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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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화
16화
따다다당!
벼락치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어찌 보면 단순했다. 단지 검을 뻗고 그걸 받아치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사자인 복면인은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단순히 검면을 후려쳤을 뿐인데 바위도 두부처럼 부술 수 있는 손가락 끝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정면 대결 대신, 뒤로 물러나며 풍천의 검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잠깐 여유를 얻은 풍천은 재빨리 뒤로 날아갔다.
복면인들이 조원들과 구양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구양종만이 여유가 있을 뿐, 사조의 조원들은 복면인들에게 밀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특히 화종평과 송이진은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겨우 적을 막고 있었고, 문척은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풍천은 짜증이 나고 답답했다.
비검당의 조원들은 신검문의 어느 당 무사들보다 강했다. 복면인들이 강하다 해도 전인원이 모여 있었다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섯 사람이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빈틈이 너무 많아졌다.
‘제길! 왜 내 말을 안 들어?’
뒤로 날아간 풍천은 일단 백초령 쪽으로 접근하려는 자의 등을 덮쳤다.
백초령은 검을 빼들고 구양종의 뒤에 서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하긴 해도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보기보단 제법 간이 컸다.
“조심해!”
키 작은 복면인이 풍천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백초령 쪽으로 접근하던 자는 풍천의 접근을 추호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음무기(無音無氣).
소리도 없고 기운도 느껴지는 게 없다. 단지 한 줄기 바람만이 흐를 뿐.
뒤늦게 키 작은 복면인의 외침을 듣고 몸을 돌리던 복면인은 코앞에 다가와 있는 풍천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풍천은 그의 목을 검 끝으로 살짝 찌르고 옆으로 흘렀다.
복면인은 파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검 끝에서 뻗친 검기가 그의 목을 꿰뚫으면서 사혈을 갈라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장난 같은 공격에 한 사람이 더 쓰러지자 복면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양종이나 백초령, 사조원들이야 몰래 뒤로 가서 쓰러뜨렸다 생각하며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풍천과 적대관계인 복면인들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그래서 더 풍천이 두렵고 꺼려졌다.
무사답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치욕이 아닌가 말이다.
‘더러운 놈! 무사란 놈이 뒤에서 기습을 하다니!’
그들은 속으로 그렇게 욕하면서도 풍천과 거리를 두었다.
그럴수록 풍천은 좌충우돌하며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낯짝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이 어디서 칼질이야! 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떠나! 안 떠나면 다 죽일 테니까!”
그의 신법은 단순한 선을 그으며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복면인들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못했다.
퍽!
오히려 억지로 막으려던 자 하나는 풍천의 주먹에 뒤통수를 맞고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온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희생자가 셋으로 늘었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자, 복면인들은 누구도 그를 잡으려 하지 않고 앞에 있는 상대만 공격했다.
그사이에도 풍천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쉬익! 휘이익!
그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검을 뻗고 휘둘렀다.
좋게 꾸며서 말하면 기오막측했고, 사람들이 일견하기에는 술에 취한 나비가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면서 뻗고 휘두르는 검이 치명적인 급소를 노린다는 점이었다.
“흡!”
“이런 개……!”
“조심……! 헛!”
복면인들은 그의 검이 날아들 때마다 기겁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풍천은 복면인들이 황급히 자신의 검을 피하면, 다시 백초령 쪽으로 물러서며 어디 먹잇감이 없나 눈을 번뜩였다.
“다가오는 놈은 뒤통수를 갈라 버릴 거다! 알아서 해!”
백초령만 아니라면 복면인들을 더 강하게 몰아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백초령을 지키는 것이지, 복면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손가락을 쓰는 복면인은 조금만 방심해도 백초령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고수. 그가 눈을 번뜩이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이상 백초령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자칫 백초령이 다치기라도 하면 욕을 열 바가지도 더 먹을 테니까.
‘내가 미쳤어? 실컷 싸우고 욕먹게?’
반면, 복면인들은 언제 어느 때 풍천이 기습을 할지 몰라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 바람에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던 긴장이 느슨해지고, 복면인들의 공격도 무뎌졌다.
상황이 엉뚱하게 흐르자, 키 작은 복면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이상한 놈을 처리하지 않고는 백초령을 납치할 수 없을 듯했다. 문제는 그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저런 엉뚱한 놈이 나타난 거야?’
더구나 화영쌍검이 선제공격한 자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돌아오고 있었다.
단숨에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놈 하나 때문에 틀어지다니. 이가 갈렸다.
“죽일 놈! 신법 하나 믿고 까분다만, 언제고 내 네놈의 심장을 터트려 죽일 것이다!”
그때 뭔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풍천이 소리쳤다.
“맞아! 최심조(催心爪)! 노인네, 당신 그 조법, 최심조지?”
키 작은 복면인은 흠칫하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돌아간다!”
그러고는 제일 먼저 뒤로 신형을 날렸다.
복면인들은 행여나 풍천이 뒤에서 공격할까 봐 뒷걸음질하며 물러났다.
화영쌍검이 날아오며 그들을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이놈들! 어딜 도망가느냐!”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거리가 십여 장으로 벌어진 후였다.
화영쌍검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대신 풍천을 노려보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최심조라니?”
풍천은 정태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복면인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 기다리쇼! 물어볼 게 있으니까!”
갈대숲 속으로 들어간 풍천은 복면인들을 쫓아갔다.
그는 쏘아진 화살처럼 직선으로 달려갔는데, 희한하게도 빽빽한 갈대들이 그가 잘 지나갈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삼십 장을 나아간 풍천은 앞을 노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보쇼. 그거 최심조죠?”
