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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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2화
22화
제9장. 유령총엔 유령이 산다
1
한 장의 서신이 신검문에 전해진 것은 시뻘건 태양이 서산으로 곤두박질 칠 때였다.
서신은 평여에 사는 거지가 가져왔는데, 정문위사는 그 서신을 받자마자 곧바로 정무당주 조환을 찾아갔다.
그리고 일 각이 지날 무렵, 신검전 안에서 일곱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죽일 놈들!”
백무천은 한 장의 서신을 탁자 위에 쫙 펴놓고 이를 악물었다.
[백무천. 백초령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긴말하지 않겠다, 딸과 유령적을 교환하자. 유령적을 내놓는다면 털끝하나 상하지 않고 돌려보내마. 그럴 의사가 있다면, 회빈(淮濱)의 웅평객잔 지붕에 하얀 깃발을 달고 그곳에서 기다려라. 만약 이틀 후 해가 질 때까지 깃발이 달리지 않으면 백초령의 손가락 하나를 자를 것이고, 하루가 더 지날 때마다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손발이 차례대로 잘릴 것이다.
추신.
경고하는데 허튼 짓 벌일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는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기를 원하니까. 만약 허튼 짓을 벌이려 한다면…… 영원히 딸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서신을 본 장로 여평선이 벌떡 일어나 노성을 내질렀다.
그의 별호는 운천검(雲天劍)으로 신검문 장로원의 원주였다. 평소 백초령은 장로원의 정원을 자주 가꾸어주며 그를 친조부처럼 따랐기에 그의 분노는 백무천 못지않았다.
“문주! 대체 유령적이 뭐기에 신마성 놈들이 둘째 아가씨를 납치하는 무리수까지 둔 것이오?”
여평선은 백무천을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백무천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유령총과 연관된 물건인 것 같은데, 본 문주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원주.”
“허어, 문주도 모르는 것을 내놓으라니, 이놈들이 지금 제정신이란 말인가?”
그때 백유현이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초령이가 놈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른다고 말해도 놈들은 믿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정말 미칠 일이로군. 군사, 혹시 군사에게 좋은 생각 없소?”
“지금으로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백유현의 말에 백무천이 고개를 돌렸다.
분노가 아무리 커도 당장은 백초령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방법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일단은 놈들의 요구에 응하십시오, 문주.”
“우리에게 유령적이 없는데도 말이냐?”
“놈들이 시간을 이틀밖에 안 준 것은 우리가 대처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놈들이 생각한 대로 우리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깃발을 단다 해도 유령적이 없지 않느냐? 놈들을 속일 방법이 있느냐?”
“초령이의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절대 유령적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버티면 저들도 초령이를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협상을 하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됩니다. 유령적이든 뭐든,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걸 내보이는 거지요.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 수단을 써야겠지요.”
“으으음······.”
백무천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평소 계략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검문이 더 클 수 있음에도 굳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늘을 속여야만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때 묵묵히 앉아 있던 조환이 질문을 던졌다.
“놈들이 오직 유령적만 원한다면 자신들을 속였다며 엉뚱한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에 대한 대책은 있습니까?”
“최소의 인원으로 최강의 전력을 꾸며서 보내야지요. 놈들도 우리 숫자가 적으면 방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겠지요.”
모두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솔직히 그 계획이 통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단 일 푼의 가능성만 있어도 일단 움직이고 봐야 했다. 백초령이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여평선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놈들이 초령이를 보여주지 않고 유령적을 빼앗겠다고 먼저 공격하면?”
“어차피 빼앗길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놈들이 유령적을 뺏으려다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럴 줄 알고 다른 곳에 숨겨놓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절반쯤은 놈들도 속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일이라면, 순순히 물건을 가지고 왔다는 것 자체가 의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에 생각해낸 것치고는 엉성한 것 같으면서도 제법 치밀했다.
백무천은 주먹을 움켜쥔 채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계획에 빈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정도로 놈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백유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풍천을 전면에 내세우면 어떻겠습니까?”
“풍천을 책임자로 내세운다?”
“그라면 적을 방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마공유의 말대로,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조환도 찬성했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사람을 자극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적도 사람인 이상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적의 시선만 적당히 돌려줘도 가능성이 일 할 이상은 늘어날 겁니다.”
그에 대해서라면 백무천도 잘 알았다.
‘그놈이라면 충분히 적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일에 그를 소모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킨다면, 풍천이 살아서 돌아올 확률은 이 할도 되지 않았다. 설령 운 좋게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멀쩡한 몸은 아닐 것이고.
마음이 착잡했다.
‘풍천을 신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거늘······.’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이었다. 하물며 일 할의 가능성이 늘어날 수 있다면 그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하다, 공유. 풍천을 위험 속으로 밀어 넣어서······.’
백무천은 마음속으로 사마공유에게 사죄하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유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좋아, 선가장으로 전서구를 보내라. 즉시 풍천을 회빈으로 보내라고 해.”
“예, 문주. 그런데 이곳에서는 누구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간부나 알려진 사람은 저들이 먼저 알아채고 경계할지 모른다. 그러니 저들이 알지 못할 만한 사람 중에서 뽑아야겠지. 일류 이상의 고수들로 한 열 명이면 적당하지 않겠나?”
“그 정도면 놈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여평선이 물었다.
“문주, 다른 곳에는 알리지 않으실 생각이시오?”
