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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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0화
210화
* * *
밤이 깊어 자정이 되어갈 무렵.
풍양객잔이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 골목에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였다. 황보도경을 비롯한 황보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인원이 열 명 정도 늘었다는 것이었다. 황보세가에서 고수들이 도착한 것이다.
“도경, 정말 네가 졌단 말이냐?”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못미더운 표정으로 황보도경을 보며 물었다.
황보도경은 사실을 외면할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에 속은 좀 쓰렸지만.
“형님, 수하를 보내서 말했지 않습니까? 제가 밀렸다고요.”
“정체는 알아냈느냐?”
“놈들이 추월루에서 나온 다음에 직접 가서 물어봤습니다.”
“추월루에서 알고 있더냐?”
황보도경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모른다더군요.”
모른다고? 그래서 그냥 나왔단 말인가?
중년인, 황보도일은 속이 끓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그럼,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이냐?”
“왜 없습니까? 숫자는 열하나. 그중 하나는 계집인 것 같고, 나머지는 남자. 삼십 대의 장한은 두엇. 나머지는 이십 대 청년들. 놈들 중 덩치가 곰처럼 큰 놈의 이름은 사혁. 뭐 그 정도면 많이 아는 것 아닙니까?”
황보도일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엉뚱한 소리를 들으면, 수상한 자들을 잡기 전에 황보도경을 먼저 두들겨 팰 것 같았다.
‘끄응, 저놈하고 말하느니 직접 알아보는 게 낫지.’
“숙부님, 지금 들어가 보실 겁니까?”
황보도일의 말에,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오십 후반의 초로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차피 도망갈 놈들도 아닌 것 같은데, 한밤중에 공연히 소란 떨 일이 뭐 있겠느냐? 일단 도경이의 수하에게 철저히 지키라고 하고,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만나보도록 하자.”
“예, 숙부. 내일 아침이면 몇 사람이 더 합류할 테니 그게 낫겠습니다. 숙부님께서 저런 별 볼일 없는 아이들을 직접 상대하실 필요는 없는 일 아닙니까?”
황보도경이 작은 눈을 깜박이며 황보도일을 째려보았다.
그는 황보도일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우매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아이들? 흥! 그러다 큰코다치고 후회하지.’
* * *
날이 밝자마자 개봉을 나선 독고무령 일행은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황하가 가까워오자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갈대숲이 장관을 이루며 길옆에 펼쳐졌다.
쏴아아아…….
갈대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부비며 흔들렸다. 당장 드러누울 것처럼 쓰러지다 말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은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독고무령 일행은 갈대숲의 파도에 밀리듯이 빠르게 걸으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저만치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가 보였다. 선착장까지는 백여 장 정도.
어느 순간, 선착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독고무령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황보세가의 사람들인가?’
익숙한 기운이 갈대숲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제 오전에 마주쳤던 황보세가 무사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이었다.
그는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왜 숨어 있는지를 짐작하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진사혁이 갈대숲을 보며 소리쳤다.
“갈대숲에 쥐새끼들이 많이 숨어 있군! 밟아버리기 전에 나오시지!”
순간, 갈대숲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삼십여 명. 황보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독고무령 일행이 걸음을 멈추자, 황보도경이 뒷짐을 진 채 몇 걸음 걸어 나왔다.
“잘들 지냈나?”
독고무령은 황보세가의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황보도경을 제외하고도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제법 되었다. 특히 초로인과 사십 대 중후반의 중년인은 황보도경보다 더 강하게 보였다.
‘괜한 소란으로 오대세가 중 하나를 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거늘.’
제왕성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 삼성맹의 핵심세력 중 하나인 황보세가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찰을 피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작정한 그는 황보도경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도 황보세가의 땅이오?”
“아, 그건 아니네. 우린 다만 빚을 갚으러 왔을 뿐이지. 내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당하고는 못 참거든.”
“별로 좋은 성격은 아니군. 당신들도 같은 생각이오?”
독고무령은 담담히 말하며 황보도일과 황보충을 바라보았다.
지켜보던 황보도일이 입을 열었다.
“말투를 보니 하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대들의 정체를 밝혀라. 그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소.”
“권하는 술을 마다하고 벌주를 들겠다는 건가?”
“글쎄. 누가 벌주를 마실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황보도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예사로운 자들이 아니다. 나이는 젊지만 하나하나가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공연히 일만 커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누군지는 모르지만, 본가와 적이 되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적으로 몰아가는 건 당신들 같소만?”
“정체만 밝히면 되는 일.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사람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 아니겠소?”
“결국 힘으로 알아내라, 그 말이군.”
“아마 그러기가 쉽지 않을 거요.”
“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다, 그 말이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 황보도일의 뒤에 있던 무사 서너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기다렸다는 듯 진사혁이 씩 웃으며 걸어 나왔다.
“어디 황보세가의 실력이 어떤지 한번 볼까?”
독고무령이 진사혁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무 심하게는 다루지 말게. 사람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질지 모르니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살수는 자제해.”
진사혁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일행 모두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이들은 이미 자신이 추월루에 들른 것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일이 커지면 추월루를 닦달할 터. 유하령이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백하를 위해서라도.
물론 일행이 몰리면 어느 정도의 피를 보는 것은 필연이지만.
진사혁 역시 황보세가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남모를 사정이 있었다.
