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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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41화
241화
전무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와 태자 저하를 제외하고는 누구든 가능합니다.”
그러고는 황궁의 상황을 독고무령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태자가 이왕의 권위를 완전히 누르고 황궁을 장악했다면, 굳이 용검령까지 내놓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왕의 그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질겼다.
태자는 아무래도 황궁 장악에 시간이 걸릴 것 같자, 급한 대로 산서의 일을 먼저 처리할 작정을 했다.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용검령을 내놓는 모험을 해서라도.
독고무령은 알지 못하지만, 만약 독고무령이 용검령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황궁에서도 억지로 회수할 수 없었다.
어쨌든 전무호의 말에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위지천백의 무림왕이라는 지위와 군통솔권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전무호의 말대로라면 이제 위지천백에게 밀릴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거 괜찮군요. 그런데…… 저에게 존대를 하니 제가 어색하군요. 전처럼 대하시지요.”
“용검령은 태자 저하의 분신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용검령의 주인께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숙부와 같은 분입니다.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더구나 제가 원하는 일이니까요.”
전무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럼, 그렇게 하지요.”
* * *
알탄이 장성을 넘어 산서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쯤 황궁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들썩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앞으로 나서서 달단을 상대할 용기를 가진 자가 없다. 그저 겁에 질린 채 뒤로 물러서서 누군가가 나서주기만 바라보는 겁쟁이들만 있을 뿐.
‘후후후, 그러 겁쟁이들은 문제될 것이 없어.’
밀천객에게서 이왕이 고립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동창의 위세가 약해지면서 권력을 잡은 자들. 그들은 겉으로만 이왕의 수족일 뿐, 실제 그들을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제일 먼저 동창을, 노태군을 무너뜨리려 한 이유는, 바로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장악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건재한 이상, 설령 이왕이 죽는다 해도 태자가 조정을 휘어잡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었다.
오래도 필요 없었다.
제왕대전이 끝나면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이제 세상은 곧 나를 제왕성주가 아닌, 제국의 황제 위지천백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그가 끓어오른 가슴을 억누르며 태사의 손잡이를 움켜쥐는데, 방문 밖에서 위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소자이옵니다. 부르셨습니까?”
“들어오너라.”
위지성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바라보는 위지천백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얼마 전만 해도 천하를 질타할 것처럼 야망의 눈빛이 빛나던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술에 찌든 낭인처럼 탁한 눈빛, 거칠어진 얼굴, 부스스한 머리.
저게 어디 자신의 아들 위지성이란 말인가?
위지천백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누르고 말문을 열었다.
“너에 대해서 들었다. 어찌 된 일이냐?”
“별일 아닙니다, 아버님.”
탕!
위지천백이 태사의 손잡이를 내려치고는 참았던 노기를 터트렸다.
“별 일 아니라고? 네가 지금 이 애비를 놀리려는 것이더냐!”
“그게 아니오라…….”
“그 아이 때문이더냐? 그 아이가 너를 거부해서 화가 난 것이더냐?”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
“바보 같은 놈! 이 애비가 방법을 말해주마. 그 아이를 강제로 취해라! 할 수 있겠느냐?”
위지성이 고개를 들었다. 갈등과 혼란이 뒤범벅된 눈으로 위지천백을 바라보던 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너는 대제왕성의 후계자다. 곧 천하를 취할 이 애비의 아들이다. 그까짓 계집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거냐?”
“그녀가 아니어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정신을 다잡고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를 강제로 취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계집을 죽이겠다. 나는 내 아들이 바보같이 계집 하나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느니라!”
털썩.
위지성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 위지천백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이 되기 전에 장유유와 장이생 부부는 시신으로 변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왜 저 때문에 그녀가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만일 아버지께서 그리하신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잃게 되실 겁니다.”
“뭐라! 네놈이 감히 지금 이 애비를 협박하는 것이더냐!”
위지천백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위지성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말했다.
“그녀를 그녀의 부모와 함께 돌려보내주십시오. 그럼, 소자도 그녀를 잊고 검을 쥐겠습니다. 전보다 더 강하게 말입니다.”
위지천백은 고리눈을 뜨고 위지성을 태울 듯이 노려보았다.
“정말 그리할 수 있겠느냐? 썩은 눈동자를 버리고, 가슴에 야망을 품을 수 있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어기면 내 그 계집은 물론이고 그 가족까지 모조리 죽일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아버님.”
“좋다. 그럼,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단, 네놈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나서 풀어줄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이 애비가 대계를 이루는데 선두에 서서 싸워야 할 터. 너의 행동 여하에 따라 그 계집의 생사가 달렸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위지천백의 눈빛이 풀어졌다.
사실 장유유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위지성의 짝으로 만들기 위해서 불러와 놓고 죽인다면, 누가 자신을 따르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말을 뱉은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위지성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죽일 수밖에.
사람들의 눈보다는 아들의 정신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하니까.
‘바보 같은 놈! 세상에 널린 게 여자거늘, 그깟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네놈이 뭐가 아쉬워서!’
위지천백은 치도곤을 내고 싶었지만, 대계의 시작을 앞두고 더 이상 소란이 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가서 모든 간부들에게 제왕전으로 집결하라 전해라.”
“예.”
무릎을 펴고 일어선 위지성은 허리를 깊이 숙인 후 돌아섰다.
