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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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4화
234화
위지천백은 오연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 인사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받겠다. 모두 일어나라!”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바늘만 떨어져도 천둥소리처럼 들릴 것처럼 고요한 전각 안에 위지천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위지천백의 영광은 곧, 우리 제왕성 모두의 영광이다! 한 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목숨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는가!”
격동에 찬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성주! 저희의 목숨은 이미 성주께 바쳤습니다!”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저희의 목숨은 성주의 것이옵니다!”
“성주께 영광을!”
“속하들은 무림왕 전하와 함께할 것이옵니다!”
위지천백은 만족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자랑스러운 제왕성의 무사들이여! 구월 구일, 본좌는 제왕대전을 열어서 만인을 초대한 다음,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릴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축배는 영광의 그날에 들도록 하라!”
간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명을 따르리다!”
구월 구일의 제왕대전(帝王大典)!
그날까지 한 달가량이 남았다. 그날 제왕대전이 열리고 나면 천하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흐른다.
위지천백은 벌써부터 천하가 가슴에 안겨든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곧, 천하가 내 품에 들어올 것이다! 나 위지천백의 품에!’
간부들이 모두 나간 제왕전에 위지성과 등후양, 영호진광만이 남았다.
위지천백은 보다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장가장의 장주와 여아가 도착했다고 들었다. 만나봤느냐?”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흠, 무엇보다 네가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인즉, 가서 만나보도록 해라. 너만 마음에 든다면, 제왕대전에 맞춰서 혼인을 추진할 것이니라.”
“예, 아버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위지성이 전각을 나서자 위지천백의 눈이 등후양과 영호진광을 향했다.
“지금은 군통솔권이 나에게 넘어왔어도 군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고 봐야 하네. 하지만 곧 북쪽에서 달단(韃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군도 우리 명을 거역할 수 없게 되지. 그 사이 군의 수장들을 우리 쪽 사람으로 바꿀 것이네. 그 일을 하는데 자네들이 수고 좀 해줘야겠어. 늦어도 제왕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걸 정리할 생각이야.”
“명만 내리시지요, 무림왕 전하.”
등후양의 말에 위지천백이 조용히 웃었다.
“허허허, 나도 사람이라 그런지,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그래도 아우들은 나를 그냥 형님이라 부르게. 나에게도 아우 몇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등후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누구보다 냉철한 위지천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강자를 대우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아는 위지천백은 그랬다. 과거의 위지천백이야 어쨌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영호진광이 넌지시 물었다.
“정말 암천회를 저대로 놔둘 것입니까?”
“이제 우리의 상대는 암천회 따위가 아니네. 제왕대전이 끝나면 그들은 감히 대항할 엄두도 못 낼 것이네.”
“그렇긴 합니다만…….”
영호진광도 위지천백의 생각을 모르지 않았다.
무림왕이 되고, 비록 형식적이지만 군통솔권까지 쥔 만큼 암천회는 감히 제왕성에 반기를 들 수조차 없게 되었다.
거기다 구월 구일에 진행할, 일명 제왕대전만 끝나면 제아무리 암천회가 강하다 해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천자 앞에 만인이 무릎을 꿇듯이 말이다.
그런데…… 암천사신만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후우, 내가 너무 그를 신경 쓰는 것인지도…….’
* * *
독고무령은 금의위로 돌아온 즉시 황궁을 나섰다.
이왕의 거처는 금의위와 삼성맹의 고수들이 장악한 상태. 이제 나머지 일은 태자와 금의위가 알아서 할 것이었다.
황궁을 나선 독고무령은 일행들을 전무호에게 딸려 보내고, 백화명을 찾아가기 위해 일행들과 헤어졌다.
새벽에 갑자기 찾아가면 놀랄지 모르지만,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북경을 출발할 계획인 것이다.
그런데 모용설이 따라나섰다.
정수교를 찾아가려는 거라 생각한 독고무령은 별 생각 없이 그녀의 동행을 허락했다. 정수교의 집에 아직도 제왕성의 무사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 그녀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날 정수교의 반응도 왠지 마음에 걸렸고.
하지만 모용설은 정수교의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다음에 와서 만나죠, 뭐. 제왕성 무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그들의 신경을 건들 필요는 없잖아요? 일단 회주의 백부님부터 뵈러 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 다시 물어봤다.
“정말 괜찮겠나?”
“괜찮다니까요. 시간 없으니 어서 가요.”
아무래도 정수교를 만나러 북경에 간다고 말한 것은, 순전히 핑계에 불과한 것 같았다.
‘여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럴 거면 그냥 전무호의 집에서 쉬고 있지, 힘들게 왜 따라나선 거지?’
그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랐다.
백화명의 부인은 새벽에 찾아온 독고무령을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겼다.
“아이고, 왔구먼.”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야 잘 지냈지. 어여 들어와. 거기 아가씨도.”
백화명의 부인은 독고무령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모용설을 힐끔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독고무령과 새벽에 함께 다니는 여자라면 굳이 물어볼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독고무령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뭔가 변명을 하려는데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커험,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뭐하느냐?”