“걱정 말게. 나도 그럴 생각이니까.”
황보도일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눈을 치켜떴다.
“보자보자 하니까, 참으로 건방진 놈들이로구나!”
진사혁은 씩 웃으며 곤을 빼들었다.
찰나, 그의 전신에서 숨 막힐 정도의 무거운 기운이 흘러나오며 황보도일을 압박해갔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기운에 황보도일의 안색이 급변했다.
“모두 조심해라! 보통 놈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진사혁의 곤이 황보세가의 무사들을 향해 휘둘러진 후였다.
부우우웅!
“헉!”
앞으로 나왔던 자들 중 두 사람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직후 진사혁이 휘두른 곤의 잔영이 그들이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쾅!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의 땅이 폭발이라도 한 듯 두 자 깊이로 움푹 파였다.
“자신 있으면 피하지 말고 붙어봅시다. 자신 없으면 비켜서고.”
“오냐, 이놈! 어디 한번 받아봐라!”
노성을 내지른 황보도일이 스윽 앞으로 나서며 쌍권을 뻗었다.
진사혁은 상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다. 권에 관한 한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황보세가다. 그들에겐 주먹이 곧 무기였다.
떠덩!
두 사람의 기운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황보도일은 주르륵 네 걸음을 물러나서 부릅뜬 눈으로 진사혁을 쳐다보았다.
진사혁은 두 걸음 물러선 후 곤을 다시 쳐들었다.
“과연 황보세가군. 맨주먹으로 내 곤을 막아내다니.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요.”
그 사이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독고무령 일행을 에워쌌다.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이 갈대숲 사이로 흘렀다.
하지만 일행 중 긴장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무기를 빼들었다.
비록 숫자는 아홉에 불과했지만, 하나같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다. 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세는 주위를 압도했다.
특히 전면에서 움직이는 관조운과 전유곤, 사공화정 주위로는 바람조차 비켜 흘렀다.
뒤에 처진 채 상황을 살피던 황보충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놈들이 누군데, 젊은 나이에 저토록 강한 무공을 지녔단 말인가?’
그때 진사혁과 황보도일이 두 번째 충돌을 일으켰다.
콰과광!
“으으음…….”
끝내 황보도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경악한 그는 이를 악문 채 진사혁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 미안하지만 말해 줄 수 없으니까 이해하쇼.”
진사혁은 그렇게만 말하고 곤을 들어 황보도일을 가리켰다.
후우우웅!
대기가 진저리치며 은은한 묵기가 곤을 따라 느릿하게 휘돌았다.
그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전신에서 절로 뿜어져 나왔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절정고수들조차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황보도일은 다급히 전 공력을 끌어올려 진사혁의 기운에 대항했다.
온몸이 짓눌린 기분.
두 발이 땅속으로 틀어박힌 것만 같았다.
‘제기랄!’
시간이 가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다 스스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때였다. 진사혁의 곤에 맺힌 묵기가 황보도일을 향해 밀려갔다.
황보도일도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엇갈려 내치며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콰르릉!
벽력음이 일며, 진사혁의 곤에서 관천뇌곤 전구식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일원첩수(一圓疊輸)와 칠성귀혼(七晟鬼魂)에 이어, 낙일망휴(落日網休)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둥근 원이 첩첩이 겹치는가 싶더니 일곱 개의 곤영이 허공을 뚫고, 뒤이어 그물처럼 펼쳐진 시커먼 곤영이 허공을 뒤덮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황보도일은 황보세가의 삼대권법 중 하나인 벽산신권을 펼쳐내며 대항했다.
“차앗!”
곤영과 권영이 뒤엉키며 바위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팽팽하게 진행될 것 같던 격돌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은 채 오 초가 되기도 전이었다.
시커먼 회오리가 점점 거세지면서 황보도일의 몸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황보도경이 다급히 소리쳤다.
“놈들을 쳐라!”
명이 떨어지자마자 포위하고 있던 벽운당 무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담했다.
황보도경도 앞쪽에 있는 관조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끈한 놈, 네놈은 내가 맡아주마!”
비록 독고무령에게 형편없이 지고 진사혁에게도 밀렸지만,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에게는 밀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그는 관조운을 두들겨 패서 자신이 당한 것을 분풀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칠팔 초가 지나기도 전에 황하에 떠내려 보냈다.
오히려 십 초가 지날 즈음에는 관조운의 검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바닥을 구르는 수모마저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빌어먹을 일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이크!”
다른 곳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운당이 아무리 황보세가의 정예라 해도, 독고무령 일행은 모두가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개중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종리청과 모용설도 벽운당의 무사 둘을 어렵지 않게 상대했다. 다만 살수를 자제하다보니 제압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
황보충은 어이가 없었다.
조카들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인 황보도일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황보세가 최강의 무력인 벽운당 무사들이 힘도 제대로 못써본 채 하나하나 꺼꾸러진다.
그나마도 손속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황보충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문파에서 저렇게 젊은 고수들을 배출했단 말인가?
그는 폭풍이 불어대는 격전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고요히 서 있는 독고무령에게서 멈췄다.
‘저 젊은 놈이 수장인 것 같은데, 저놈만 잡으면…….’
내심 그렇게 마음을 정한 황보충은 독고무령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일보에 일 장씩, 세 걸음 만에 미끄러지듯 다가간 그는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