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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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51화
251화
진사혁에게 졌다는 마음에 분노가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아 있던 차였다.
그로선 어떻게 해서라도 땅에 떨어진 체면을 살리고 싶었다.
마침 상대는 탁무원에게 신경을 쓰느라 자신을 도외시하고 있는 상태다.
탁무원이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그가 삼음천살강을 펼쳐낸 후였다.
어차피 이판사판. 칼도 손에 들린 마당이다.
탁무원도 독고무령을 향해 몸을 날리며 휘두르는 칼에 전 공력을 쏟아 부었다.
“여기도 있다!”
츠츠츠츠!
두 사람의 공세가 찰나의 시간차이로 독고무령을 덮쳤다.
극음의 삼음천살강과 극양의 화양마기가 어우러지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일순간 독고무령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이고, 태천일심의 기운이 실린 쌍수가 어둠속에서 춤을 추었다.
찰나였다. 수십 줄기 뇌전이 그의 손짓을 따라 일어나며 그물처럼 펼쳐졌다.
작심하고 수천제마구겁무 중 뇌룡망망겁(雷龍亡亡劫)을 펼친 것이다.
우르릉! 떠덩!
백색 강기가 사방으로 튀고, 붉은 도강이 단절되며 튕겨졌다.
부서진 강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답답한 신음.
“크윽!”
“크흡…….”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정신없이 물러서는 호금청과 탁무원이다.
흐트러진 머리. 흙빛으로 물든 얼굴. 조금 전의 오만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삼성맹의 사람들도 입을 아교로 붙인 듯 꾹 다물고 몸이 굳어버렸다.
맙소사! 신마벌의 오대신마 두 사람이 단 일수에 꺾이다니!
암천사신이 이토록 강했단 말인가!
너 나 할 것 없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신마벌의 장로인 단초안과 안승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호금청과 탁무원에게 달려갔다.
“호 형, 탁 형!”
“괜찮으십니까, 태상?”
탁무원은 겨우 중심을 잡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괜찮…… 웩!”
그의 입에서 한 움큼의 핏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나았다. 호금청은 무릎을 꿇은 채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단초안이 고개를 돌려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독고무령, 우리 신마벌은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냉랭히 말했다.
“뭘 말이오? 오대신마에 속해 있다는 두 사람이 급습을 한 걸 잊지 않겠다는 거요? 아니면 오대신마가 본회 호위무사대의 대주에게 당한 것을 잊지 않겠다는 거요?”
단초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돌아가거든 그대들의 주인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더불어 내 말도 전하시오. 신마벌이 나를 건들지 않는 한, 나 역시 신마벌과 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이오. 당신은…… 내가 직접 연안으로 찾아가는 일이 없길 바라야 할 거요.”
신마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는 판이다.
단초안은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으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한없이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오한이 들었다.
그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호금청과 탁무원이 합공을 하고도 부상을 입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왜 위지천백이 적이나 다름없는 암천사신을 그대로 두고 있는지.
‘제길, 잘못 건드렸어.’
말을 마친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신마벌의 네 사람을 쓸어보고 몸을 돌렸다.
‘일단 신마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호금청과 탁무원의 내상은 제왕대전이 끝날 때까지 치유되기가 힘들 터. 두 사람이 빠진 신마벌은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이제는 제왕성과 손을 잡는다 해도, 신마벌에서 또 다른 고수가 오지 않는 한 걱정할 것이 없었다.
작은 소란치고는 상당한 대가를 얻은 상태. 좋은 출발이었다. 위지천백이야 소식을 들으면 속이 좀 쓰릴 테지만.
‘이 일을 기화(奇貨)로 그가 움직이면 더 좋겠지.’
독고무령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이 번뜩였다.
* * *
영빈원의 일은 곧바로 위지천백에게 알려졌다.
위지천백은 상황을 전해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호금청과 탁무원이 부상을 입었다고?”
능효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를 올렸다.
“예, 전하.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어서 말리지도 못했다 하옵니다.”
“흠…….”
위지천백은 눈을 반쯤 감고, 검지로 태사의 손잡이를 톡톡 쳤다.
‘역시 죽여야 했나?’
한 번 결정한 것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 그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내일의 일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하루 이틀 시간이 더 걸려도 완벽히 누르려 했거늘, 아무래도 오래 끌어선 안 되겠어.’
결국 위지천백은 계획을 바꾸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치러야 할 홍역이라면 빨리 치르는 게 나았다.
“계획을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진평원과 영빈원 일대를 천라금쇄진(天羅禁鎖陣)으로 감싸고, 놈들의 움직임을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히 감시해라.”
능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북리중현에게 은밀히 내 말을 전하라.”
영빈원의 분위기는 겉으로나마 평온했다.
이제는 호위무사대가 정원을 오간다고 해서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각 방에선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금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해타산을 따졌다.
삼성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신마벌의 기세가 꺾인 것은 좋은 일 같습니다, 대사.”
“대신 암천회의 기세가 너무 올라가지 않았는가?”
“황보광은 독고무령을 생각이 올곧은 자라 했지요. 그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을 순 없겠지만, 반만 인정한다고 해도 제왕성이나 신마벌보다는 낫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지.”
“일단 두고 보지요. 그들이 다투어서 본맹에 손해될 일은 없으니까요.”
“허허허, 부처를 믿는 사람이 남의 불행을 원하다니. 나도 땡중인 모양일세.”
“어쩌겠습니까? 보다 더 많은 중생을 위한 길인 것을…….”
허운 진인의 말에 각진 대사는 눈을 감고 염주를 돌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탁무원이 운기를 마치고 눈을 뜬 것은 해시 초였다.
반면에 호금청은 단초안이 도와주었음에도 그때까지 운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완치하려면 적어도 열흘은 갈 것 같군. 빌어먹을…….’
