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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36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2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36화

 

36화

 

 

 

 

 

 

3

 

 

 

곽산(霍山)의 동쪽 줄기를 타고 이십 리를 가면 칼날처럼 솟은 암봉을 병풍처럼 두른 제법 깊은 계곡이 나왔다.

 

계곡 안쪽에는 만여 평의 넓은 분지가 있었는데, 호리병처럼 생긴 분지의 중앙에는 십여 채의 고루전각이 지어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신마성의 산하 세력 네 곳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천혈궁이었다.

 

천혈궁은 정식 궁도의 수만 칠백. 곽산을 중심으로 사방 이백 리가 그들의 세력권이었다.

 

신마성의 비호를 받는 그들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궁세가도, 경천산장이나 신검문도 그들을 겁주지 못했다.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그들은 기회만 되면 상대의 세력권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다 보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안휘와 하남 남부 세력에게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월의 포근함이 온 세상을 꽃향기로 물들인 어느 날이었다. 

 

유시 무렵, 천혈궁의 가장 큰 전각이자 궁주의 집무처인 마혈전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단 말이냐?”

 

노기를 드러내며 묻는 자는 핏빛 장포를 걸친 초로인이었다. 

 

나이는 오십 중반쯤. 부리부리한 눈에선 은은히 붉은 빛이 돌았고, 매부리코에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쯤 섞인 수염이 턱을 가득 메워서 인상이 매우 사나워 보이는 자였다. 

 

그가 바로 구마존 중 한 사람이자 천혈궁의 주인인 혈마존(血魔尊) 구인창이었다.

 

강도위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피를 토할 듯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궁주!”

 

탁자의 양옆에 앉아 있던 자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소리쳤다.

 

“궁주, 명을 내려주십시오! 놈들을 이대로 보낸다면 세상이 저희를 비웃을 겁니다!”

 

“모조리 목을 잘라서 본궁의 위엄을 보여줘야 합니다!”

 

구인창은 천혈궁 장로와 간부들의 외침을 들으며 강도위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개처럼 이곳으로 달려왔단 말이지?”

 

강도위는 준비해 놓은 말을 꺼내며 고개를 처박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궁주! 신검일수 화청백의 목을 가져오려 했으나 놈의 무위가 예상보다 더 강해서 그만…….”

 

예상대로 구인창은 화청백이라는 이름을 듣고 눈을 번뜩였다.

 

“백무천의 대제자인 화청백이 그들 중에 있었다고?”

 

“아무래도 저희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구인창의 눈썹이 씰룩였다.

 

위태곤이 신검문의 무사들을 놔두라고 할 때부터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강도위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고개를 돌린 그는 간부들 중 왜소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소겸, 어제오늘 사이 들어온 정보가 없느냐?”

 

염소수염의 왜소한 중년인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적련방이 움직인 것 같다는 정보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습니다, 궁주.”

 

“적련방이 움직였다고?”

 

“지금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속하의 짐작으로는 신검문 놈들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때 강도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궁주, 그놈들 중 하나가 유령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혹시 유령적이라는 것이 유령총과 관계있는 물건이 아닐지요?”

 

“놈들이 정말 유령적이라 했느냐?”

 

“예, 궁주. 놈들 말대로라면, 그 물건을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인창이 눈을 반짝였다.

 

“위태곤이 백초령을 납치했는데, 화청백이 유령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위태곤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소겸, 그게 무슨 뜻이라 생각하느냐?”

 

“백초령을 납치했다는 건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일 겁니다. 강 당주의 말을 들어보니, 위 공자는 백초령과 유령적이라는 물건을 교환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바로 교환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갔을까?”

 

“뭔가 확인할 것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확인할 물건은 유령적이고 말이지?”

 

“남쪽에는 유령총이 있지요.”

 

구인창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대충 답이 나오는군.”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보물은 가지는 자가 주인인 법이지. 하남까지 가서 백초령을 납치할 정도라면 유령적이 지닌 가치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이다. 유령적을 우리가 빼앗는다면, 위태곤은 우리에게 그만한 대가를 주지 않을 수 없을 게야.”

