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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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49화
249화
길이가 일 장이나 되는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마주앉았다.
독고무령은 위지천백에게 있어 최강의 적이자 원수였다. 또한 위지천백 역시 독고무령에게 있어 철천지원수였다.
그러함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앞에 두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북리중현은 묵직해진 가슴을 풀어주기 위해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때 위지천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지 모르겠네만, 공노명이 죽었을 때만 해도 만인의 피를 볼 작정을 하고 암천회를 제거하려고 했었지.”
“그리했으면 후회했을 겁니다.”
“그랬을까?”
“결국 노태군만 좋아졌을 테니까요.”
“흠, 그건 그렇지.”
위지천백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수천, 수만의 목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다.
독고무령은 그런 위지천백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저 역시 성주께서 노태군과 싸울 때 이곳을 칠까 생각했었지요.”
“호오, 그런데 왜 안 했나?”
“그럼 저 역시 후회했을 겁니다. 지금의 암천회를 이루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후후후, 자네 말이 맞네. 만일 자네가 이곳을 공격했다면, 내가 진정으로 분노했을 거네. 아마 태원은 물론이고, 산서 전역이 수만 명의 피로 물들었을 거야.”
“대신 성주의 야망도 꺾였을 겁니다. 무림왕이 되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지요.”
“할 수 없지. 시간을 조금 미루는 한이 있어도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거든.”
담담하게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수만의 목숨이 오간다. 칼만 안 들었을 뿐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북리중현은 바짝 당겨진 긴장을 참지 못하고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그때 독고무령의 입에서 또 한 번 날이 바짝 선 칼날이 튀어나왔다.
“노태군과 손을 잡고 백천산을 공격한 것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 일로 성주를 다시 보게 되었지요.”
“허허허, 칭찬으로 알아듣겠네.”
“맞습니다. 칭찬이지요. 성주가 아니고서야,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병법을 그토록 과감히 진행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기기 위해서 잠시 원한을 접어두는 것쯤은 언제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그게 강호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은혜를 저버려야만 한다면, 성주께선 어떤 결정을 내리실 겁니까?”
위지천백의 입가에 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북리중현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 밑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손바닥이 식어버린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반면 독고무령은 위지천백과 눈을 마주친 채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는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겠지.”
“그리 생각하신다니 다행이군요. 일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의 가족을 몰락시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자는 사지를 잘라 죽여도 죄 될 게 없다는 게 제 생각이지요.”
사방 기둥에서 타오르던 커다란 황촛불의 불꽃이 갑자기 꺼질 것처럼 키가 줄어들었다. 마치 천장이 내려와서 불꽃을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사위가 어둑해지며 억만 근 무게의 정적이 방 안을 맴돌았다.
그러나 곧 불꽃의 길이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독고무령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걸 보면, 은혜와 원한은 백짓장의 앞뒤와 같다고 한 어떤 분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도, 시일이 지나 다시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법이지. 한번 틀어진 마음 때문에 평생 상대를 멀리한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네.”
“성주께서는 가족과 동료들을 죽인 사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거야 눈앞에 놓인 일이 어느 정도 중요하느냐에 딸려 있는 문제겠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습니까?”
위지천백은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지만,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문제가 나왔으니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말하겠네. 어차피 천룡방의 주인까지 함께 있으니 잘 되었군.”
위지천백의 눈이 천천히 북리중현을 향했다.
북리중현은 위지천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록 기세에서는 밀렸어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위지천백은 북리중현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천룡방. 제왕성과 함께 천하팔패의 하나로 불리는 곳.
하지만 산서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커온 제왕성에 비하면 천룡방은 방 안의 화초였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 역시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
‘황금은 무사의 패기를 죽이는 법. 북리중현, 그대는 너무 오랜 세월을 황금에 둘러싸인 채 살아온 것 같구나.’
그에 비하면, 독고무령은 척박한 황무지에 우뚝 선 거목이었다. 그것도 단 일 년 만에 자신과 마주설 만큼 커버린 거목.
어쩌면 그래서 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죽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살려서 자신의 한 팔로 만들 것인가.
위지천백은 수염을 쓰다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말문을 열었다.
“본좌는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만큼 속이 좁지 않다네. 물론 암천회와 본성은 지난 몇 번의 싸움으로 서로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만큼 쌓인 원한의 벽이 상당히 높다고 봐야겠지. 하나 그 일은 강호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 어떤가? 본좌와 손을 잡지 않겠는가? 우리가 손을 잡으면 천하를 노려볼 수도 있다고 보네만…….”
위지천백이 말을 길게 끌며 북리중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은근한 어조로 북리중현을 흔들었다.
“물론 천룡방도 참여하겠다면 대환영이고 말이오.”
제왕성과 암천회와 천룡방이 손을 잡는다면, 위지천백의 말대로 천하를 노려도 될 것이었다.
거대한 유혹.
만약 위지천백과 원한 진 일만 없다면, 그 안에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는 걸 몰랐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였다.
하지만 독고무령에게 위지천백은 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대답은 내일로 미루지요.”
그렇다고 당장 거부하지도 않았다.
위지천백에게 칼을 겨누기에는 아직 일렀다. 주위 상황도 좋지 않았고.
‘천천히. 서둘러서 좋을 게 없다.’
서두르다 약점을 보이면, 그 순간에 끝장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북리중현은 갈등이 일었다. 천룡방은 제왕성과 크게 원한 진 게 없다.
