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28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28화
228화
저만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장소천이 보였다.
끊길 듯 말듯 들리는 미약한 숨소리. 여전히 변함없는 창백한 안색.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긴 이상이 있으면 호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알렸겠지.
독고무령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장소천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막 침상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언젠가 질리도록 맡아본 고약한 냄새가 장소천의 숨소리에서 묻어나왔다.
치선이 주장하는, 일명 선단의 향기였다.
‘끄응, 끝내 먹였군.’
* * *
“으음…….”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밝은 빛이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긴 어딜까? 나는 지금 살아있는 걸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 듣기 좋은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정신이 드나?”
장소천은 눈알만 굴려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들어본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들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친구의 목소리라는 것이었다.
“무…… 령?”
“맞아. 나야.”
장소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또 울면 놀릴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맺혀 있었다.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유에게 말하지 말게.”
“그러지. 대신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네.”
“그래야지…….”
장소천은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나직한 숨소리를 흘리며 잠이 들었다.
독고무령은 잠이 든 장소천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천은 모를 것이다. 독고무령이 닷새 만에 일어났다는 걸. 친구를 위해서 닷새 동안 내력을 쏟아 부었다는 걸.
‘훗, 이거 치선 어르신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몸을 돌리는 독고무령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어이가 없었다.
치선이 선단(?)을 먹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소천도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설사를 할 지 몰라서 천을 한 뭉치나 갖다 놓았거늘, 그 천은 시커멓게 흘러나오는 땀을 닦는데 소모되었다.
게다가 어떤 약을 먹였는지, 오히려 장소천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닷새 간 식음을 전폐했음에도 기력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내상도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좋아졌고.
독고무령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선 어르신에게 약을 더 얻어서 먹여 볼까?’
제8장 이미 틀어진 운명인 것을……
독고무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밖으로 나가자 철검위와 암천위가 주위로 몰려들었다.
“회주!”
진사혁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부르자, 독고무령은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네.”
진사혁은 차마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멋진 친구네. 내 평생 자네와 친구로 지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네.’
자신이라면 과연 독고무령처럼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친구를 위해서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독고무령은 마치 방금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운양에게 가봐야겠네. 내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거야.”
진사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떨려서 나올 것 같았다.
독고무령이 걸어가자 철검위와 암천위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경의의 표시였다.
독고무령은 손을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너무 그러지들 마시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철검위와 암천위는 더욱더 가슴이 뜨거워졌다.
특히나 모용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느라 고개를 돌려야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도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운양은 방으로 들어서는 독고무령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 나오지 않으면 제가 직접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닷새 동안 모든 것을 닫아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장소천의 몸을 치료하는 중에도 귀는 열어두고 있었다. 운양은 방 밖에서 보고를 했고.
그런데 운양의 표정을 보니 굉장히 다급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 알고 보니 별일은 아니었지만.
“급한 일? 생겼죠. 삼공께서 매일처럼 찾아와 닦달하는데 제가 아주 말라죽게 생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운양의 눈이 조금은 안으로 들어간 듯 보였다.
“치선 어르신에게 약이나 하나 달라고 하지 그랬나?”
혹시 알아? 장소천처럼 부작용이 없을지.
하지만 운양은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미쳤습니까?”
치선의 약을 먹느니 차라리 개똥을 집어 먹는 게 나을 것이었다. 적어도 사흘에 걸친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독고무령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 제왕성의 움직임은 어떤가? 아직도 변화가 없는가?”
그제야 운양도 표정을 가라앉히고는, 넘어진 의자를 세운 후 앉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떠보기 위해서라도 검을 들이댈 법한데 말이지요.”
은룡산장을 무너뜨림으로써 제왕성은 진정한 산서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암천회만 제거하면 누구도 감히 그들에게 검을 들이대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관제산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암천회를 치려하지 않는 걸까? 언제라도 무너뜨릴 수 있으니 급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독고무령은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암천회를 치면 안 되는 이유는?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고……. 그럼, 적잖은 피해를 각오해야 하니까?’
무천련을 칠 때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격적인 공격을 자제했다. 은룡산장과의 싸움을 대비해서.
그럼 이번에는?
‘만일 누군가와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천하로 나가려면 산서를 감싸고 있는 천룡방과 삼성맹, 신마벌 중 하나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삼성맹은 제왕성으로서도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천하팔패 중 최강의 단체다.
그럼 결국 천룡방과 신마벌 중 하나를 쳐야 한다는 건데, 위협이 될 만큼 커진 암천회를 놔두고 원정을 한다는 건 자멸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문득,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황궁!’
동창이야 이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황궁의 보복도 이왕을 움직였다면 어느 정도 해결된 문제다.
그런데도 황궁과 싸울 일이 있을까?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다.
위지천백의 욕망!
독고무령은 굳어진 표정으로 운양에게 물었다.
