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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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1화
41화
풍천이 보기에도 정말 멋진 갈대밭이 호숫가에 끝없이 뻗어 있는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리들이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그리고 곧 이십여 장 근처에서 오리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수를 박찼다.
날개 퍼덕이는 소리와 오리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온화하던 바람도 차갑게 느껴지고, 바람결에 갈대 부딪치는 소리도 스산하게 들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청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살기!’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적이 있는 것 같소. 모두 경계를 철저히 하시오.”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은 너비가 사오 장 정도. 한쪽은 갈대밭 너머로 호수가 있고, 한쪽은 사람의 키를 넘는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석초산과 비검당의 무사들은 우측을, 용수명과 수호검단의 무사들은 좌측을 주시하며 걸었다.
“두 사람은 수비에 치중하고 함부로 나서지 마쇼.”
맨 뒤에 처져 있던 풍천은 부상자인 백승문과 여공위에게 말하고 어슬렁거리며 뒤로 약간 더 빠졌다.
그 순간, 전후와 양옆 갈대숲에서 갈의를 입은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신검문 사람들을 에워쌌다.
풍천 일행은 모두 검을 빼들고 원형의 진세를 펼쳤다.
“흥! 네놈들이 본궁의 무사들을 죽이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강도위가 코웃음 치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화청백은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적의 숫자는 족히 칠팔십 명은 되었다. 인원수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숫자.
문제는 그들 중에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슬쩍 신마성의 이름을 꺼내보았다.
“천혈궁이 많이 크긴 컸나 보군. 이제 신마성의 말쯤은 상관하지 않는 걸 보니.”
“킬킬킬킬, 신마성의 이름을 빌려서 목숨을 구걸하다니, 신검문도 다 되었구나!”
오기산이 킬킬거리며 화청백을 비웃었다.
화청백은 얼굴이 벌게졌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풍천이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꼴을 당할 일은 없었거늘.
화청백이 이를 악문 채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오기산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화청백, 품속에 든 유령적을 내놓아라. 그러면 순순히 보내주마.”
진위를 떠나서, 유령적은 백초령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었다. 절대 줄 수 없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그때 적진을 살펴본 나한조가 빠르게 말했다.
“화 공자, 그자는 천혈궁의 장로로 월추 오기산입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코가 빨간 자가 주마 기독승이지요.”
화청백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장로를 둘이나 보냈다는 것은 천혈궁에서 유령적을 빼앗기로 작정을 했다는 말.
이를 지그시 악문 화청백은 검을 뽑아들었다.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에는 절대 유령적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 화청백의 귓전으로 전음이 들렸다.
[내가 저 늙은이를 유인할 테니 그사이에 뚫고 나가쇼.]
풍천의 목소리.
화청백은 그가 못 미더웠다. 하지만 말대로만 된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 화청백은 오기산을 노려보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제일 뒤쪽에 처져 있던 풍천이 훌쩍 몸을 날렸다.
“화 형, 제가 먼저 유령적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화청백은 풍천의 의도를 눈치 채고 마주 소리쳤다.
“우리가 막을 테니 어서 가게!”
장로들이 속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확인은 하려 할 것이고, 적잖은 숫자가 움직일 것이었다.
천혈궁 무사들 속으로 신형을 날린 풍천은 좌충우돌하며 검을 휘둘렀다.
눈감고 휘두른 것처럼 엉성한 검식이었다. 그런데도 서너 명이 제대로 된 대항조차 못해 보고 픽픽 쓰러졌다.
느닷없는 상황에 천혈궁 무사들이 멈칫한 사이, 풍천이 갈대숲 속으로 뛰어들며 악을 쓰듯이 외쳤다.
“주둥이를 찢어 죽일 늙은이들아! 내가 가서 천혈궁이 신마성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말해 주마!”
공명에 눈이 먼 오기산과 기독승은 풍천이 뛰어든 갈대숲 속으로 날아갔다.
“어림없다, 이놈!”
“쥐새끼 같은 놈! 이 어르신이 네놈의 주둥이를 뭉개주마!”
설령 풍천에게 유령적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둥이를 찢어 죽일 늙은이’라고 한 풍천을 잘근잘근 패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십여 명의 신검문 사람들이야 자신들이 없어도 충분할 테니까.
화청백은 정말로 풍천이 오기산과 기독승을 유인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살수를 써도 상관없소!”
그가 먼저 전면을 향해 신형을 날리자, 신검문의 무사들과 구양종이 일제히 적을 공격했다.
“놈들을 막아라! 화청백!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강도위도 악을 쓰면서 화청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로들이 없지만 적에 비해 다섯 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두 무리가 뒤엉킨 순간, 피가 튀고 비명과 악다구니가 어우러졌다.
대부분이 천혈궁 무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수호검단 단원들의 개별적인 무위는 당주들과 맞붙어도 쉽게 밀리는 않는 실력이었다. 개개인이 서너 명을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천혈궁의 무사들을 몰아붙였다.
석초산과 나한조, 궁이정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듯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석초산의 쾌검(快劍)과 나한조의 패검(覇劍)도 사나웠지만, 궁이정의 비도는 적의 포위망을 흔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쉬쉬쉬쉭!
근거리에서 발출된 비도는 여지없이 상대의 목과 가슴에 틀어박혔고, 심지어 눈에 박힌 것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비도 공격에 대여섯 명이 쓰러지자 달려들던 자들이 멈칫했다.
