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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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50화
250화
“거참, 사람들은 왜 나를 곰이라고 부르지? 눈이 삐었나? 이렇게 잘빠진 곰이 어디 있다고 말이야.”
너 눈 삐었냐? 그런 말이다.
호금청은 난간을 넘더니 훌훌 날아서 마당에 내려섰다.
그는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냉소를 지은 채 진사혁을 조롱했다.
“어지간하면 조용히 지내려 했더니, 주둥이에 재갈을 물려야 할 곰 새끼가 한 마리 있군.”
진사혁도 지지 않고 말했다.
“얼굴이 창백한 시체는 때려봐야 재미도 없는데…….”
“이 건방진 놈이……!”
호금청은 전신에서 싸늘한 기운을 흘려내며 진사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하얗게 변해갔다.
진사혁은 두 손을 맞잡고 가볍게 손가락을 꺾었다.
우두둑,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진사혁이 나직이 말했다.
“싸우려면 덤비쇼. 나는 싸움을 입으로 하지 않거든?”
우뚝 걸음을 멈춘 호금청의 두 눈에서 서리서리 한기가 흘러나왔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입으로 싸우지 않는다면서 주둥이로 사람의 성질을 돋우는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나 역시 싸움을 입으로 하지 않지. 허나 그 전에 네놈이 누군지는 알아야겠다. 시시한 놈은 죽여 봐야 재미도 없거든.”
“암천회 회주님의 호위대주인 진사혁이오. 요즘 나에게 광천곤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긴 하던데…….”
호금청은 진사혁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미친 몽둥이라. 가운데 자는 빼고 그냥 광곤이라고 하면 딱 좋겠군.”
“광곤? 괜찮은데? 근데 댁은 누구쇼?”
“본인은 호금청이라 한다. 강호에선 삼음신마라고도 부르지.”
진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마벌의 오대신마 중 삼음신마란 말이오?”
아마 자신의 정체를 알고 간담이 서늘해졌을 터다.
호금청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눈을 부라렸다.
“이제야 네놈이 뭘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일개 호위대의 대주 따위가 감히 이 어르신에게 함부로 대들다니.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면 용서해주마.”
하지만 진사혁은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신마벌이면 겁나게 먼 곳인데, 그 먼 곳에서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지? 거참 되게 할 일 없는 분인가 보네. 그리고 왔으면 조용히 잠이나 잘 것이지, 왜 나서서 설치는 거야?”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말이 중얼거리는 것이지 웬만한 사람 평균적인 목소리 정도는 되었다.
호금청이 발끈해 소리쳤다.
“이런 곰 새끼가!”
진사혁은 피식 웃으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곰 새끼에게 얻어맞으면 그 시체 같은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궁금하군.”
끝내 호금청의 인내가 무너졌다. 불끈 핏대가 선 그는 냉랭히 소리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오냐, 이놈! 내 직접 네놈의 무릎을 부숴서 꿇려주마!”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화톳불이 타오르는 어둑한 허공에 백색 장영이 휘날렸다.
동시에 진사혁의 우수가 허리를 쓸어 가는가 싶더니 시커먼 몽둥이가 죽 뻗었다.
떠덩!
둔중한 굉음이 대기를 뒤흔들고, 연이어 백색 장영과 시커먼 곤영이 뒤엉켰다. 와중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장단을 맞췄다.
“제법이구나, 이놈!”
“당신 손도 시체처럼 생긴 것치고는 제법 단단한데?”
퍼벅! 떠더덩!
“죽어라, 곰 새끼!”
“내가 왜 죽어? 병든 당신이나 죽지!”
갑작스럽게 요란한 격전이 벌어지자, 방에 있던 사람들마저 밖으로 나왔다.
삼음신마 호금청이라는 이름은 진사혁의 표현처럼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암천회의 사람들만이 담담할 뿐, 신마벌의 사람들은 조소를 지은 채 구경하고, 영빈원에 머무는 강호의 명숙들은 우려의 눈빛으로 격전을 주시했다.
삼성맹의 각진 대사와 허운 진인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운 젊은이가 다치겠군.’
‘쯔쯔쯔, 젊은 사람들은 왜 저리 성격이 급한지…….’
