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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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4화
214화
진사혁이 모용설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모용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째려보니까 조금 이상한 곰처럼 보이는데요?”
“하여간 여자들이란…….”
진사혁은 홱 고개를 돌렸다.
구양소현도 그렇고 모용설도 그렇고, 이상하게 여자들과의 말싸움은 이길 재간이 없었다.
“회주, 안 가?”
밖으로 나온 독고무령 일행은 곧바로 천룡방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들이 정문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거기 서라!”
일행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저만치 북리사웅이 몇 사람을 대동하고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해쓱한 얼굴. 왼손의 팔꿈치 아래로 흔들거리는 소맷자락.
척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어쩌면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클 것이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사이, 북리사웅이 일행 앞에 도착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보지 않고 모용설만 바라보았다.
“역시 그대였군. 오랜만이다.”
모용설은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더 지체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다른 사람은 다 가도 좋아. 하지만 당신은 안 돼.”
그렇잖아도 싸늘하던 모용설의 목소리가 더욱 냉랭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대를 차대 천룡방을 이끌 사람의 부인으로 맞이하겠다. 그러니 이곳에 남도록 해라.”
모용설은 말을 잊은 듯 멍하니 북리사웅을 바라보았다.
북리사웅은 그녀가 감격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의 부인이 되면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 특별히 생각해서…….”
모용설은 그의 말을 끊으며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만 다친 게 아니라 머리까지 다쳤나 보군요.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큭큭.”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진사혁이 이를 악물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분노와 웃음을 참기 위해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오직 독고무령만이 무심한 눈으로 북리사웅을 바라볼 뿐.
‘눈빛이 전과 달라. 혈왕에게 당한 후로 정신적인 충격이 컸나 보군.’
그가 보는 동안에도 북리사웅은 얼굴이 벌게져서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확실히 전과는 달리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하지만 모용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그만 가요.”
홱 고개를 돌린 북리사웅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어딜 가! 너는 못 간다! 잡아!”
그와 함께 온 다섯 명의 무사가 모용설을 잡기 위해 접근했다.
석도명과 종리청, 감가기, 염부중이 그녀를 에워싸며 무사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천룡방 무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북리사웅의 명을 기다렸다.
“비켜라!”
북리사웅이 석도명 등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진사혁이 턱을 쳐들고 말했다.
“싫다잖소?”
“곰 같은 놈. 너는 빠져라!”
“집이라서 용기가 생긴 건가? 백천산이었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텐데 말이야.”
“뭐야! 네놈이 어디서……!”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사실이잖아?”
소란이 커지자 천룡방의 무사 수십 명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방주?”
“네놈들은 누군데 소방주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자신감이 생긴 북리사웅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이들을 포위해! 감히 천룡방의 후계자인 나를 모욕한 자들이다!”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독고무령 일행을 포위했다.
그 와중에도 천룡방의 무사들이 계속 몰려들어, 독고무령 일행은 순식간에 백여 명의 무사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북리사웅은 어깨를 펴고 냉소를 지었다.
“훗, 좋게 말할 때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여기가 네놈들 놀이터인 태원인 줄 아느냐?”
그때 관조운이 나섰다.
“정말 끝장을 보자는 것이오?”
“흥! 아직도 기회는 있다! 모용설만 놓고 가라. 그럼 보내주지.”
“그만합시다. 이러면 당신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크크크, 좋을 게 없다고? 왜? 우리 천룡방이 암천회 따위를 두려워할 줄 아느냐?”
“방주님과 우리가 협상을 했다는 걸 알기나 하시오? 당신이 방주님과 우리의 협상을 깨뜨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유난히 큰 목소리. 독고무령 일행이 암천회의 사람들이고, 방주와 협상을 했다는 말에 천룡방의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당황한 북리사웅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아버님이야 네놈들 감언이설에 넘어갔을지 몰라도 나는 넘어가지 않는다! 뭐 하느냐? 놈들을 잡아라!”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 십여 명이 독고무령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막강한 기운이 독고무령 일행에게서 흘러나왔다.
무형의 시위.
하나같이 절정에 달한 고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일반 무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독고무령이 암암리에 그 기운을 주도하는 터. 설령 절정의 고수라 해도 견디기가 힘든 위력이었다.
누가 떠밀기라도 한 듯 천룡방의 무사들은 방원 십여 장 밖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바로 그때였다.
쿵!
진사혁이 발을 구르자 땅이 쪼개질 것처럼 울렸다.
뒤이어 진사혁의 커다란 목소리가 천룡방을 뒤흔들었다.
“뭐야! 친구로 지내자며 협상한 지 겨우 일각 만에 칼을 들이대는 게 천룡방인가!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 앞을 막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 비켜라!”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둘러싸고 있던 천룡방의 무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진사혁은 곤을 쥔 채 성난 곰처럼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그의 일보 일보마다 땅이 울리고, 무형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갔다.
독고무령 일행이 그의 뒤를 따라 정문 쪽으로 향하자, 북리사웅이 악을 쓰며 수하들을 닦달했다.
“놈들을 막으라니까!”
하지만 한번 기세에서 밀린 천룡방의 무사들은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분노가 솟구친 북리사웅은 옆에 있는 수하의 허리에서 검을 잡아 뽑았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모용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다른 놈은 가도, 너는 절대 못 간다!”
모용설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사공화정이 북리사웅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뻗었다.
쩌저정!
검과 검이 얽혀들며 대여섯 번의 격돌이 찰나 간에 이루어졌다.