“초연에게는 별 다른 연락이 없었나?”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감이 감돈다고만 하더군요.”
뭔가 몰라도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제천각의 시비로 있는 초연이 모를 정도라면, 그 일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최상층부의 사람들뿐인 듯했다.
‘오로에게 알아보라고 할까?’
제왕성에 대해서 그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문제는, 현재의 제왕성은 그들조차 위험할 정도로 용담호혈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간다고 하면 보나마나 모두가 말릴 것이고…….’
오로와 진원명, 심지어 삼괴까지 나서서, 단체의 장이 된 이상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유념하라고 재삼재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는 판국이다.
말해 봐야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독고무령이 말했다.
“내가 직접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군.”
운양은 독고무령의 말에 가자미눈을 떴다.
“아예 생각도 마십시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지요.”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네.”
“회주, 누구 말려 죽이려고…….”
“밤에 갔다 내일 오시 때까지 오지.”
“내일 아침에 삼공 어르신이 또 몰려와서 저만 볶아댈 텐데요?”
“소천이 치료를 하루 정도 늘리면 될 것 같은데.”
도저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운양의 입에서 한숨과 신음이 연이어 나왔다.
“어휴, 끄응. 꼭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수상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위지천백이 하늘을 뒤집으려고 하는 것 같네.”
“글쎄, 위지천백이 하늘을 뒤집든 말든…….”
다시 한번 독고무령을 간곡히 설득해보려던 운양이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회주, 설마 반역……?”
독고무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천백이 이왕을 좌지우지하고 있네. 뒷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후아, 정말 그 인간…… 적이지만 정말 대단한 자라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때 문득 언젠가 독고무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양, 내가 아는 위지천백은 말이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네.”
한 치도 틀리지 않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그런 위지천백과 독고무령이 비슷하게 보인단 말인가?
‘설마 우리 회주도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
운양의 방을 나선 독고무령은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 멈칫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넓은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하고 있는 무사들이 보였다.
열혈의 의기로 뭉친 무사들은 햇살이 쏟아지는 마당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통일된 갈의의 가슴에 암(暗) 자가 수놓아진 무복.
암천단과 무천단에 이어, 새롭게 만들어진 암향단(暗響團)의 무사들이었다.
암향단의 단주는 임현의 명숙 풍호검(風虎劍) 백기원. 그리고 두 명의 부단주는 태청일수(太淸一手) 유근학과 백랑마월(白狼魔鉞) 당추였다.
백기원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명의 부단주도 십여 년 전부터 절정의 고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언뜻 마당을 바라보던 독고무령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암향단의 무사들. 그들 중에 용천문의 제자인 도청진과 천수옥, 홍려려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조장인가?’
셋 중 도청진과 천수옥은 열 명씩 뭉쳐 있는 무사들의 전면에 서 있었다. 열 명의 무사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걸로 봐서 단순한 평무사가 아니라 조장쯤 되는 듯했다.
하긴 그들의 무위라면 충분히 조장이 될 만했다.
“운양이 신경 좀 썼군. 제법 규율이 잡힌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던 진사혁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진사혁의 말대로 이백의 무사는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답지 않게 질서정연했다.
제왕성을 상대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긴장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고무적인 일이었다. 명과 규율이 엄하면 그만큼 생존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전에 이를 갈더니 작정을 했나 보네.”
그가 운양의 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였다. 도청진 옆에 있던 홍려려가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독고무령을 발견한 듯했다.
그녀는 도청진과 천수옥을 향해 뭐라고 하더니 독고무령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세 사람이 날듯이 달려서 독고무령에게 다가왔다.
“와하하! 백 형, 여기에 있었구려!”
천수옥이 달려오며 반갑게 소리쳤다.
“백 소협,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만날 줄은 미처 몰랐네요.”
홍려려마저 백 소협이라 부르는 걸 보니, 운양이 자신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은 것 같았다.
독고무령은 미소를 지은 채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무작정 달려서 다가오자, 한무종이 앞을 가로막았다.
“정지! 어디서 함부로 행동하는 건가!”
한무종의 일갈에 세 사람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독고무령이 한무종을 뒤로 물렸다.
“한 형, 그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니 막지 않아도 되오.”
진사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군데?”
“저번에 북경 갔다 오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네. 내가 풍운장을 추천해 주었지.”
한무종이 옆으로 물러서자, 세 사람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독고무령이 그리 말해도 세 사람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열흘 만에 지하수련장에서 나온 그들은 한무종과 진사혁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나같이 자신의 아래가 아닌 듯 보였다. 아니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한 고수였다.
백무령이 누군데 저런 고수들이 호위하는 걸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궁금해서 못 참겠는지 독고무령의 바로 앞까지 온 천수옥이 넌지시 물었다.
“이제 보니 백 형의 지위가 상당한가 보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