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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8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4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8화

 

8화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간 경비무사가 나왔다.

 

“취향정으로 모시라는 분부십니다, 조장.”

 

종환은 고갯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오게.”

 

종환은 검향원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정자로 풍천을 안내했다.

 

백서령은 아직 나오지 않은 듯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정자 옆에 선 풍천은 검향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꾸며져 있었다. 

 

손길이 많이 간 듯 나무들은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서 있는 기기묘묘한 정원석과 형형색색의 꽃들도 배치에 신경을 많이 쓴 듯 아름답게 잘 어울렸다.

 

게다가 정원의 중앙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만개한 수련이 그윽한 향취를 풍기며 정원의 품격을 더해 주었다.

 

백초령이 가꾼 걸까?

 

처음 봤을 때 화령초 운운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화령초가 심어진 곳과 이 정원은 품격이 천양지차였다.

 

‘그 말괄량이 같은 계집애에게 이런 재주가 있다면 내가 장을 지진다.’

 

풍천이 내심 코웃음 치며 정원을 둘러본 지 반각쯤 지날 무렵이었다. 안쪽 전각에서 녹의를 입은 중년 여인과 백의를 입은 이십 대 여인이 나왔다.

 

풍천은 백의 여인을 보고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우오오오! 정말 아름답군!’

 

눈처럼 하얀 백색 옷은 여인의 하얀 피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저 여인이 백서령인가?

 

자신을 향해 곧바로 오는 걸 보니 그런 듯했다. 

 

‘선머슴 같은 백초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까마귀와 백로까지는 아니지만, 십 리 밖에 세워놓고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종 조장은 그만 나가보게.”

 

중년 여인이 한 걸음 먼저 다가오더니 종환을 내보냈다.

 

“예, 낭랑.”

 

돌아선 종환이 정원을 벗어날 즈음, 백서령이 입을 열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목소리 역시 백초령의 까마귀 우는 목소리와 너무나 달랐다. 

 

귀가 즐거운 목소리. 꾀꼬리가 노래를 하는 듯했다.

 

가슴이 훈훈해진 풍천은 최대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소저. 저는 비검당의 풍천이라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때였다. 뒤쪽에서 고막을 긁어대는 목소리가 울리며 풍천의 말을 끊었다.

 

“당신! 여기에 왜 왔어?” 

 

윽! 저게!

 

돌아볼 것도 없었다. 꿈속에서도 알아들을 목소리였다.

 

“초령아, 무슨 짓이니?”

 

백서령이 백초령을 나무랬다. 하지만 백초령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언니, 그 인간하고 말 나누지 마!”

 

“초령아?”

 

“엊그제 내가 말했지? 웬 괴상한 인간이 하나 본문에 들어왔다고. 바로 그 인간이야. 이야기 나눠봐야 언니 품격만 떨어져.”

 

백서령도 풍천의 이름을 들었기에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초령아, 사마 공자의 사제분께 왜 그리 함부로 말하는 것이냐?”

 

“글쎄, 사마 당주는 나도 인정해. 하지만 저 인간은 아니라니까? 내 화령초를 짓밟고도 오히려 나에게 뭐라고 하는 인간이야. 곧 죽게 생긴 늙은 말도 저 인간하고 똑같아. 게다가 나를 아주 우습게 알아. 오죽하면 한 번도 존댓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저 인간은 비검당의 일개 조장이고, 나는 문주의 딸인데도 말이야.”

 

백초령이 조잘조잘 다 일러바쳤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풍천도 할 말은 있었다.

 

“그건 네가 먼저…….”

 

“시끄러!”

 

백초령은 벼락처럼 내질러서 풍천의 입을 막고 백서령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내가 그런 취급 받는 게 좋아? 저 덜 떨어진 인간에게?”