탁무원은 속으로 독고무령을 욕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단초안이 물었다.
“벌주께 전서를 띄우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탁무원은 이로 뜯어낸 입술의 부푸러기를 한쪽으로 뱉어내고 나직이 말했다.
“아직 띄우지 말게.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흐를 것 같네.”
“암천회와 천룡방이 제왕성의 앞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황궁의 힘마저 얻고 무림왕에 봉해진 위지천백이네. 암천회와 천룡방의 힘이 예상보다 강하긴 하지만, 위지천백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그럼 왜……?”
단초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탁무원의 이마에 주름이 몇 줄 그어졌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예?”
“독고무령이란 놈. 괴이한 느낌을 주는 놈이야. 위지천백과는 또 다른……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짓누르는 뭔가가 있어.”
암천회가 제왕성을 무너뜨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천룡방과 손을 잡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제왕성은 누구도 넘어설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다.
그런데 왜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신마벌은 제왕성과 한 길을 가기로 잠정 결정된 상태.
그 일에 대해서 내일 극적인 순간에 자신의 입으로 밝힐 예정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내일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나서 결정해야 할 것 같군.’
* * *
신마벌과의 다툼이 있은 지 한 시진가량 흐른 시각.
독고무령은 태천일심법을 행하며 일대의 상황을 관조했다.
신마벌이 당한 이상 위지천백의 생각에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영빈원 일대의 흐름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위지천백,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뭔가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쉬익!
독고무령은 날카로운 기세가 날아들자 즉시 운공을 멈추었다. 동시에 몸 안을 휘돌던 태천일심의 기운이 아래로 밀려갔다. 그것은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느낀 몸이 스스로 반응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석 자가량 떠오르고, 퍽! 소리와 함께 뭔가가 침상을 뚫었다.
태천일심의 기운을 갈무리한 독고무령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몸이 일 장을 날아가기도 전, 그의 손에서 다섯 줄기의 지풍이 튕겨졌다.
쒜에엑!
지풍은 강궁으로 쏘아진 화살처럼 창문을 뚫고 밖을 향해 날아갔다.
<어이쿠, 제법이구나!>
한 줄기 전음이 고막을 울렸다. 장난치려다 거꾸로 당해서 깜짝 놀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지체 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독고무령은 공격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바닥에 내려서기 직전, 또다시 파공음이 일며 암기가 날아들었다.
쉬쉬쉭!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독고무령은 피하지 않고 우뚝 서서 취접라를 펼쳤다.
암기는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바위를 으깨버릴 정도의 위력이 실린 데다,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어서 막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극한에 이른 취접라는 암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잡아냈다.
암기는 엄지손톱만 했는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판알이었다.
독고무령은 땅을 박차며 손에 잡힌 주판알을 담장 위에 서 있는 원주인에게 되던졌다.
담장 위에는 공처럼 둥근 몸집을 지닌 자가 서 있었는데, 어찌나 뚱뚱한지 담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둔할 것 같은 몸집과 달리 독고무령이 던진 주판알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회수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이 되던진 주판알에는 족히 만근이 넘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엇, 하는 사이 담장 위에 서 있던 자의 몸이 뒤로 밀리며 담장 너머로 떨어졌다.
독고무령은 날아가던 그대로 쌍장을 휘둘렀다.
순간 담장 너머 쪽에서도 강맹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우르릉!
어둠이 뒤틀리며 나직한 뇌음이 고막을 울렸다.
절대의 기운!
독고무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쌍장을 연속으로 내려쳤다.
콰르릉! 쩌저적!
벽력음이 뒷마당을 흔들었다.
상대와 부딪친 충격으로 삼 장을 떠오른 독고무령은 허공에 도장을 찍듯이 쌍장을 찍어 눌렀다.
쿵! 쿠궁!
어둠이 뻥 뚫리며 둔중한 굉음이 고막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연속된 기파의 충돌에 사람들이 방을 박차고 나왔다.
“무슨 일이지?”
“이 자식들이 쳐들어 온 거 아냐?”
“그건 아닌 것 같다. 무령이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 같은데?”
“어떤 겁대가리 없는 놈이 무령이에게 덤벼들어?”
삼괴의 투덜거림이 뒷마당을 울린 순간, 독고무령의 귓전에 공격자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전음이 들렸다.
<귀찮은 놈들이 몰려오는군. 나중에 찾아가마.>
암기처럼 날아든 황금빛 주판알에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말투에서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한 공격이었던 것 같다.
이미 상대는 멀찌감치 사라진 상황.
독고무령은 담장 쪽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북리중현과 북천삼괴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몰려나와 그에게 다가왔다.
삼괴가 떠들어대면 소란만 더 커질 터. 독고무령은 그들이 묻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닙니다. 상대도 물러갔으니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북천삼괴는 의혹의 눈초리로 독고무령을 주시했다.
별일 아니라고? 그럼 달도 없는 밤에 뭐 하러 나와서 펄쩍거리며 뛰어다닌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면서.
무공 자랑할 일이라도 있나?
북리중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전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직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보니 독고무령도 뭐라 대답해주기가 애매했다.
<상대가 사라졌으니, 나중에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독고무령은 그렇게만 말하고 한무종에게 따로 명을 내렸다.
<한 형, 제왕성의 무사들이 영빈원 주위에 몰려들었소. 그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철저히 살펴보시오.>
한무종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철검위와 암천위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황금 주판알의 주인이 방으로 찾아온 것은 이 각가량이 지나서였다.
독고무령은 창문을 열고 들어오려다 몸이 끼어버린 노인을 보고 실소가 절로 나왔다. 마치 거대한 늙은 호박이 창문을 막은 것처럼 보였다.
“허, 허. 이거 창문 좀 크게 만들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