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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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23화
223화
“너, 너는 뭐 하러 온 거냐?”
“깔깔깔, 뭐 하러 오긴. 오빠 보고 싶어서 왔지.”
‘이 꼭두새벽에? 제정신이냐!’
운양은 입 안에서 맴도는 소리를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대신 진사혁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사혁, 무슨 일로 온 거지?”
‘그렇잖아도 걱정이 태산인데, 왜 저 왈가닥을 데려 왔냐고!’
진사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운양이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데려 왔으니까.
“지급으로 서신이 하나 왔다고 해서, 혹시 회주에게 연락이 왔는가 싶어서 온 거네.”
어쭈? 곰이 여우가 다 됐군.
“그럼, 혼자 오지, 왜 소영이를 데려온 건가?”
“말릴 수 있으면 자네가 말려봐. 내 말은 듣지도 않으니까.”
물론 운양의 말도 듣지 않았다.
운양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질문에 대답했다.
“회주가 우현으로 갔다고 하네.”
진사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우현으로? 설마 귀원장에? 왜?”
“혈왕이 나타났는데, 그의 뒤를 쫓아갔다고 하는군.”
혈왕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직 비밀이었다. 당연히 진사혁도 알지 못했다.
“뭐야?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제왕성도 움직였다며?”
“그럼 어떻게 하나?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지금쯤 끝났을 텐데.”
“그래도 가봐야지! 회주가 혼자 놈을 잡겠다고 귀원장에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큰일 아닌가? 자칫 제왕성과 부딪칠지도 모르는데.”
일대일로 싸우는 거라면 걱정할 것도 없었다. 독고무령이 누구에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은룡산장의 모든 전력이 모여 있는 귀원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어디 그뿐인가? 제왕성도 움직인 상황이 아닌가!
‘그래도 가 본다?’
진사혁의 말에 운양이 눈빛을 반짝였다.
사람을 보내봐야 헛수고일 거라 생각했다. 실속도 없고, 태원의 전력만 감소될 뿐.
더구나 급하게 움직이다 보면 적의 이목에 잡힐 확률이 그만큼 커진다. 자칫 적과 부딪치기라도 할 경우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 일단은 회주의 명에 따르는 게 최선책이다.
여우 열 마리보다 더 머리를 잘 굴리는 회주가 불속으로 뛰어들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운양은 진사혁의 말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렸다.
‘소수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소수라면 전체적인 전력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터. 앉아서 머리만 굴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운양은 그 임무를 진사혁에게 맡겼다.
“정 가고 싶으면, 자네가 몇 사람을 대동하고 가보게. 기왕이면 전에 갔던 사람들이 낫겠군. 회주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진사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양소현과 만난 지 한나절밖에 안 지났는데, 말 한마디 때문에 또 헤어져야 하다니.
괜히 말했나? 회주를 어찌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독고무령이 저번처럼 혼자서 무리한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지, 뭐.”
제6장 나다, 네 친구
자욱한 안개가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여명을 받아 신비한 색채로 물든 안개가 마치 춤을 추듯이 흐느적거리며 산봉우리를 유혹한다.
백천산의 아침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백천산의 아름다운 아침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전날 자신이 빠져나왔던 동굴로 들어갔다.
계곡의 통나무집으로 가볼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계곡 아래쪽에 살던 양민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포기해야만 했다.
동굴로 들어간 그는 안고 있던 장소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면서 끊임없이 내력을 흘려 넣은 덕에 내상이 더는 악화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독고무령은 일단 장소천의 몸에 태천일심의 기운을 흘려 넣고 전신 혈도를 세밀하게 점검했다.
맑은 태천일심의 기운이 혈도를 따라 진입하자, 탁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저항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사이한 기운, 은룡산장의 지하에서 느꼈던 그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미 몸의 주인을 억압했던 혈왕의 의지가 잠든 상태. 사이한 기운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독고무령은 장소천의 몸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단 사이한 기운을 몰아내는 일은 뒤로 미루었다.
한 시진이 지날 즈음, 감겼던 독고무령의 눈이 뜨였다.
막힌 곳은 모두 세 곳. 막히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충격을 입은 곳이 일고여덟 곳 정도 되었다.
다행이라면 사혈이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독고무령은 장소천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듯 미동조차 없는 장소천의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마냥.
독고무령은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태천일심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몸이 바닥에서 다섯 치가량 떠오르며 무형의 기운이 그의 주위를 휘돌기 시작했다.
몸 내부의 모든 것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 무심천지연의 경지로 접어든 그는 은은한 광채가 흐르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광채가 장소천을 뒤덮은 순간, 장소천의 몸이 한 자가량 떠올랐다.
독고무령은 장소천의 내부를 관조하며 태천일심의 기운을 장소천의 기해혈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반각가량이 지나자 장소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다시 반각가령이 흐를 즈음.
번쩍!
장소천이 갑자기 눈을 떴다.
붉은 눈빛, 혈왕의 눈빛이었다.