상대는 삼음신마 호금청이다. 그들이 볼 때, 진사혁이 최근 들어 이름을 조금 얻었다지만 호금청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틀어졌다.
두 사람은 그들이 보는 중에도 쉼 없이 손발을 휘두르고, 곤을 휘두르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십 초가 지나가도록 진사혁이 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밀리기는커녕 어째 호금청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허어, 대단한 젊은이군.”
“정말 배짱이 두둑한 젊은이구먼.”
서서히 호금청 일행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암천회의 기세를 단숨에 꺾기를 기대했거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특히 화양신마 탁무원은 자신과 같은 서열인 호금청이 덩치만 큰 애송이 하나 제압하지 못하는 걸 보고 노화가 끓었다.
그가 보기에는 호금청이 너무 절기를 아끼는 것만 같았다.
“호 형, 사정 봐줄 것 없네. 놈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했는데, 죽인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나?”
호금청은 미칠 것 같았다.
자신도 진사혁을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진사혁의 곤법은 찰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고, 곤에서 뿜어지는 기운도 자신 못지않았다.
‘빌어먹을!’
이대로 비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는 일. 하는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쓰지 않던 무공을 써서라도 진사혁을 눕히는 수밖에!
“이놈!”
노호성을 내지른 호금청의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순간, 허공에서 백색 강기가 회오리치며 쏟아졌다.
전신을 얼려버릴 것 같은 극한의 한기가 스미어 있는 강기, 삼음천살강(三陰天殺罡)이었다.
진사혁은 상대가 비장의 절기로 승부를 내려한다는 걸 알고는, 곤을 쭉 뻗은 채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찰나!
곤 끝에서 한 줄기 묵빛 뇌전이 쭉 솟구쳤다.
동시에 밤하늘조차 꿰뚫어버릴 것처럼 솟구친 묵광이 허공에 가득한 눈꽃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전개, 강맹한 위력!
보다 완벽해진 무음관천이었다.
호금청은 다급히 삼 장을 휘둘러 진사혁의 일격을 막아내고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르륵 물러섰다.
“크으으으…….”
쿵. 쿵. 쿵.
바닥을 덮은 청석을 깨며 세 걸음을 물러선 진사혁은 고리눈을 뜬 채 호금청을 노려보았다.
충격에 속이 울렁거리고, 한기에 몸이 떨렸지만 꾹 참았다.
“어린놈이 정말 대단하구나!”
그때 탁무원이 오 장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날아들었다. 그는 작심한 듯 이런저런 말도 없이 도를 뽑아 들고 진사혁을 공격했다.
영빈원에 있다는 말은 장로급 이상의 지위에 있다는 말.
설마 그러한 자가 상대의 위험을 틈타 공격할 줄이야.
여기저기서 대경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양신마 탁무원이다!”
“진 형! 조심해!”
“저런! 비겁하게……!”
한편, 진사혁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화양신마라 했다. 호금청과 함께 신마벌의 오대신마 중 한 사람.
충격을 받은 몸으로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기도 싫었다.
‘오냐! 어디 다 와봐라!’
붉은 도기에 허공이 갈라지며 훅, 밀려드는 열기!
이를 악문 진사혁은 곤에 전 공력을 집어넣고, 가슴높이로 들어 올리며 탁무원을 가리켰다.
며칠 전에 성취를 이룬 부동관천을 펼쳐보기로 한 것이다.
언뜻 보면 느리고 힘도 없어 보이는 동작.
진사혁의 몸이 당장이라도 탁무원의 도에 동강이 날 것만 같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한무종과 관조운이 신형을 날렸다.
“멈추시오!”
하지만 탁무원의 심정은 그들과 달랐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쟁반처럼 둥근 곤영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밀려든다. 상대는 가만히 있거늘!
콰르릉!
뒤늦게 벽력음이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울렸다.
‘헛!’
그는 반사적으로 도의 방향을 틀어서 곤영을 내리쳤다.
순간!
퍽!
공기주머니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탁무원의 몸이 달려들 때만큼이나 빠르게 튕겨졌다.
진사혁을 돕기 위해 신형을 날린 한무종과 관조운 등은 그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단순히 탁무원이 물러났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기세가 맞부딪친 순간 강력한 여파가 밀려든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충돌이 있었다는 말.
