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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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9화
239화
* * *
석도명이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동이 틀 무렵, 대동에서 급전을 지닌 밀호방의 정보원이 달려왔다.
독고무령은 운양에게 건네받은 전서를 읽어본 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서 북리중현, 암천회와 천룡방의 장로들, 유하령과 한시중. 설자웅, 양우천 등 얼추 이십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독고무령은 그들이 다 모이자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달단의 십만 군사가 장성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군막을 쳤다고 합니다. 장성의 수비대들은 그들을 칠 생각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는군요.”
북리중현은 독고무령의 설명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착하자마자 독고무령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듣긴 했다. 그동안은 실감을 못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자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이 위지천백과 어느 정도나 연관이 있다고 보는가?”
“당장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움직임에 위지천백이 반드시 개입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첫째, 위지천백의 움직임과 시기가 너무 공교로울 만큼 일치합니다. 둘째, 황궁에서 그에게 군통솔권을 줄 때 달단의 공격을 이유로 들었다고 했는데, 저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온 걸 우연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세 번째는, 적을 말살시키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는 달단의 무리가 장성을 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의 우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셋, 넷이 되면 우연이 필연이 된다.
북리중현도 그걸 알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으음. 그가 정말 달단과 손을 잡았다면, 어찌 대처할 것인가?”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위지천백에게 주어졌던 군통솔권은 곧 취소될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군을 지휘하는 장수들 중 상당수가 위지천백이 심어놓은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요. 아마 그들은 황궁에서 명이 하달되어도 콧방귀를 뀌며 거부할 게 분명합니다. 그럼, 결국 또 한 번의 반전을 꾀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누가 위지천백의 끄나풀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말이지요. 해서 일단은 그것부터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진원명이 침중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위지천백이 달단과 어떤 관계인지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놈을 압박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네만.”
“그 역시 철저히 알아보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는 상탭니다.”
단순히 야망을 위해서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대가 몽골족을 통일한 알탄이기 때문이었다.
독고무령이 아는 한, 알탄은 위지천백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닌 것이다.
대제국을 이룬 알탄이 일개 강호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나라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을 감행할까?
물론 잘하면 명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지천백의 제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허나 얻는 것에 비해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산서 전체를 얻는다면 몰라도. 위지천백이 절대 줄 리도 없지만.
또 하나의 의문은, 위지천백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격을 시작한 알탄이 과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진군을 멈출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달단의 무리는 흉포한 자들. 타협보다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자칫하면 늑대를 쫓으려고 우리 안으로 사자를 끌어들인 꼴이 될지 몰랐다.
위지천백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을 끌어들인 걸까?
‘뭔가 있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제3장 어떤 죽음, 그리고 용검령(龍劍令)
달단군의 장성 밖 주둔은 산서 북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장성 인근의 양민들은 그나마 전쟁의 참화가 자신들을 덮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심할 때는 일 년에 두세 번도 지배자가 바뀌는 곳에 사는 그들에게,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것쯤은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그저 전쟁의 참화가 자신들을 비켜가 주기만 바랄 뿐.
다행인지 달단군은 사흘이 지나도록 장성 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원위는 언덕 위에 엎드린 채 구릉 아래쪽에 끝없이 늘어선 파오를 보며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휘유, 엄청나군요.”
하나에 수십 명은 들어가 잘 수 있을 법한 파오가 족히 천 개는 될 듯했다. 무리한다면 백 명도 잘 수 있을 터였다. 대충 계산해도 오만은 된다는 말이다.
“저놈들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연사성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석도명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그저 위지천백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어쨌든 놈들이 장성을 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들의 평소 행동을 생각한다면 의아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죄 없는 양민들이 참화를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더 접근해볼까요?”
조원화가 석도명을 보며 물었다.
석도명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접근한다고 해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만 위험해질 뿐.
그때였다.
“응?”
유원위가 고개를 쑥 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까마득한 곳에서 말 세 필이 달려오고 있었다.
복장으로 봐서 달단인이 아닌 중원인이었다.
날듯이 달려온 그들은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고 곧장 파오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빠르게 다가가자 달단의 군사들이 그들 앞을 막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몇 마디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달단의 군사들이 앞장서서 그들을 커다란 파오로 인도했다.
석도명 등이 짐작하기로는, 그곳이 바로 달단의 왕인 알탄의 거처였다.
“웬 놈들이죠?”
유원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석도명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왕성 놈들 같다.”
유원위와 조원화, 연사성이 놀란 표정으로 석도명을 바라보았다.
“그놈들이 왜 여기에……?”
“빌어먹을, 역시 회주께서 짐작한 대로 제왕성 놈들과 달단이 전부터 통교(通交)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단순히 위지천백이 달단의 침공을 이용하는 것과 손을 잡은 것은 상황이 다르다.
정말로 손을 잡은 거라면, 곧 천하가 뒤집어질 것이었다.
유원위도 상황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어진 채 물었다.
“그럼, 저들이 위지천백의 사자일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원화, 너는 즉시 삭주로 가서 밀호방의 사람을 만나라. 가서 전해, 제왕성 놈들이 달단의 왕을 만나러 왔다고.”
“예, 형님.”
조원화는 뒤로 빠져서 언덕을 내려가고, 석도명은 여전히 알탄의 파오에 시선을 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놈들이 이 시간에 온 걸로 봐서 바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 무리를 해서라도 접근해보자. 밤이 되면 움직일 테니 그동안 쉬도록 해.”