 

복수도 하고, 보물도 얻고.

 

비록 신마성이 노리는 보물이라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도 천혈궁을 다그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결론을 내린 구인창은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위태곤의 부탁대로 놈들을 본궁의 구역에서는 그냥 보내준다. 그리고 본궁의 구역을 벗어난 후 공격할 것이다. 만 당주, 그대가 강 당주와 함께 수하들을 이끌고 놈들의 뒤를 쫓아라.”

 

간부들 중 사십 대 중반의 마른 몸을 지닌 중년인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궁주!”

 

구인창이 이번에는 우측에 서 있는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 장로와 기 장로가 따라가서 도와주시게.”

 

세모꼴의 날카로운 눈을 지닌 사람이 월추(月錐) 오기산이고, 주독이 든 것처럼 코가 벌건 사람이 주마(酒魔) 기독승이었다.

 

그들은 구인청의 명령이 떨어지자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킬킬킬, 알겠소이다, 궁주.”

 

“명을 따르리다. 시마청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물건을 우리가 꼭 뺏어야 할 것 같구려, 흐흐흐흐.” 

 

 

 

 

 

제5장. 밀월루(蜜月樓)

 

 

 

 

 

1

 

 

 

풍천 일행이 동성(桐城)에 도착한 것은 붉게 타오르던 황혼마저 어스름에 잡아먹힐 무렵이었다.

 

동성은 안휘 서남부 일대에 펼쳐진 거대한 산지가 끝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어둠이 밀려오는데도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인 기분이었다.

 

곧장 동성으로 들어간 일행은 객잔을 찾아보았다. 작지 않은 마을이어서 객잔과 주루의 깃발이 간간이 보였다. 

 

점심을 육안에서 산 딱딱한 육포쪼가리로 대충 때웠기에, 따뜻한 차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앞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일행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백초령을 구해서 천중산으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저 앞에 객잔임을 알리는 깃발이 보이자 두말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귀향객잔(歸鄕客盞)]

 

 

 

객잔의 이름부터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섭셔!”

 

일행이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점소이가 큰소리로 풍천 일행을 반겼다.

 

객잔은 탁자가 스무 개쯤 되었는데, 손님이 반 정도 차 있었다. 일행은 탁자 세 개가 연이어 빈 곳을 찾아서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풍천은 사조원들과 탁자 하나를 차지했다. 다른 사람들은 풍천과 따로 앉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풍천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는데, 식사할 때만큼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곧 점소이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다섯 개의 찻잔을 늘어놓고 절정에 이른 실력으로 번개처럼 엽차를 따른 점소이는, 자신의 실력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 풍천을 바라보았다. 

 

일행 중 오직 두 사람만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중 풍천의 표정이 훨씬 태평했다.

 

점소이는 그게 바로 높은 사람들의 여유라는 걸 점소이 생활 오 년의 경험으로 깨달은 터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공자님?”

 

사람 볼 줄 아는 점소이군.

 

풍천은 만족해하며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전에 백초령이 시켰던 요리 중 네 가지를.

 

구자암이 눈치도 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넌지시 말했다.

 

“조장, 전에는 너무 비싼 것을 시켰다고 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때와 상황이 같아? 이제는 돈을 화청백이 내잖아.

 

그래도 풍천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다른 핑계를 댔다. 

 

“둘째 아가씨가 생각나서 시킨 거요. 전에 보니까 맛있게 먹던데…….”

 

백초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자신들이 객잔에서 요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인질이 된 그녀는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몰랐다. 그것만 생각하면 비싼 요리를 먹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백초령이 좋아했던 요리라고 하자 화청백도 풍천이 시킨 것과 같은 요리를 시켰다.

 

“우리도 그것으로 먹읍시다.”

 

 

 

요리가 나올 때쯤 무사 셋이 주렴을 젖히고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풍천 일행의 반대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둘은 도를 옆구리에 차고, 하나는 검을 등에 매고 있었는데, 셋 다 평범한 자들이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그때 요리가 나왔다.