백화명의 부인은 눈물을 재빨리 훔치고는 백화명의 방을 바라보며 한소리 했다.
“어이구, 저 양반이 웬일로 일찍 일어났대?”
백화명도 모용설을 부인과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름이 뭔가?”
“모용설이에요.”
“흠, 이름도 예쁘군.”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함을 느낀 독고무령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백부님…….”
“그래, 우리 무령이는 언제부터 알았나?”
“올 초부터 계속 함께 있었어요.”
말뜻이 묘하다. 독고무령은 백부와 백모의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하지만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백화명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용설은 얼굴까지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계속 함께할 생각이에요.”
백화명은 흐뭇하게 웃으며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해서 걱정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구나. 딸 아들 구별 말고 많이만 낳아라.”
“백부님, 그게 아니라…….”
“자고로 자식이 많아야 집안이 잘 되는 법이니라.”
말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 같은 상황이다. 그저 모용설을 데려온 자신의 잘못이었다.
‘후우, 그래, 백부님과 백모님의 마음이 편해지신다면야…….’
그때 백화명의 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럴 때가 아니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 바로 맛있는 걸 만들어주마.”
모용설이 그녀를 따라 재빨리 일어섰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매일 검만 만졌던 모용설이 뭘 할 수 있을까. 독고무령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음식을 내온 백화명의 부인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어휴, 젊은 아가씨가 정말 못하는 게 없구나. 어쩜 솜씨가 그리 좋은지……. 당신도 좀 먹어봐요. 정말 맛있게 만들어졌어요.”
독고무령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음식을 먹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두어 번 씹기도 전에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만 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게 어느 객잔의 음식보다도 입맛에 맞았다.
‘검만 휘두르던 여자가 언제 이런 요리법을 익힌 거지?’
그는 꿈에도 몰랐다. 참화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용가문에서도 알아주는 요리솜씨를 지닌 사람이 바로 모용설이었다는 걸. 사실 오늘의 솜씨는 반도 발휘되지 않았다는 걸.
그동안 식칼 대신 사람 잡는 검만 휘둘렀으니까.
어쨌든 독고무령은 백부와 백모가 좋아하자,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백화명 부부와의 오붓한 시간은 한 시진으로 끝이 났다.
독고무령은 자신이 지닌 은자를 백화명의 부인에게 몰래 건네주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전무호의 집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모용설을 보고는 이상한 눈초리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출발을 알렸다. 이런저런 말을 해봐야 이익 될 게 없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그때 전무호가 금의위 백호장의 신분을 뜻하는 영패를 내밀었다.
“이건 자네들이 가지고 있게나.”
황궁을 떠나올 때 미처 반환하지 못한 것을 돌려줬는데, 그걸 다시 내미는 것이다.
“왜 이걸 저희에게 주시는 겁니까?”
단순히 선물로 주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전무호가 말했다.
“제왕성이 군을 움직이게 될 경우, 어쩌면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몰라서 도독께 보고를 올렸네. 괜찮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당분간 자네들을 금의위 적(籍)에 올려놓기로 했네. 조카는 천호장, 나머지는 백호장일세.”
독고무령이 생각해도 쓸모가 많을 것 같았다.
금의위의 천호장이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지위가 아닌가.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궁의 상황이 변하는 대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네.”
“기다리지요.”
* * *
북경을 출발한 독고무령 일행은 석가장까지 곧장 내달렸다.
그곳에서 밤을 보낸 후, 천룡방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관조운과 한무종을 한단으로 보내고, 나머지만 낭자관을 넘었다.
그들이 낭자관을 넘어서 이십여 리가량 내려갔을 때였다.
챙! 차창! 떠더덩!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메아리치며 계곡을 울렸다.
독고무령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늦추었다.
“누가 싸우는 거지?”
진사혁이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평정을 삼십 리 정도 남겨 놓은 상황. 갈 길이 급한 만큼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자꾸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상당히 강한 자들이 겨루는 소리다.’
독고무령은 소리만 듣고도 싸우는 자들의 능력을 대충 짐작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들의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 대기가 그 여파에 비명을 내지른다.
외진 곳에서 싸우는 절정고수들. 아니 흐르는 기파를 봐서는 초절정의 고수도 있는 듯했다.
이 근처에서 그럴 만한 자들이 누가 있을까?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군. 가보세.”
계곡 안에서 이십여 명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계곡을 흔드는 묵직한 벽력음. 모두가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절정 이상의 경지에 달한 고수들.
의외였다.
저 정도 고수들을 다수 보유한 문파는 산서를 통틀어도 다섯 곳을 넘지 않는다. 철검보가 무너진 후 근처 백 리 이내에는 아예 없다.
누굴까? 누군데 이런 외진 곳에서 싸우고 있는 걸까?
열대여섯 명이 다섯 명을 포위공격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평범한 복장이어서 정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그들과 싸우고 있는 다섯 사람도,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도 지저분해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독고무령이 멀리서 격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괴인들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 중 한 사람이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를 본 독고무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적수천?’
하지만 독고무령은 적수천보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 때문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저 검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