돌아선 위지성의 등을 바라보는 위지천백의 눈 깊은 곳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결국은 그 계집이 문젠가?’
문젯거리는 없는 것이 나았다. 없어지면 잊히는 법이었다.
* * *
독고무령은 운양, 전무호와 함께 밀호방의 정보원이 전해온 소식을 정리했다.
[대동의 도지휘사 이주경이 급사하는 바람에 지휘동지 안청이 임시로 군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위지휘사사의 지휘사 중 다섯이 거의 비슷한 날짜에 경질되었고, 소의 정천호들은 열 명이 넘게 바뀌었습니다.]
[각 소의 백호장 이상은 함부로 유동을 못하게 철저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백호장 중 강골로 유명했던 자들이 몇 명 제거되었다는 소문입니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가 모이자, 하나의 가정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무호가 그 형체를 알아보고 이를 갈며 욕을 퍼부었다.
“개자식들! 녹을 먹는 놈들이 역도의 손에 놀아나다니.”
운양이 대충 계산을 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칠 할 이상이 놈들 손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회주.”
대명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선이 있는 곳이 바로 산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거 북원의 잔당들이 끊임없이 세력을 키워 넘보던 곳이었던 데다, 이제는 북부의 가장 거대한 세력인 달단이 바로 산서의 장성 너머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산서의 군부는 그 어느 곳보다 강하고 억셌다.
그리고 황궁이 있는 북경 일대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군사가 주둔했다.
오죽하면 도지휘사사를 태원과 대동, 두 곳에 설치했을까.
산서가 무너지면, 대명이 위태롭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산서의 군부가 한 사람에게 넘어가기 직전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거의 대부분이 넘어가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힘으로 제왕성을 친다면 승산이 어느 정도 되나?”
답답한지 전무호가 물었다.
독고무령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 할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그것도 제왕성만 상대했을 경우지요.”
만일 군이 움직인다면 승산은 삼 할 이하로 줄어든다. 거기다 달단군마저 위지천백을 돕는다면, 승산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군이 자신들 편으로 돌아서면 승산은 육 할이 넘는다. 달단군을 제외했을 경우.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정도의 승률로는 싸움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가 날 테니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군의 마음을 돌린 후 제왕성을 고립시키고, 달단을 장성 밖으로 쫓아낸 뒤 제왕성을 친다면 피해가 많이 줄 겁니다.”
그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지.
“그 일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없는가?”
“대인과 함께 온 금의위들을 제가 좀 써먹어야겠습니다.”
“어떤 곳에……?”
“군을 상대하기에는 저희들보다 금의위가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금의위라는 직위가 위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군과 관은 본래부터 금의위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드는 사람들이니까.
“맘대로 하게. 천하의 용검령주가 명을 내리는데 누가 거역한단 말인가?”
밖에서 한무종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회주, 대동으로 갔던 유 형과 조 형이 돌아왔습니다.”
독고무령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유원위와 조원화를 바라보았다.
네 사람이 가서 두 사람만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광기를 터트릴 사람처럼 핏발 선 눈을 한 채.
“회주!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어찌 된 일이오? 석 조장과 연 형은?”
유원위는 이를 악물고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제왕성의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이 알탄을 만나러 온 것을 보고 셋이서 적진에 들어갔는데…….”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는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솟구치는 울분을 억눌러야만 했다.
눈물이 한번 터지면 멈추지 못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결국 형님과 사성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야기를 끝마친 유원위는 핏발 선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탁자에 처박았다.
독고무령과 운양은 유원위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허어, 진정 의기가 넘치는 사람들이로다. 그런 아까운 사람이 죽다니. 진정 하늘도 무심하군.”
전무호가 탄식하며 석도명과 연사성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때 독고무령이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석 형과 대적했던 자가 륜을 썼다고 했소?”
듣는 이의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유원위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회주. 멀리서 봐도 백광이 불빛에 선명하게 빛나는 륜이었습니다.”
“백혈쌍마륜 황암. 그자로군.”
“백혈쌍마륜…….”
유원위가 살기를 흘리며 황암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품었던 의문점을 털어 놓았다.
“저희가 파오 안에 들어갔을 때, 안에서 몇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말 중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회주.”
“뭐라 말했는데 그러시오?”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하길, ‘어쨌든 한 분은 초원을 통일하시고, 한 분은 명의 땅에서 나라를 세우시게 되었으니, 역시 정통의 피를 이으신 분들은…….’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독고무령의 무심한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었다.
“분명 그리 말했소?”
“제 목을 걸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회주!”
* * *
산서성의 승선포정사(承宣布政司)인 양곡정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정체를 알고 얼굴이 굳어졌다.
일성의 민생을 책임지는 그조차도 금의위라는 말에는 간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의위 천호장이 무슨 일로……?”
전무호는 나름 예를 갖추고 정중하게 말했다.
“태자 저하의 명을 받드시는 용검령주를 호위하고 있을 뿐이오.”
금의위만 해도 간이 철렁거리는데, 태자 저하?
양곡정은 안절부절못하며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태, 태자 저하? 용검령주?”
전무호가 당황하는 양곡정을 넌지시 윽박질렀다.
“어허, 예를 갖추시오!”
양곡정이 다급히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산서성 승선포정사 양곡정이 삼가 용검령주를 뵈오.”
독고무령은 손을 저어 양곡정의 허리를 세우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일단 안찰사와 도지휘사를 좀 불러주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