 

들어온 자를 쳐다보던 사람들도 요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특히 풍천과 함께 앉아 있는 사조원들은 눈을 빛내며 젓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늦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젓가락만 빨아야 할지 몰랐다. 

 

“자, 먹자고.”

 

풍천이 구호를 외치듯 말하고 제일 먼저 요리 그릇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기종탁과 구자암은 물론이고, 부상을 입은 여공위와 백승문도 자신들이 멀쩡하다는 걸 알리겠다는 듯 힘차게 젓가락을 놀렸다.

 

그 광경이 어찌나 살벌(?)한지 다른 탁자의 사람들은 멍하니 지켜보느라 먹지도 못했다.

 

검을 맨 두 청년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일 각가량이 지날 무렵이었다.

 

깨끗한 청삼을 입고 영웅건을 두른 그들은 앞서 들어온 세 사람과 탁자 두 개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요리가 든 그릇을 일찌감치 비운 풍천은 차를 홀짝거리며 가자미눈으로 그들을 힐끔거렸다.

 

‘이런 곳에 왜 이리 무사들이 많이 오는 거지?’

 

더 이상한 점은, 열 명이 넘는 무사가 모여 있는 걸 봤으면 적어도 놀란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상한 놈들이군.’

 

풍천은 그들을 보느라, 잔이 비었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기울였다. 

 

사조원들은 그런 풍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자미눈을 뜬 채 잔을 거꾸로 엎고 있다.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도무지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알 수가 없군.’

 

‘저러다 잔을 씹어 먹는 것 아닐까?’

 

다행히 풍천은 잔을 씹어 먹지 않고, 혀로 찻잔 둘레를 몇 번 할짝거린 후 내려놓았다. 

 

“쯔쯔쯔…….”

 

구양종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풍천은 고개를 돌리고는 구양종을 넌지시 불렀다.

 

“저기, 구양 공자. 그 요리…….”

 

대꾸해서 좋을 것 없다 생각한 구양종은 못 들은 척하며, 집어든 요리를 입에 넣고 평소보다 과장된 모습으로 씹었다. 

 

‘돼지같이 퍼먹어놓고도 아직 부족하냐? 그냥 이 공자가 먹는 거나 구경해!’

 

풍천은 그가 음식을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구양종이 다시 음식을 향해 젓가락을 뻗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구양 공자는 벌레를 좋아하나 보군요.”

 

“무슨 헛소리냐?”

 

“조금 전 먹은 음식에 시커먼 벌레가 달라붙어 있었거든요.” 

 

나쁜 자식! 그럼 먹기 전에 말해야지!

 

구양종은 풍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씹을 때 뭔가가 입안에서 터지며 묘한 맛이 났다. 본래 요리가 그런 맛이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벌레였던가 보다.

 

덜어놓은 요리는 아직 반 정도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벌레가 기어 다녔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구양종도 더 먹기가 싫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찻물로 입안을 씻었다.

 

그때 풍천이 말했다.

 

“그거…… 안 드실 겁니까?”

 

“입맛이 없군.”

 

“제가 먹어도 될까요?”

 

구양종은 요리가 담긴 그릇을 풍천 쪽으로 밀었다.

 

‘너 같은 돼지는 벌레가 있는 것도 잘 처먹을 거야!’ 그런 눈빛을 한 채.

 

풍천은 그릇을 자신의 탁자로 가져와서 뒤적거렸다. 마치 벌레가 또 있나 보려는 듯.

 

그때까지 식사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은 풍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릇 안에서 벌레가 또 나올까?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아마 벌레가 또 나온다면 그들도 젓가락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런데 풍천이, 난생처음 본 사람처럼 탄성을 지르며 검은색 새우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들어올렸다.

 

“아! 이제 보니 벌레가 아니라 새우였구나. 세상에, 검은 새우가 있다니! 구양 공자, 정말 신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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