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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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30화
30화
“백초령을 나오게 하려면 그 안에든 유령적을 꺼내 보여줘야 할 것 아니냐?”
“사람을 못 믿는군. 내가 당신들 같은 줄 알아?”
“설령 백무천이 직접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유령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초령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긴 당신 말도 일리가 있군. 좋아, 보여주지.”
풍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든 가죽 주머니를 천천히 밖으로 꺼냈다.
화청백과 석초산이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들이 가짜라는 걸 눈치 채면 일이 곤란해질 거네! 일단 초령이를 밖으로 끌어내도록 하게!“
“풍천! 서두르지 마라! 놈들에게 휘말려들지 마!“
하지만 풍천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죽 주머니를 밖으로 꺼냈다.
화청백과 석초산은 땀으로 흥건한 손을 슬며시 옷에 닦고는, 상황이 급해지면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풍천은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벌리고 위태곤을 바라보았다.
“자, 봐라.”
그들의 거리는 이 장 정도.
위태곤은 목을 길게 빼고 가죽 주머니 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금방 부서질 것 같은 가죽 주머니 안쪽에 길쭉한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자세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위태곤이 짜증나는 투로 요구했다.
“좀 더 벌려라.”
풍천은 두 다리를 벌렸다.
“이렇게 말이냐? 거 이상한 사람이군. 왜 다리를 벌리라고 하는 거지? 혹시 이상한 취미가 있는 거 아냐?”
미친놈!
그때만큼은 위태곤과 시마충은 물론이고, 화청백과 석초산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주머니를 벌리란 말이다!”
위태곤이 버럭 소리쳤다.
풍천은 피식 웃으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사람 잘못 보고 덤벼들다 맞아죽은 개처럼 눈이 썩었나? 이 정도는 알아봐야지. 좋아, 원한다면 더 보여주지.”
위태곤의 눈을 졸지에 개눈 취급한 풍천은, 위태곤이 발작하기 전에 주머니를 쫙 벌렸다.
‘안 돼……!’
‘저……!’
“으음…….”
화청백과 석초산이 동시에 침음을 흘리며, 풍천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를 주시했다.
유령적은 없다. 가짜만 있을 뿐.
과연 저들이 가짜에 속아줄까?
두 사람은 숨 한 번 쉬는 시간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제발 속기를!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유령적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걸!
풍천은 그걸 알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턱까지 치켜든 채 위태곤을 내려다보았다.
“잘 봐라, 나중에 딴소리 말고.”
위태곤은 이를 악물고 가죽 주머니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죽 주머니 안에는 낡은 옥피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길이는 여덟 치 정도 되었는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옥의 색깔이 바래 있었다.
위태곤은 사부가 그토록 욕심내는 유령적이 앞에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그때만큼은 풍천이 자신을 모욕한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설마, 백초령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가짜를 가져오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세상일이란 건 가끔 의외의 일이 벌어지곤 했다.
유령적이 일문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라면, 가짜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그는 달아오른 표정으로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풍천은 재빨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닫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잠깐!”
위태곤은 걸음을 멈추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느냐?”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초령이를 밖으로 나오라고 해!”
풍천을 노려보던 위태곤이 남호를 향해 명을 내렸다.
“그 계집을 데리고 나와라.”
곧 쪽문이 다시 열리고, 남호가 백초령을 끌고 나왔다. 여전히 백초령의 목에는 칼이 대어져 있었다.
“좋아, 칼을 치워. 그리고 그녀를 이쪽으로 보내라. 그러면 유령적을 주겠다.”
“웃기는 소리. 그건 내가 유령적을 확인한 다음의 일이다.”
일 장의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의 눈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화청백과 석초산은 이제 등까지 땀으로 젖은 상태였다.
뭔가 풍천에게 신호를 보내고 싶지만, 긴장된 상황에 자칫 실수라도 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초령이의 아혈과 밧줄을 풀어주고, 저쪽으로 보내라.”
풍천이 왼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있는 돌로 된 탁자를 가리켰다.
“그러면 내가 유령적을 저곳에 가져다 놓겠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 있어야겠지.”
비슷한 거리. 누가 손을 써도 양쪽을 동시에 점유할 수는 없을 듯했다.
위태곤은 순순히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괜찮겠군. 좋아, 남호, 그 계집을 저쪽으로 끌고 가서 아혈을 풀어줘라.”
남호가 백초령을 끌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는 것과 풀어주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풍천도 그것까지는 뭐라 하지 않았다.
가죽 주머니를 손에 든 풍천은 돌로 된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초령이 구석에 도착한 것과 풍천이 돌로 된 탁자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위태곤은 유령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나직한 발걸음소리와 옷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한편, 백초령은 환한 곳으로 나오자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위태곤과 협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처음 보는 미공자였다.
‘누군데 협상을 주도하는 거지? 풍천은 어디 가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많이 본 얼굴이 아닌가.
미공자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는 입을 반쯤 벌렸다.
‘뭐, 뭐야? 저게 풍천?’
그때 남호가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백초령은 끌려가면서도 풍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남호가 그녀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눈에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아혈이 풀어졌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화 사형!”
순간, 탁자를 향해 다가가던 위태곤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멈칫했다.
백초령의 시선이 비단옷을 입은 놈의 일행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백초령이 눈앞에 있는 애송이가 아니라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소리치는 거지? 더구나 화 사형이라고?