그때 구양종이 그들 속으로 뛰어들더니, 이 기회에 자신을 확실하게 알리겠다는 듯 팔성의 공력을 실어서 검을 펼쳤다.
쩌저저정! 떠더덩!
무거운 공력이 실린 그의 검은 일반 무사들이 맞받아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과 부딪친 자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숫자에서 차이가 너무 많았다.
다섯 배가 넘는 적들은 앞에 있던 동료가 불리해지면 즉시 달려들어서 협공했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마시오!”
화청백이 소리치며 강도위를 상대했다.
살수를 쓰기로 작정한 화청백의 검세는 이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신검문의 삼대검법 중 하나로 패도적인 검법인 일원천궁검(一元天穹劍)을 펼쳐서 강도위를 몰아쳤다.
강도위는 서너 번의 격돌로 화청백의 검세가 지닌 힘을 느끼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미세하게 밀리긴 해도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부딪쳐본 화청백의 검세는 자신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대여섯 번 부딪쳤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히고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주르륵, 뒤로 물러난 그는 주위에 있는 수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 이놈을 공격해!”
절혼당 무사 다섯이 화청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잠깐 숨을 돌린 강도위는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장로들은 뭐하는 거야? 이놈을 상대하라고 데려왔더니 그 미친놈이나 쫓아가고.’
만곽과 함께 손을 쓴다면 화청백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곽도 그를 도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저놈은 또 누구야?’
만곽은 용수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눈빛이 이미 썩은 동태처럼 회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용수명은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고 만곽을 몰아붙였다. 그런데 만곽의 장기인 혈응십팔도를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만곽이 펼치는 도세의 동선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
만곽으로선 황당하면서도 미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내 혈응십팔도를 알고 있는 것이냐!”
오죽 답답했으면 그리 물었을까.
그러나 용수명은 혈응십팔도의 투로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모르더라도 그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 정도 단순한 도법은 굳이 몰라도 될 거 같은데?”
그랬다. 십여 년 동안 수많은 무공을 연구한 용수명의 눈에 혈응십팔도는 그저 단순한 도법일 뿐이었다. 다음에 어떤 식으로 흐를지 그 흐름이 뻔히 보이는 도법 말이다.
물론 신무전의 모든 사람이 그처럼 혈응십팔도를 비웃을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일 뿐.
용수명은 만곽을 비웃으며 검을 뻗었다. 만곽이 막기 곤란한 기이한 각도로.
쉬이익!
“헛!”
대경한 만곽은 구르듯이 뒤로 물러났다.
용수명이 그림자처럼 따라가며 연속 이 검을 뻗었다.
“당주! 조심하십시오!”
만곽이 계속 밀리자, 마혈당의 수하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그 덕에 만곽은 팔이 잘리는 위기를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용수명도 만곽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달려드는 자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만곽을 그렇게 심하게 몰아붙이던 그가 마혈당 무사 셋을 상대하면서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그때 화청백이 절혼당 무사 셋을 쓰러뜨리고 소리쳤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봅시다!”
신검문 사람들과 구양종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렸다.
한편, 갈대숲으로 들어간 풍천은 오기산, 기독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달렸다.
“쫓아와 봐야 소용없다, 미친 늙은이들아! 다 삭아서 덜그럭거리는 뼈다귀를 끌고 새파랗게 젊은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초령이를 구할 목적만 없다면 두 늙은이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옷을 모조리 벗겨서 쪼글쪼글한 물건을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줬을 거야! 크크크, 축 늘어진 방울을 덜렁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웃기는군!”
오기산과 기독승은 이를 빠드득 갈며 뒤를 쫓아갔다.
“쥐새끼가 말이 많구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나 보자, 이놈!”
도망가면서 저렇게 말 많은 놈은 처음 본 터였다.
게다가 약을 올리는데, 이상할 정도로 핏대가 솟았다.
개자식, 저는 안 늙을 줄 알아?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서 경공을 펼쳤다. 눈썹이 뒤로 휘날리고, 몸 가운데서 정말로 달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갈대숲을 백오십여 장가량 달렸을 때였다. 갑자기 앞이 탁 트이더니 바람에 잔물결이 출렁이는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호숫가에는 찢어 죽일 놈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망가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킬킬킬킬! 이노오오옴! 왜 더 도망가 보지 그러느냐?”
“주둥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주마.”
오기산과 기독승은 분노가 컸던 만큼 천하를 얻은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이제 남은 것은 앞에 있는 놈을 적당히 요리하는 일만 남았다.
어떻게 죽여야 최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
패 죽일까? 찢어 죽일까? 묻어 죽일까?
오기산은 즐거운 고민을 하면서 오른쪽으로 돌아 풍천에게 접근했다. 쥐었다 편 그의 손가락에서 와드득, 관절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단 팔다리를 다 부러뜨린 다음, 눈알을 파 버리고…….’
기독승은 왼쪽으로 접근하며 끝이 뱀의 혀처럼 갈라진 기형도를 꺼냈다.
‘주둥이를 귀밑까지 찢어놓아도 떠들 수 있는가 보자, 이놈!’
풍천은 양쪽을 막고 이 장 거리에 멈춰선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뼈다귀 덜그럭거리면서 쫓아오느라고 수고하셨수. 그 보답으로 제가 편히 쉬도록 만들어드리죠.”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