장소천을 장악하고 있던 사이한 기운의 주체, 혈왕이 마침내 소멸의 위협을 느끼고 깨어난 것이다.
“크으, 네놈이……!”
찰나였다.
화악!
장소천의 몸에서 혈광이 폭출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능히 바위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 만한 위력이 담긴 빛이었다.
죽음을 겨우 벗어난 몸인데다가, 자신이 직접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았던가. 하거늘 어디에 이러한 기운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장소천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독고무령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장소천이 아닌 혈왕이었다.
설마 마기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나?
독고무령은 곤혹해 하면서도 태천일심의 기운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려서 혈왕의 기운을 억눌렀다.
현재 장소천의 몸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는 상태. 어린아이 주먹질조차 조심해야 할 판이다. 하물며 자신의 기운과 혈왕의 기운이 내부에서 격돌하면, 혈맥이 두부로 만들어진 끈처럼 으깨어질 것이 자명하다.
문제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소천의 몸에서 솟구친 기운은 절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혈왕의 의지가 끌어낸 최후의 불꽃! 그와 같은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장소천마저 한 줌 재로 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어림없다, 혈왕이여!”
일갈을 내지른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기운을 둘로 나누어서, 장소천의 몸을 보호하는 한편 혈왕의 기운이 폭주하는 것을 막았다.
혈왕은 모든 움직임이 가로막히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광분했다.
-크아아아! 찢어죽일 놈! 비켜라!
퍽! 퍽!
핏줄이 터져나갈 것처럼 불룩불룩 솟구쳤다.
두 눈은 물론이고, 온몸이 핏물에 빠진 것처럼 시뻘겋게 변해갔다.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세밀하게 움직여서, 폭주하는 혈왕의 기운을 최대한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장이생 부부와 유유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려야 한다.
난생처음 자신을 친구라 불러준 이가 아닌가!
‘소천, 조금만 참아라!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야 한다!’
분노와 염원이 독고무령의 몸과 정신을 하나로 일치시켰다.
뜻이 일면 기운이 일어서 혈왕의 모든 발악을 철저히 차단했다.
일각, 이 각…….
한두 시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혈왕과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던 것인지, 혈왕의 사악한 기운이 끝을 보이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독고무령은 흔들리지 않고 혈왕의 기운을 잠재우며 조금씩 소멸시켰다. 장소천의 몸에 절대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혈왕의 기운이 변화를 보인 것은 세 시진이 흐를 즈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장소천의 몸이 먼저 변화를 보였다.
툭툭 튀어나와 있던 핏줄이 서서히 가라앉고, 시뻘겋던 살색도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세 시진 동안 쉬지 않고 태천일심의 기운을 극한으로 운용했다. 그가 비록 무심천지연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소천의 변화를 보는 순간, 온 세상의 기운을 다 취한 것처럼 힘이 났다.
‘내가 이겼다, 혈왕!’
-끄아아아아!
나락으로 떨어지는 혈왕의 비명이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독고무령은 혈왕의 저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자,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뒤집었다.
순간 허공에 뜬 장소천의 몸이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쏟아졌다.
주르륵!
썩은 생선마냥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핏물은 한참 쏟아진 후에야 멈췄다.
독고무령은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손을 저어서 장소천을 원상태로 눕혔다. 그러고는 격공타혈의 수법으로 장소천의 전신을 두들겼다.
곧 장소천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격공타혈을 펼치던 독고무령은,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던 장소천의 맥이 서서히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안도했다.
자신과 혈왕의 싸움을 세 시진 이상 견뎌내느라, 장소천의 몸은 손만 대도 맥이 끊어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만일 혈왕과의 줄다리기가 일이 각만 더 길어졌어도 장소천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반으로 줄었을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세 차례에 걸친 대주천을 마치고 태천일심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혈왕과의 소리 없는 격전은 그에게 손해만 끼친 것이 아니었다.
처음 겪는 생소한 접전이었다.
찰나간의 틈도 허용치 않는 세밀한 기의 운용. 사멸(死滅)만을 위한 것이 아닌, 활(活)을 바라는 마음으로 태천일심의 무공을 펼쳤다.
그것이 그의 깨달음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더욱 완벽해진 무심천지연의 경지. 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진 태천일심의 운용.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잘하면 오래지 않아서 태천무극에 입문할 수 있을 것 같군.’
승천무조 단목상조차 완성하지 못한 궁극의 경지다. 바람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처럼 생각되었던 전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독고무령은 미소를 지으며 장소천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장소천이 눈을 떴다.
“으음……. 여, 여긴…….”
붉은 핏빛 눈이 아닌, 본래 장소천의 눈이다.
그 눈빛을 본 독고무령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정신이 드나, 소천?”
장소천은 힘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누구……?”
독고무령은 인피면구를 벗었다.
장소천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독고무령이 인피면구를 완전히 벗자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기억 저편 어딘가에 남겨진 얼굴이다.
그때 독고무령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날세, 소천. 자네 친구, 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