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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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8화
218화
다음 날.
주양은 밖에서 벌어진 소란을 들으며 눈을 떴다.
곧 시비가 달려와 소란스런 이유를 말해주었다.
태자비의 거처에서 흥건한 핏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묘하게 십삼(十三)이라는 숫자 형태로.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핏물만 있을 뿐 시신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주양은 그 숫자의 뜻을 이해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열셋, 모두 처리했다는 말.’
마침내 가장 우려했던 한 가지 일이 해결되었다.
이제 때만 기다리면 될 뿐.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까지 삼 년을 기다려왔는데, 그 얼마를 못 기다리랴.’
이 땅의 주인인 황제가 병상에 누운 지 삼 년이 지났다. 그간 황제를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말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노태군이 내세운 태감 정 공공과 둘째, 셋째 숙부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영향이 컸다.
그들 사이에 끼어 제대로 된 황권을 세우지 못한 지난 삼 년, 언제고 황제의 위엄을 더럽힌 자들을 쓸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매일처럼 다졌다.
이제 그날이 가까워오는 것 같다.
‘누구도 용서치 않겠다. 설사 같은 핏줄이라 해도!’
그때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밀려들었다.
주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황금빛 햇빛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동방명을 만나봐야겠어.’
제4장 귀원장과 혈왕. 그리고 친구
석가장에서 낭자관을 넘어 양천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족히 천 년은 자랐을 법한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산신인 양 우뚝 서 있었다.
둘레는 장정 다섯이 둘러야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늘은 족히 수십 평을 뒤덮었다.
더구나 고목 아래에는 평상처럼 평평한 바위가 몇 개 솟아 있어서, 그곳에 누워 있으면 시원한 바람에 절로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즘, 고목의 그늘은 그야말로 지나는 길손들에게 훌륭한 휴식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도 다섯 사람이 무더위를 피해 그늘을 찾았다.
두 사람은 상인이었고, 두 사람은 태행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약초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척 봐도 먹고살 길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떠돌이였다.
떠돌이는 낭자관 쪽을 바라보며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었는데, 풀잎을 질겅거리는 표정이 만사가 귀찮은 듯했다.
나이는 서른 전후? 콧대가 살짝 주저앉은 데다 얼굴에 자잘한 흉터가 남은 걸 보니 쌈박질깨나 하면서 살아온 자 같았다.
“퉤!
질겅거리던 풀잎을 뱉어낸 떠돌이가 하늘을 쳐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쓰벌, 더럽게 덥군.”
비가 내려 좀 시원해질까 했더니 개미 눈물만큼 내리고 다시 뙤약볕이 내리쬔다.
그늘에 앉아 있는데도, 온몸이 끓는 물속에 빠진 것처럼 후끈 달아오르고 끈적거리는 게 영 찝찝했다.
마음 같아서는 계곡으로 내려가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주어진 임무가 있으니, 시간이 되기 전에는 고목 아래에서 벗어나면 안 되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빨리 갔다 오면 안 될까?’
유혹이 그를 그늘에서 밀어내기 위해 속삭였다.
슬쩍 몸을 일으킨 그는 안간힘을 다해 유혹을 떨치려 했다.
‘아니지. 그러다 중요한 걸 놓치기라도 하면 방주에게 맞아 죽을 걸?’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에서는 달콤한 유혹이 그를 잡아끌었다.
-일각이면 될 텐데 뭘 망설여? 빨리 갔다 와!
구적삼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낭자관 쪽에서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두 사람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구적삼은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태행산이 무너져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지며 가슴이 묵직해졌다.
‘어우, 제길. 요즘 기력이 허해졌나? 왜 이리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거야?’
그는 몸을 후드득 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온 두 사람은 곧장 나무그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오십 대 초로인이었고, 한 사람은 이십 대 청년이었다.
구적삼은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알려고 노력할 생각도 없었다. 쓸데없는 행동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차후의 문제. 중요한 것은, 수상한 자들이 낭자관을 넘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고, 곁눈질만으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가 받은 명령은 다름이 아니었다.
수상한 자가 낭자관을 넘어오면 즉시 알릴 것!
두 사람은 충분히 그 조건에 부합되는 자들이었다.
그가 실눈을 뜬 채 곁눈질로 주시하는 사이 거리가 십 장으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한 걸음에 일 장 이상을 걷는 듯했다.
워낙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여서, 구적삼은 두 사람이 코앞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그들의 걸음이 자신의 짐작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고수! 그것도 절정 이상의 고수다!’
구적삼은 그들이 그늘 아래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선을 돌리고 일절 관심이 없는 척했다. 그 대신 그늘 아래 있는 다른 네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시선만 따라가도 두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두 사람은 그늘 아래로 오지 않고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후,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쑥쑥 나아가던 두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청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구적삼은 재빨리 시선을 내리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스며있는 청년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심혼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 것이다.