석양이 서산으로 떨어지는 시각이다. 반시진이면 어스름이 몰려올 터. 어둠이 몸을 가려준다면 접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달도 별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유난히 어두운 밤. 저 멀리 수백 개의 화톳불이 평원을 밝히며 타오른다.
“하늘이 돕는군.”
석도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유원위가 그도 모자란다는 듯 투덜거렸다.
“기왕이면 비까지 내리지. 저놈의 불 좀 꺼지게.”
일반 군병들이라지만, 달단의 무사들 중에 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없으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개개인은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될지 몰라도, 숫자로 밀어붙이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터. 화톳불이 꺼지면 보다 더 안전해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하늘은 유원위가 바라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지 않았다.
“가자.”
석도명이 나직하게 말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유원위와 연사성은 몸을 낮추고 그 뒤를 따라갔다.
십만 적진 가운데로 들어간다. 생각만으로도 살이 떨릴 만큼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척.
석도명은 손을 들어 유원위와 연사성을 세우고는, 자신의 키만 한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경비병들과의 거리는 오십 장 정도. 적들은 아직 자신들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사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세 사람은 무기를 몸에 바짝 붙인 채, 몸을 최대한 낮추고 거의 기다시피 전진했다.
외곽의 파오에서 알탄이 있는 파오까지는 백 장거리. 중간에 적어도 세 곳의 경비망을 통과해야 했다.
스스스슥.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바람소리보다 작았다.
첫 번째 경비망은 워낙 간격이 넓어서 통과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두 번째 경비망과 알탄이 있는 파오 주위의 경비망이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두 번째 경비망을 뚫을 방법을 찾고 있는데, 유원위가 잔머리를 굴려서 의견을 내놓았다.
<외곽 경비를 처치하고 옷을 바꿔 입는 게 어떻겠습니까?>
달단의 병사처럼 꾸미자는 말.
석도명이 생각해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처음부터 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자신의 머리를 치고 싶을 만큼.
마침 자신들이 지나온 곳에는 병사 넷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무혈입성으로 인해서 긴장이 한껏 풀어졌는지, 남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앉아서 킬킬거리는 게 영락없이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좋아, 저놈들을 처리하자. 절대 소리를 지를 틈을 줘서는 안 된다. 만일 놈들이 소리를 치면 즉시 이곳을 전력으로 벗어나라.>
유원위와 연사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쥐처럼 재빠르게 구덩이를 기어 나왔다.
쉭!
엄지손톱만 한 주사위가 어둠을 뚫고 날아가 킬킬거리던 자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뽁!
“어…….”
나머지 세 명의 병사는 자신의 동료가 눈을 멍하니 뜬 채 옆으로 기울어지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이봐?”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등 뒤로 사신의 그림자가 덮쳤다.
퍽! 서걱!
병사들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부서지고, 한 사람은 목이 반쯤 잘렸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처음에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주사위가 머릿속에 박힌 채 뒤로 넘어갔다.
석도명 등은 단숨에 네 명의 무사를 처리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달단 병사들은 여유만만 했다.
하긴 십만 병력이 있는 곳에 누가 감히 들어온단 말인가.
더구나 명나라 군사들도 자신들과 암중 협약을 맺었지 않은가 말이다.
“제길, 되게 따분하군. 싹 쓸어버렸으면 계집이라도 하나 건졌을지 모르는데…….”
“클클클, 명나라 놈들이 죽기 살기로 막았으면 그 전에 네놈의 목부터 달아났을지도 모르지.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그들의 목소리는 십여 장 떨어진 곳을 걸어가는 석도명 등의 귀에도 들렸다.
너무 빨라서 전부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대충 들어도 달단군과 명군 사이에 암중협약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지천백이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도명은 이를 지그시 악문 채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록 달단군의 복장을 했다고 해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몽골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유원위뿐. 누군가가 그들을 붙잡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정체가 탄로 날지 몰랐다.
그들은 최대한 파오의 그림자에 묻혀서 걷고, 행여나 달단의 병사들이 파오에서 나오면 그들을 피해서 방향을 틀었다.
이제 마지막 경비망만이 남은 상태. 세 사람은 일단 파오의 그늘에 바짝 붙어선 채 마치 경비병인 것처럼 행동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회는 뜻밖에도 빠르게 왔다.
알탄의 파오를 중심으로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파오에서 몇 사람이 웅성거리며 나오더니 힘겨루기를 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달단 특유의 전통 무술을 겨루는 듯했다.
알탄의 파오 주위를 경비하던 자들이 그곳을 주시하며 환호를 질렀다.
그러자 그 광경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경비병들도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한쪽에 구멍이 뚫렸다.
석도명은 파오의 그늘에서 나와 알탄의 파오로 접근했다. 자연스럽고 빠르게.
어둠으로 검게 물든 파오에 도착한 석도명은 파오의 아래쪽 가죽을 조심스럽게 가르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파오가 대형이라 그런지 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차라리 잘 됐군!’
그는 가죽을 좀 더 길게 가른 뒤 경비병들이 돌아오기 전에 파오 안으로 들어갔다. 곧 유원위와 연사성도 그를 따라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그대의 주인은 언제 움직인다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