 

백서령은 동생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몇 마디 말만으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백초령이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는 것은 그녀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초령은 어려서부터 항상 백서령과 비교를 당했다. 그런데 차분한 백서령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칭찬보다는 핀잔을 듣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백서령은 강호십미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외모마저 지니고 있었다. 

 

노력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이를 느낀 백초령은 아예 선머슴처럼 하고 다녔다. 차이가 너무 나면 오히려 관심에서 멀어질 거라는 생각에.

 

옷도 털털하게 입고, 머리도 대충 묶고, 말투나 행동도 여인답지 않게 하고······.

 

얼마가 지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백서령과 백초령을 비교하지 않았다. 공작과 참새를 비교하는 사람이 없듯이.

 

백서령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겉으로 도는 동생이 안쓰러워진 그녀는, 동생이 가끔 지나친 일을 벌인다는 걸 알고도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놔두었다. 

 

다행히 성격이 워낙 쾌활해서 항상 밝은 표정이었고, 말괄량이처럼 굴어도 악의가 없어서 신검문 내의 무사들도 동생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동생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그랬는지, 아니면 동생이 먼저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다. 정작 문제는, 풍천이 백초령을 함부로 대했다는 점이었다.

 

‘네가 먼저’라는 말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했다. 

 

백서령은 조금 전과 달리 싸늘해진 어조로 말했다.

 

“사마 공자님의 사제라니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어요.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중에 나누도록 해요.”

 

풍천도 급할 것은 없었다.

 

연서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백서령이 형에 대해서 아직 잊지 않은 거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초령이에 대해서 말을 조심해 줘요. 만약 두 사형이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백무천에게는 직전제자가 둘 있었다.

 

서른한 살인 화청백과 스물아홉 살인 영호관. 

 

둘 다 혼인을 했는데, 그들은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지낸 백초령을 굉장히 예뻐했다.

 

다만 그들은 현재 신검문 내에 없었다. 

 

화청백은 천궁산의 비밀 거처에서 폐관수련 중이었고, 영호관은 모종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신검문을 떠나 있는 상태였다.

 

풍천도 그들에 대해 들은 터였다.

 

솔직히 겁날 것은 없었지만, 그들이 나서면 귀찮아질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도 무조건 굽힐 순 없지.’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말이야.

 

“조심하죠. 단, 둘째 아가씨가 하는 것만큼 대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서령 아가씨가 이해해 주십시오.”

 

풍천의 말에 백서령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무조건 풍천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초령이 오죽했으면 저럴까 싶기도 했고.

 

“알겠어요. 그만 가봐요.”

 

풍천이 돌아서려는데, 기가 산 백초령이 허리에 손을 얹고 빽 소리쳤다. 

 

“당신! 한 번만 더 나를 무시하면 가만 안 둘 거야!”

 

풍천은 백초령을 한 번 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비겁하게 언니 힘을 빌리다니. 더러워서 나도 너 상대 안 한다!’

 

백초령은 득의만만한 눈빛으로 풍천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풍천이 고개를 돌리자 혀를 쏙 내밀고는 백서령을 재촉했다.

 

“언니, 저 냄새나는 인간 상대해 봐야 언니 옷에 냄새만 배니까 그만 들어가. 유모, 언니를 방으로 모셔.”

 

‘웃기고 있네. 네 옷에서 나는 냄새가 더 독해, 계집애야. 오줌 싸다가 옷에 묻은 거 같은데?’

 

풍천은 그렇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걸 꾹 참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연못을 돌아갈 때였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뭔가가 수련 사이를 유영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어? 잉어잖아?’

 

전신이 황금빛을 띤 커다랗고 통통한 잉어였다.

 

‘우와, 진짜 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생겼네.’

 

그는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초령이 재촉하더니 벌써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리고 검향원 내부를 감시하던 자들도 백서령을 따라 움직였는지 근처에 단 한 사람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본 풍천은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 연못 속에 던졌다.