미지의 저 끝에서 밀려드는 극한의 공포!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구적삼은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었다.
그때 초로인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청년은 느릿하니 고개를 돌리고는 초로인을 바라보았다.
“가자.”
초로인은 한마디만 내뱉고 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자신을 따라올 거라 확신하는 듯.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마치 혼을 제압당한 사람처럼.
털썩.
구적삼은 두 사람이 안 보일 즈음에서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쯤 풀어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마치 한밤중에 귀신과 정면으로 마주친 사람 같았다.
“어? 이, 이보게, 괜찮나?”
옆에 있던 상인 하나가 구적삼을 부르며 다가오더니 어깨를 흔들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구적삼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는, 한동안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훅, 훅, 헉, 헉…….”
그의 정신상태가 평소대로 돌아온 것은 반각가량이 지나서였다.
정신을 차린 그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다, 분명 그야! 혈왕! 마침내 혈왕이 나타났어!’
* * *
핏덩이처럼 달아오른 석양이 서산으로 떨어질 무렵.
양천성 동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큰 키, 옆구리에 걸린 한 자루 검. 혈왕의 뒤를 쫓아 낭자관을 넘은 독고무령이었다.
성문을 통과한 그는 좌우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하북과 산서로 통하는 길에 정보원을 깔아놓으라고 했다. 양천과 평정에 밀호방의 사람들이 상당수 파견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자신이 보정에 들렀다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어딘가에서 밀호방의 정보원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여우 모양을 만든 그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끔 손을 들어 올렸다.
지나가던 몇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검을 차고 있는데다가, 은연중 알 수 없는 위압감마저 느껴지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표식을 찾아낸 후 정보원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혈왕이 산서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큰 상황. 한시가 급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장한 하나가 다가오더니, 탁한 눈빛으로 독고무령의 위아래를 슬쩍 훑어보고는 물었다.
“이 고장 분은 아닌 거 같은데, 어디서 오신 분이쇼?”
“보정에서 왔소.”
술기운에 반쯤 썩은 것처럼 보이던 장한의 눈빛이 찰나 간 반짝였다.
“허, 멀리서 오셨구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여우를 만나러.”
독고무령의 짧은 대답에 장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별 실없는 사람 다 봤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큭, 웃기는 사람이군. 여우를 만나려면 산으로 가야지, 왜 여기로 온 거요?”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묻겠소. 밀호방의 사람이오?”
장한, 구적삼도 더 이상은 말을 돌리지 못하고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구적삼은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숨이 턱 막혔다.
암천사신 독고무령. 그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젠장, 오늘 간이 두 번이나 떨어지네.’
그는 재빨리 떨어진 간을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구적삼이 회주를 뵙습니다.”
“혹시 나에게 전할 말이 없소?”
구적삼은 두 시진 전에 보았던 혈왕과 그 일행이 떠오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잠시, 입술을 깨물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다급히 말했다.
“있습니다, 회주. 혈왕이 낭자관을 넘어왔습니다.”
역시!
독고무령의 심해처럼 깊은 눈에서 찰나지간 파문이 일었다.
“그의 현재 위치는?”
“우현 쪽으로 올라간 것까지는 확인이 되었는데, 그 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우현이라고? 그럼 노태군을 찾아가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혈왕은 노태군이 애지중지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왠지 몰라도 뭔가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
노태군에게 돌아갈 거라면 왜 모습을 감추었던 것일까?
부상을 입어서?
그것은 아닌 듯했다. 은룡산장 지하석실의 흔적으로 봐서 그리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말도 없이 행방을 감춘 걸까?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이유가 있어!’
그때 구적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혈왕에게는 일행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이상한 점? 말해 보시오. 그게 무엇이든.”
용기를 낸 구적삼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혈왕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머릿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일행인 자가 휘파람을 불자 반항하지 않고 몸을 돌리긴 했습니다만…….”
“잠깐.”
독고무령이 그의 말을 끊고,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휘파람을 불자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고 했소?”
“예? 예, 회주. 마치 꼭두각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표정 변화도 없고, 말 한마디 않고 따라가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사람 같지는 않았습지요.”
백천산에서 만난 혈왕은 오만하고 광기에 차 있었다. 하늘조차 무시하는 광오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 그게 혈왕인 것이다.
그런 혈왕을 누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에게 명을 내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혈왕으로 만든 사람이 노태군 아니던가.
그러나 현재의 일행은 결코 노태군이 아니다.
뭔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 듯하다.
‘혈왕, 소천이의 정신을 누군가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문제가 커진다.’
혈왕의 정신을 제압한 자가 혈왕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혈왕으로 인한 피의 장마가 산서 강호에 또 한 번 내리게 될 터였다.
바로 그때, 어떤 가설 하나가 번쩍하며 뇌리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