키 작은 복면인은 갑자기 뒤에서 풍천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겁했다.
“헉!”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여섯 명의 복면인들도 눈을 홉뜨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겨우 이 장 떨어진 곳에서 풍천이 따라오고 있었다.
“으헛!
복면인들은 등골이 오싹했다. 고드름이 등뼈에 박힌 기분.
이렇게 가까워지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만약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와서 공격했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 아닌가.
키 작은 복면인은 풍천을 떨칠 수 없다는 걸 알고 걸음을 멈췄다.
마침 놈은 혼자였다. 자신들은 일곱이고.
‘잘됐군. 차라리 여기서 죽여야겠어.’
키 작은 복면인의 뜻을 눈치 챘는지 여섯 명의 복면인이 풍천을 둘러쌌다.
풍천은 그들의 움직임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키 작은 복면인만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 최심조는 사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보군요.”
“네놈이 어떻게 알아봤는지 모르겠다만,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구나.”
“죽어요? 내가? 왜?”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았으니까. 죽여라!”
여섯 명의 복면인은 기다렸다는 듯 풍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찰나였다. 풍천의 몸이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거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며 흐릿한 그림자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상상도 못했던 광경!
대경한 복면인들은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을 휘어 감았다.
키 작은 노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흐름을 차단해!”
복면인들은 허공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갈대가 잘게 부서지며 허공에서 휘날렸다.
그때 첫 번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컥!”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사방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말이오,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봐줄 정도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사람을 독하게 만드는 거요?”
목소리가 끝날 즈음 두 번째, 세 번째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허억!”
복면인 하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다 힘없이 주저앉고, 하나는 멍한 눈으로 앞을 보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남은 세 사람과 키 작은 복면인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령이었다. 자신들이 잡을 수 없는 유령.
그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그때, 그들 앞에서 회오리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풍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키 작은 복면인과 나머지 세 복면인은 덤벼들기는커녕 황급히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풍천이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죠. 당신이 어떻게 최심조를 익힌 거죠? 이청사란 사람은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키 작은 복면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청사란 이름 때문이었다.
당금 강호에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말해 보쇼. 그 사람과 무슨 관계요?”
그 이름까지 아는 이상 속인다는 것도 덧없는 일. 더구나 입을 막기는 더 어려운 놈이다.
키 작은 복면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풍천의 말을 인정했다.
“네가 그분을 어찌 아는지 모르겠구나.”
“그거야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고, 당신은 내가 물어본 거나 대답해 주쇼. 설마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건 아니겠죠?”
갈대숲으로 들어간 지 일 각 후.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갈대숲을 빠져나왔다.
‘이청사란 사람이 그때 죽지 않았다고?’
키 작은 복면인, 그는 신마성의 장로인 추명조(追命爪) 설추교였다. 나이는 쉰일곱이었는데, 이청사에게서 최심조를 사사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조님이 청부를 실패한 거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하나?’
청부업은 신용이 첫째다. 살인청부일수록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한다.
그런데…… 위약금을 물어주고 싶어도 돈이 없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풍천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아니지, 내가 해결하면 되겠네. 그럼 물어줄 필요가 없잖아? 에이, 귀찮아 죽겠네. 사조님도 참, 청부를 확실히 해결해야지 말이야. 그랬으면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풍천이 이번에는 다른 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근데 백초령과 바꾸려고 했다는 물건은 또 뭐지?’
그는 설추교가 자포자기할 때쯤 슬쩍 백초령의 납치 이유를 물어보았다.
설추교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는 백초령을 납치해서 백무천이 얼마 전에 얻은 한 가지 물건과 교환할 목적이었다고 했다.
백무천이 몇 달 전 유령총(幽靈塚)이라는 곳에서 얻은 물건이라는데, 신마성에서 그 물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물건에 대해서는 설추교조차 정확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령적(幽靈笛)이라는 이름만 알 뿐.
‘적(笛)이라는 걸 보니 피리인 것 같은데······.’
피리 하나 때문에 백초령을 납치하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풍천은 몇 가지 질문을 더한 후 설추교와 세 복면인을 살려 보냈다. 자신과 나눈 이야기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풍무영류를 펼치느라 공력을 너무 소모한 상태. 그들을 전부 죽이려 했다가는 자신이 당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 오히려 자신을 죽이겠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들을 살려 보낸다고 해서 자신에게 손해 갈 것도 없었다. 나중에 만나면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를 이용하면 이청사를 만나기가 더 쉬울 거야.’
하거늘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뭐 하러 아등바등 한단 말인가. 궁금한 것만 알아내면 됐지 말이야.
‘그건 그렇고, 공력이 문제네. 어디 화끈하게 공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 없나?’
천풍장 뒤에 도라지가 무지 많던데, 그중에 천 년 묵은 도라지 하나 없을까? 도라지도 그 정도 되면 영약 소리 들을 수 있을 텐데······.
갈대숲을 나온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백초령이 빽 소리쳤다.
“빨리 안 오고 뭐해!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어디가긴? 놈들을 쫓아가는 거 못 봤어?
풍천은 백초령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화난 표정 속에 걱정이 깃들어 있는 것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초령이 자신을 걱정하다니!
‘뭐야? 지금 나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에이, 설마.’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저 말썽꾸러기가 한 번 혼나더니 철이 들었나 보군. 역시 사람은 한 번 어려움을 겪어봐야 세상이 얼마나 험하다는 걸 안다니까.’
내심 흐뭇해진 풍천은 백초령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름 따뜻한 말투로 물었다.
“몸은 괜찮아? 아까 보니까 가슴 쪽 옷이 찢어진 거 같은데, 다친 데 없어? 어디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