 

 

 

백초령이 연못가로 돌아온 것은 풍천이 떠난 지 일 각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연못가를 지나가며 바닥에 있는 자갈을 툭 찼다.

 

‘멍청이, 언니를 그런 식으로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풍천이 언니를 만나려는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아는 것이다. 그녀의 언니인 백서령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라, 내가 왜 이러고 다니는지.’

 

표정이 가라앉은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내가 왜 그 얄미운 멍청이를 걱정해 주는 거지? 그냥 놔두면 오줌을 찔끔거릴 만큼 혼날 텐데.’

 

어쩌면 멍청하게 보여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신검문에서 그녀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풍천이 유일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도, 언니도 함부로 대하지 않거늘.

 

하지만 얄밉긴 해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도 막 대할 수가 있으니까. 자신 역시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풍천이 유일하니까. 

 

만약 풍천이 떠난다면 또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그거야말로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었다. 단 하나 있는 즐거움이 사라질 테니까.

 

‘멍청하고 게으른 동생 하나 돌봐준다 생각하지 뭐. 그래도 강호인답지 않게 순진하잖아?’ 

 

그녀는 넓은 마음으로 풍천을 용서하고, 어리석음과 게으름으로 무장한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기로 했다. 

 

바로 그때, 연못가에서 뭔가가 보였다.

 

“응?”

 

그녀는 연못을 빙 두른 바위로 다가갔다. 검은 빛이 나는 바위 위에서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 그것은 모두 네 개로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비늘이었다.

 

금빛 비늘을 집어든 그녀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 위에 가득 피어 있던 수련이 뒤집어진 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잠시 머리를 굴린 그녀는 곧 어떤 상상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멍청이가……?”

 

급히 취향정으로 달려간 그녀는 취향정 구석에 있는 작은 통에서 잉어의 먹이를 한주먹 쥐었다. 그러고는 수련이 없는 넓은 곳에 조금씩 던졌다.

 

곧 커다란 금빛 잉어들이 몰려들었다. 

 

“하나, 둘, 셋, 넷······.”

 

잉어의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한 그녀는 손안에 있는 먹이를 전부 연못 속에 던지고 날듯이 뛰어갔다.

 

“이게 정말 죽으려고……!” 

 

 

 

* * *

 

 

 

덜컹!

 

사조원들이 기거하는 방의 방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뾰족한 고함소리가 방을 뒤흔들었다.

 

“풍 조장 어디 갔어!”

 

목소리의 주인은 백초령이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대충 누워 있던 사조원들이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고, 그중 기종탁이 빠릿빠릿한 자세로 대답했다.

 

“아까 나가셨는데,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아가씨.”

 

“어디 간 줄 몰라요?”

 

“후원으로 가신 걸 봤습니다만, 무슨 일로 조장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당신들은 몰라도 돼요. 이 인간, 잡기만 해봐라!”

 

빠드득. 

 

이를 간 백초령은 몸을 홱 돌리며 문을 쾅, 닫았다.

 

사조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대단해.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 소란이야.” 

 

“그런데 조장과 초령 아가씨는 왜 저렇게 사이가 안 좋지?”

 

“나는 그보다, 조장이 무슨 배짱으로 초령 아가씨를 함부로 대하는지 모르겠어.”

 

“사마 당주님의 아우니까 위에서도 봐주잖아. 그걸 믿고 그러는 거겠지.”

 

“좌우간 불가사의한 사람이야.”

 

“이거 이러다 우리 사조에 벼락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재수 없는 놈 옆에 있으면 자다가도 벼락을 맞는다지 않는가. 

 

모두들 불안했다. 

 

 

 

하지만 사조원들이 불안해하는 것과 상관없이 풍천은 아주 즐거웠다.

 

‘꿀꺽.’

 

그는 후원의 야산 구석진 곳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자잘한 나뭇가지를 모아 피운 모닥불 위에는 길쭉한 꼬챙이에 팔뚝만 한 물고기 두 마리가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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