조금 나은 듯 보였다.
풍천은 백초령을 살펴보고 그녀의 상태를 짐작했다.
‘또 아혈을 제압했군. 교활한 놈.’
한마디가 곧 정보인 상황이다. 백초령의 입을 막아서 작은 정보도 넘겨주지 않겠다는 뜻.
거기다 멀리 두지 않은 것은 언제든 백초령의 안전으로 협박하겠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철두철미하고 교활한 놈이었다.
화청백이 먼저 천천히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위태곤, 그대가 오라는 대로 왔다. 유령적을 줄 테니 초령이를 넘겨라.”
“후후후, 내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유령적의 진위여부를 먼저 가려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가리겠다는 거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아! 그 전에 소개해 드릴 분이 있다.”
위태곤은 조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숙, 문을 여시지요.”
순간!
그르르릉.
광장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위태곤의 뒤에 있는 석문이 열렸다.
구출대는 모두 그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곧 문이 반 이상 열리면서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흑의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뒷짐 진 채 석문 안에 서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그자만이 아니었다. 석문에 시선이 집중된 사이, 구출대 뒤쪽으로도 이십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반은 귀혼신마대였고, 나머지 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위태곤!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냐? 역시 마도 놈들은 어쩔 수 없구나!”
화청백은 위태곤을 노려보며 노성을 내질렀다.
위태곤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이곳에서 우리만 만날 거라는 약속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유령적을 넘기면 백초령을 우리에게 넘기고 무사히 떠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물론 그랬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고 말이야.”
“그럼 이들은 뭐냐?”
“그야 유령적이 가짜일 경우를 대비해서 부른 사람들이지. 또한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파리 떼도 막아야 할 것이고 말이야. 후후후후, 걱정 마라, 화청백.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을 테니까.”
위태곤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하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석문 안에서 흑의 중년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느다란 눈썹 때문인지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조금 마른 몸매, 헐렁해 보이는 장포,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석문 안쪽의 어둠이 같이 밀려나오는 듯했다.
나한조가 그를 보더니 눈빛을 파르르 떨었다.
“흑운신마(黑雲神魔) 운조평…….”
그러잖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구출대의 표정이 나한조의 말에 바위처럼 굳어졌다.
흑운신마 운조평은 팔대신마 중 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중년으로 보이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오십 중반으로 대문파의 주인이라 해도 그 앞에서 오만을 부리지 못했다.
신마성에서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는 팔대신마 중 한 사람이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화청백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원 무사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면 상황이 어렵게 흐르겠군.’
하지만 그는 생각도 못했다. 오늘 황산에 나타난 팔대신마는 운조평만이 아니라는 걸.
“네가 유령적을 가지고 있느냐?”
운조평이 화청백에게 물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며 구출대의 무거운 마음을 더욱 짓눌렀다.
풍천이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무거워진 분위기가 느닷없이 허공으로 붕 떴다.
운조평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삐딱하게 모로 꼰 풍천을 한 번 쏘아보고는 위태곤을 바라보았다.
위태곤은 의문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유령적을 풍천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운조평이 풍천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령적을 네가 가지고 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