“소란을 피우면 놈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 일단은 우리의 힘으로 처리해 보도록 하지요.”
씹어뱉듯이 말하는 백무천의 두 눈에서 한광이 뿜어졌다.
자신인들 어찌 적의 요구대로 움직이고 싶겠는가. 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절실하거늘!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납치범들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신마성이여! 만약 초령이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숨을 멈출 때까지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너희들과 싸울 것이다!’
2
석양이 떨어지는 회하의 강변.
풍천은 붉게 물들어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제기랄.”
안 좋은 예상은 항상 잘도 들어맞는다.
납치범이 냇가를 따라 내려가는 걸 보고 회하에서 배를 타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놈은 회하에서 배를 탔다.
내려갔는지, 올라갔는지, 아니면 건너갔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놈이 이곳에서 배를 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배가 없고.
‘북쪽으로 온 것은 배를 타고 가기 위함이었어.’
그렇다고 강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풍천은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렸다.
“강을 따라 내려가야 할 것 같군요. 서문 낭자는 선가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회하를 따라 식현으로 간다고 전해 주쇼.”
밤을 새서 내려갈 생각이었다. 시간상 하루의 차이가 나는 만큼 거리를 줄이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다 보면 뭔가 길이 보일지 몰랐다.
그리고 식현에 가면 그 나름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조장.”
서문경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구양종이 또 토를 달았다.
“강을 건너갔을 수도 있잖은가?”
풍천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럼 댁은 강을 건너가쇼.”
헤엄쳐서 건너든, 날아서 건너든 그건 알아서 하고.
그러고는 사조원들을 재촉했다.
“자, 우리는 그만 갑시다.”
비검당 사조원들은 풍천을 따라 몸을 돌렸다.
정태민은 구양종을 바라보았다.
풍천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속이 끓었다. 그러나 지난 번 싸움 이후 풍천을 건드리는 게 왠지 모르게 꺼려졌다.
“공자, 어떻게 하실 건가?”
구양종은 속이 끓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같이 움직이도록 하지요.”
서너 걸음 걸어가던 풍천은 그 말에 입술을 비틀었다.
‘왜? 헤엄쳐서 건너지 그래?’
3
백초령은 인상을 잔뜩 쓰고 머리를 흔들었다.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몽땅 마시고 잠에서 깨어난 그날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끄응,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억지로 눈을 떠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빠진 기분.
‘여긴 어디지?’
몸을 움직이려 해도 꿈쩍을 않는다. 머리만 겨우 움직일 뿐.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바닥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다. 나직이 파도소리가 들린다.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계집이 깨어났습니다, 장로님.”
어딘가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누구세요? 제가 어떻게 된 거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궁금한 것이 한 보따린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걸까? 내가 왜 이렇게 된 걸까?
문득 눈앞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백마의 목에서 뿜어진 피였다.
‘맞아, 나는 말을 타고 있었어. 그런데 말이 죽고······.’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끊겼다.
백초령은 몸이 덜덜 떨렸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만큼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납치된 거야!’
어둠만 보이는 것도, 눈을 뭔가로 가렸기 때문이었다.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전신에서 식은땀이 났다.
바로 그때, 백마 위에서 들었던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케케케, 조금만 참아라, 계집. 네 애비가 물건을 가져오면 풀어줄 테니까.”
목소리로 봐서는 늙은이인 듯했다. 아니면 목에 커다란 가시가 걸린 놈이거나.
‘누구세요?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예요?’
“만약 네 애비가 물건을 가져오지 않으면, 네년은 지옥에 빠지게 될 거다. 그러니 네 애비가 허튼 마음을 먹지 않게 기도나 해.”
지옥에 빠진다고?
죽인다는 걸까? 아니면······.
백초령은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한 사람을 찾았다.
‘풍천! 나 좀 구해 줘! 구해 주면 앞으로는 네 말 잘 들을 게! 음식도 비싼 거 안 사먹고, 네가 시킨 것만 먹을게!’
눈물이 눈을 가린 천을 적셨다.
미칠 것 같았다. 눈이라도 보이면 조금 괜찮겠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더욱 무서웠다.
“회빈까지 가려면 아직 하루는 더 가야 합니다. 저 계집도 대소변을 처리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로?”
“옷을 다 벗겨놔. 싼 뒤에 물로 씻어내면 되니까.”
헉!
‘안 돼! 이 나쁜 놈들아아아!’
백초령은 놀라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만큼은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케케케, 벗겨놓으면 볼 만할 거야.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제법 굉장한 미태를 지니고 있는 계집이거든.”
‘거머리 같은 놈들! 똥통 속의 구더기 같은 놈들! 풍천에게 맞아죽어도 싼 놈들!’
백초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다 내뱉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한이었다.
그때, 한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저리가! 오지 마! 안 돼!’
백초령은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갔다.
조금 젊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 장로, 물로 씻어내도 냄새나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리고 백무천이 나중에 알게 될 경우 문제가 커질지도 모르오. 남호, 아혈만 찍고 기해혈을 봉한 후 밧줄로 몸을 묶어라. 그러면 볼일 보는 데 지장이 없을 거다. 볼일은 저 통에다 보면 될 거고.”
“예, 대주.”
‘누군지 몰라도 정말 고마워!’
백초령은 비록 적이지만 눈물이 나올 만큼 고마웠다.
하지만 그자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