천하를 향한 야망. 그거야말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일이 아닌가.
그러나 독고무령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 그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허험, 성주의 뜻은 알겠소만, 나 역시 독고 회주와 마찬가지로 당장 답을 내릴 수가 없구려.”
위지천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허허허,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네. 방주께서도 너무 급하게 결정 내려고 하지는 마시구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후후후, 잘하면 넘어올 것 같군.’
그럼 독고무령은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될 터. 보다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독고무령과 북리중현은 들어선 지 이 각 만에 방을 나섰다.
위지천백은 방문이 닫힐 때까지 독고무령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고는 방문이 완전히 닫힌 다음에야, 찻잔을 들어 다 식어버린 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묘한 흥분감이 전신을 뜨겁게 달구었다.
‘암천사신 독고무령, 예상했던 것보다 배는 뛰어난 놈이로구나!’
몇 번이나 죽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마 놈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차라리 무리해서라도 죽이는 게 나았나?’
하지만 그는 곧 후회스런 마음을 털고 미소를 지었다.
북리중현의 마음을 안 이상,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어리석은 놈,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의 마음도 모르면서 감히 나에게 맞서려 하다니. 나이가 어린 건 어쩔 수 없군.’
독고무령은 전각을 다 나올 때까지 얼굴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선 격랑이 흐르고 있었다.
‘위지천백, 예상은 했지만 정말 대단한 자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위지천백의 눈빛 깊은 곳에서 실낱같은 살기가 흐르는 걸 보았다.
한 번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 번은 되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허점을 보였다면, 한 푼만 더 강하게 나갔다면 위지천백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했을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론 독고무령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다만 제왕성에 들어온 암천회와 천룡방의 모든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 역시 공격을 당할 테니까. 그리고 오늘의 모든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그런데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자신과 북리중현은 무사히 전각을 빠져나왔다.
독고무령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안으며 냉소를 지었다.
‘오늘 나를 그냥 보낸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위지천백.’
그때 북리중현이 전음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과연 천하를 욕심낼 만한 자네.>
무거워진 그의 마음이 목소리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오늘 본 것이 그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방주.>
언뜻 북리중현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표정.
바람 때문에 옷자락이 나부껴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제7장 거래(去來)
제왕성에서는 방문객을 몇 부류로 나누어서 거처를 배정했다.
천하팔패의 주인에 버금가는 특급 귀빈은 제향원, 팔패의 장로나 일반문파의 주인 등 일급으로 분류된 사람에게는 영빈원, 일반간부들에겐 진평원, 각파의 정예무사들은 무객당에서 머물게 했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낭인이나 평무사들은 성 안으로 들이지 않고, 성 밖에 임시로 천막을 마련해서 지내게 했다.
그중 영빈원은 두 채의 건물로 되어 있었는데, 수용인원은 팔십 명 정도였다.
제왕성에선 암천회와 천룡방에 영빈원의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다.
독고무령의 요구도 있었고, 제왕성으로서도 관리가 쉬우니 마다하지 않았다.
독고무령 일행이 건물 하나를 차지한 영빈원의 다른 건물에는 이십여 명의 선객이 있었다.
신마벌의 사람들. 팔기보주 곽중산을 비롯해서 산서일대 중소문파의 주인들. 그리고 한 발 앞서 들어온 황보광과 유하령, 각진 대사와 허운 진인 등 삼성맹의 사람들과, 산서에서 나름 이름을 얻은 강호명숙이 칠팔 명 정도 되었다.
황보광과 유하령, 삼성맹의 사람들은 약조된 대로 독고무령 일행을 모른 척하며 태평하게 행동했다.
반면 신마벌의 사람들과 중소문파의 주인들은 암천회와 천룡방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피를 부르는 싸움을 해온 암천회다. 그들이 언제 검을 뽑아들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 달리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 속에 어둠이 밀려올 무렵.
독고무령의 방에 북리중현, 진원명, 혁련장욱, 상관연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오더니 일렁이는 황촛불 아래 모여 앉았다.
북리중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왕성이 어떻게 나올 거라 보는가?”
독고무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를 섣불리 자극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일단은 천라지망을 펼친 채 우리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겠지요.”
진원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문제가 아닌가? 이대로 아침까지 간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텐데.”
“저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검을 들이대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저들을 초조하게 만들어서 약점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거지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지요.”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일은 의외로 엉뚱한 데서 시작되었다.
* * *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화톳불이 지펴졌다. 영빈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다니는 사람은 철검위와 암천위 열 명뿐. 그들은 영빈원의 마당을 오가며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그 바람에 영빈원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그 점이 못마땅한지 건너편 건물 이 층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백의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별것도 아닌 것들이 어깨에 힘주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다 버려 놓는군.”
독고무령의 방문 앞에 서 있던 진사혁이 눈을 부라렸다.
“거기, 얼굴 하얀 양반. 보아하니 속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배 아프면 뒷간에 가서 힘이나 쓰쇼. 여기서 헛소리하지 말고.”
백의중년인은 진사혁의 말대로 유난히 얼굴이 하얘서 병든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그를 병든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가 바로 신마벌의 오대신마 중 한 사람인 삼음신마 호금청인 것이다.
호금청은 어이가 없는지 멍한 표정으로 진사혁을 쳐다보았다.
“곰 같은 놈, 지금 나에게 한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