‘백무천의 제자 중 화 씨라면…… 화청백?’
그는 백초령의 밧줄을 풀어주려는 남호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남호! 그 계집을 풀어주지 마라!“
탁자에 가죽 주머니를 놓으며 위태곤을 주시하고 있던 풍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백초령이 화청백을 부른 직후, 표정이 급변한 위태곤이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밧줄을 풀어주려던 남호가 멈칫했다.
위태곤이 뭔가를 눈치 챘다는 말.
‘으이그, 저 바보! 지금 화청백을 불러서 어쩌자는 거야?’
자신은 백초령과 반대편에 있는 상황. 그는 급히 화청백에게 전음을 보냈다.
“화 공자, 놈이 눈치 챈 것 같수. 초령이를…….“
바로 그때, 기회만 엿보고 있던 시마충이 머뭇거리는 풍천을 덮쳤다.
쉬이익!
시마충의 손에서 푸른빛 도는 칼날이 튀어나오며 풍천을 향해 쇄도했다.
전음을 보내던 풍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휘청거리며 시마충의 공격을 벗어났다.
“무슨 짓이야!”
“케케케, 그걸 내놔!”
시마충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악착같이 풍천을 따라가며 도를 휘둘렀다.
한편, 화청백은 전음을 듣자마자 검을 빼들고 남호를 향해 날아갔다.
“초령이를 내놓아라!”
하지만 남호는 귀혼신마대의 부대주로 크고 작은 경험이 풍부한 고수였다.
그는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백초령을 끌고 뒤로 빠르게 물러나더니, 백초령의 겨드랑이에 검을 끼웠다.
“가까이 오면 이 계집의 팔을 잘라 버리겠다!”
옆구리를 뚫고 검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대경한 화청백은 눈을 부릅뜨고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히 검은 옆구리를 뚫은 것이 아니라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있을 뿐이었다.
석초산이 이를 으드득 갈며 소리쳤다.
“무사란 자가 비겁하게 무슨 짓이냐!”
“흥, 가까이 오지 마라! 더 다가오면 백초령의 팔이 잘려나가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사이, 풍천은 시마충의 연이은 공격을 서너 번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간단하게 피하고는 버럭 소리쳤다.
“모두 멈추라고 해! 이게 무슨 짓이야!”
시마충은 자신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고, 거기에 더해서 풍천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자 오기가 생겼다.
“잔소리 말고 유령적을 내놔라, 애송이!”
시마충의 끈질긴 공격에 풍천도 은근히 짜증이 났다.
백초령 때문에 공격할 수도 없으니 더 화가 났다.
“정말 이럴 거야?”
“유령적만 내놓으면 놔주마!”
미친 늙은이! 이거 가짜야!
풍천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시마충의 공세 사이를 바람처럼 누볐다.
“쥐새끼 같은 놈이 잘도 피하는구나!”
‘아, 젠장! 그냥 콱 죽여 버릴까?’
하지만 어쩌랴, 백초령의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운 좋은 줄 알아, 늙은이!’
풍천은 바람을 탄 호랑나비처럼 불규칙적으로 몸을 흔들며 시마충의 공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풍천으로선 여유 있게 피한다고 하는 행동이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살이 떨리는 광경이었다.
특히 백초령은 자신의 신세조차 잊고 간이 몇 번이나 떨어졌다가 붙었다.
‘조심해, 풍천! 옆으로 피……! 헉, 그쪽이 아냐, 바보…… 그렇지!’
그녀는 옆구리에 검이 끼워져 있는데도 풍천을 쳐다보느라 검신의 서늘함조차 잊었다.
“남호! 계집은 나에게 맡기고 이들을 막아라!”
위태곤은 시마충이 풍천을 단숨에 처리하지 못하자, 검을 빼들고 백초령의 목에 가져다 댔다.
“예, 대주.”
남호가 백초령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던 칼을 빼내고 앞으로 나섰다.
위태곤은 백초령을 끌고 쪽문 쪽으로 물러났다.
화청백이 그 모습을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멈춰! 협상을 깨겠다는 거냐, 위태곤!”
“오늘 협상은 여기까지다. 내일 다시 연락하지.”
위태곤이 협상을 내일로 미루려 하자, 풍천은 훌쩍 몸을 날려 시마충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시마충은 분기가 가득한 눈으로 풍천을 노려보았다.
신법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자신이거늘, 저딴 놈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다니.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쫓은 기분이랄까?
그때 풍천이 위태곤을 향해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이봐!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 유령적과 초령이만 바꾸면 되는데 뭐 하러 하루를 미뤄?”
“화청백을 일반 무사처럼 꾸며서 나를 속이려고 해? 보나마나 그 유령적도 가짜겠지?”
“이건 진짜다! 초령이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설마 가짜를 가지고 왔겠어?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말이야.”
풍천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화청백과 석초산조차 ‘풍천에게 있는 것이 진짜 유령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위태곤으로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저놈이 가진 게 진짜 유령적일까?’
하긴 유령적이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 해도 백무천에게는 별무소용인 물건이다. 딸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가짜를 보냈을까 싶었다.
그때, 뇌리에 기가 막힌 계획 하나가 섬광처럼 스쳤다.
위태곤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게 진짠지, 아니면 가짠지.”
“직접 확인해 본다고? 어떻게?”
위태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나와 함께 유령총으로 가자. 가서 확인해 본 후, 진짜라면 이 계집과 너를 풀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