두 사람이 멈칫한 사이, 탁무원은 몸의 중심을 잡고 진사혁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호금청이 밀리고 자신 역시 이득을 보지 못했다.
신마벌의 오대신마 중 두 사람이 일개 호위무사대의 대주를 이기지 못하다니!
그는 이를 뿌드득 갈고는, 붉은빛이 나는 도를 다시 치켜들었다.
“어디 다시 한번 받아봐라, 이놈!”
일순간, 그의 도첨에서 불길처럼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때 한무종과 관조운, 전유곤, 사공화정이 재빨리 진사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상대해주겠소!”
“아니, 나하고 한번 해봅시다!”
“신마벌의 오대신마가 얼마나 강한지 전부터 궁금했는데 잘 됐군.”
진사혁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쇼! 이건 내 밥이니까!”
밥?
탁무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한꺼번에 덤비겠다는 게 아니다. 일대일로 해보자는 말이다. 일개 호위무사들이!
자신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던가?
“이 빌어먹을 놈들이……!”
당장 도륙해버리고 싶었다. 목을 치고 허리를 잘라 자신을 모욕한 대가를 치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본능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 놈들. 우뚝 서서 무기를 빼드는 놈들에게서 강렬한 투기가 느껴진다.
웅크린 채 언제라도 뛰어오를 것 같은 호랑이의 기세!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탁무원은 한무종 등을 둘러보며 도를 고쳐 쥐었다.
그 사이 호금청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둘이라면 새파란 애송이들을 혼내줄 수 있을 듯도 했다.
암천회의 간부들이 걸리긴 했지만, 보아하니 그들은 끼어들 생각이 없는 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기분이 더 상했다.
자신들을 호위무사대에게 맡기고 구경만 하다니!
그때였다. 한쪽에서 구경만 하던 독고무령이 입을 열었다.
“그쯤하고 물러나게, 사혁.”
독고무령의 말은 곧 명령이다.
진사혁은 발목까지 박힌 발을 청석에서 빼내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한무종 등도 그를 따라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탁무원은 그들이 물러서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독고무령의 정체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대의 대주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이십 대의 청년. 그런 사람은 암천회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암천회의 회주, 암천사신 독고무령!
‘빌어먹을…….’
싸우자고 달려들 수도 없고, 물러서기도 어정쩡하고. 환장할 일이었다.
독고무령은 진사혁과 호금청의 대결이 막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켜보았다.
그는 진사혁을 믿기에 말리지 않았다.
신마벌은 제왕성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큰 곳. 이 기회에 신마벌의 능력을 알 수 있다면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와중에 오대신마가 부상을 입으면 더 좋고.
그런데 어느 정도 뜻대로 된 듯했다.
‘도왕에게 밀리고 나서 수련에 매진하더니, 끝내 완성했군.’
무음관천에 이어 부동관천마저 펼쳤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이제 공력만 증진되면, 천하의 절대고수들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무유관천을 완성한다면, 강호에 또 하나의 하늘이 탄생할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내심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멋지더군. 조금만 더 하면 무유도 완성하겠어.”
진사혁이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독고무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부님께 가서 잠시 쉬게.”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 같은 내공을 익힌 진원명이라면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진사혁도 독고무령의 뜻을 눈치 채고 별 말 없이 진원명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진원명은 미소를 지으며 손자를 맞이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독고무령은 진사혁을 진원명에게 보내고 탁무원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표정에서 웃음은 지워진 상태였다.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 가시오. 쓸데없이 나서서 몸 상하지 말고 말이오.”
탁무원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진사혁이라는 곰만큼이나 사람 속을 긁는다.
이마에 불거진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기분.
탁무원은 이를 으드득 갈며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애송이가 이름 좀 얻었다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
“아직도 자신들을 대단하다 생각하나 보군. 착각은 자유지만, 그로 인해 다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거요.”
독고무령이 다시 한번 탁무원과 호금청의 속을 긁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진사혁보다 한 수 위였다.
순간, 호금청이 참지 못하고 신형을 날렸다.
“이놈! 네놈은 얼마나 잘났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