이전의 북리사웅이 아니다. 한 팔을 잃고 내외상이 낫지 않은 그가, 초절정의 단계에 접어드는 사공화정의 검을 막는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삼 초가 지나가기도 전에 북리사웅의 검세가 흐트러졌다.
“크으읍.”
안색이 하얗게 변한 북리사웅은 신음을 흘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대공자!”
“소방주!”
북리사웅을 호위하고 나왔던 중년무사들이 다급히 달려 나왔다.
“네, 네놈이……! 뭐하느냐? 모두 놈들을 쳐라!”
북리사웅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수하들을 다그쳤다.
소방주가 부상을 입자, 중년무사들은 물론이고, 주춤거리던 천룡방의 무사들도 더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무기를 뽑아든 그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독고무령 일행을 압박했다.
숫자만도 어느덧 백오십에 이른다. 적당히 공격하고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상황.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를 볼 수밖에.
독고무령은 북리사웅을 바라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북리사웅, 앞으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은 그대가 져야 할 것이다.”
“흥! 걱정마라! 암천회의 반발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으니까! 시작해!”
북리사웅이 재차 명을 내리자, 포위하고 있던 무사 중 이십여 명이 독고무령 일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독고무령 일행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 몇 수의 공방 만에, 달려들었던 무사 대부분이 억눌린 신음과 비명을 터트리며 낫에 베어진 짚단처럼 쓰러졌다.
바로 그때, 안쪽에서 다급한 외침과 함께 세 사람이 달려왔다.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를 지른 사람은 상관연이었다.
포위망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소방주?”
이성을 반쯤 상실한 북리사웅은 자신을 추궁하는 상관연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들을 잡을 생각입니다. 장로께서도 힘을 보태주셔야겠습니다!”
“소방주, 왜 저들을 잡는단 말인가?”
“다른 놈은 죽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저기 있는 저 계집만 사로잡으면 됩니다!”
“저 여자만?”
“그렇습니다. 제가 첩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제야 어렴풋이 상황을 눈치 챈 상관연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굳이 물어볼 것도 없다. 여인의 얼굴에 경멸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여인은 생각지도 않는데, 북리사웅 혼자만 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소방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왜 말이 안 된단 말입니까? 전부터 제가 좋아하던 여인입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저 여인은 소방주를 좋아하지 않네. 그래도 첩으로 삼겠단 말인가?”
“흥! 그건 나중 문제지요. 일단 곁에 두고 영화를 안겨주면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상관연은 어이가 없었다. 본래 북리사웅이 욕심 많고 고집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긴 북리사웅 곁에 있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최근 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빌어먹을, 방주께서도 후계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셔야할 것 같군.’
그는 답답한 마음을 가슴에 눌러 놓고 북리사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주께서 지금의 일을 아시면 화를 내실 거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게.”
“저는 저 여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마 아버님도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니 장로께서 좀 도와주십시오!”
“그리 할 수는 없네.”
동시에 상관연이 손을 번개처럼 뻗어서 북리사웅의 마혈과 수혈을 제압했다.
“장…… 헉!”
상관연은 몸이 굳어버린 북리사웅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쉬도록 하게나. 종상, 소방주를 방으로 모시도록 해라.”
북리사웅을 호위하던 무사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예, 장로.”
그가 북리사웅을 안아들고 돌아서자, 상관연과 함께 달려온 자들 중 한 사람이 천룡방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각자 맡은 일을 하도록 하라! 부상자는 약당으로 데려가도록 하고!”
십여 명이 나와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를 부축했다. 그들은 현장을 떠나면서도 힐끔힐끔 독고무령 일행 쪽을 쳐다보았다.
이십여 명이 손도 제대로 못써보고 당했다.
만일 상대가 살심을 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들 대부분은 죽었겠지?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암천회!
그 이름이 돌아선 천룡방 무사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상관연은 한숨을 내쉬면서 독고무령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후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미처 몰랐네.”
관조운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별 뜻 없는 단순한 웃음인지, 조소인지 모를 묘한 웃음이었다.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 말이, ‘하마터면 천룡방을 피로 물들일 뻔하지 않았습니까?’ 상관연의 귀에는 꼭 그런 뜻으로만 들렸다.
속이 끓었지만 잘못은 북리사웅이 했으니 뭐라고 하랴.
더구나 이십여 명을 때려눕히긴 했어도 죽인 사람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소방주가 팔을 잃은 후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할 때가 있네. 그리 이해하고, 바쁠 테니 그만 가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어쨌든 소방주가 빨리 낫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번처럼 예상치도 못한 일로 약속이 깨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 이만.”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왜 그 말에 이리도 속이 끓는단 말인가?
상관연은 당장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관조운이 그 말만 하고 돌아서자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끄응, 건방진 놈. 언제고 네놈의 주둥이를 터트려줄 때가 있을 거다.’
정문을 나선 진사혁이 관조운을 쓱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관 형도 사람 심기 건드리는 말을 제법 잘 하는구려. 강직한 성격이어서 그런 말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오.”
“이게 다 회주에게 배운 것 아니겠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두 번 봤나? 독고무령의 심기가 무공만큼이나 뛰어나다는 것을 그들이 왜 모를까?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 중 하나. 그게 바로 암천사신 독고무령이거늘.
하지만 그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독고무령도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걸.
마치 그걸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독고무령이 걸어가며 모용설에게 말했다.
“북리사웅이 그대를 그렇게 좋아했을 줄은 몰랐군. 그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모용설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맞아요, 그는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만 했다구요.’
그때 독고무령이 행복한 그녀의 마음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한때 남자처럼 하고 다니면서 일 년 내내 씻고 다니지 않은 걸 알았으면 그렇게 좋아했을까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