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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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09화
209화
제1장 그녀가 바로……
쿵!
독고무령은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로 맞은 것처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
벼락이 코앞에 떨어져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조차 조병탁의 말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루주가 유하령…… 유 소저?”
조병탁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독고무령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다그쳤다.
“뭐하는 거요! 빨리 풀어주지 않고!”
독고무령은 홱 고개를 돌려 추월, 유하령을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혈도가 제압된 바람에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게 가슴에 쌓였는지 하얗던 낯빛이 벌겋게 변한 상태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여차하면 무공을 폐하려 했는데…….’
웩!
유하령은 혈도가 풀리자마자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독고무령은 다급히 그녀의 몸에 태천일심의 기운을 흘려 넣고 뒤엉킨 기운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뒤엉킨 기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유하령의 얼굴이 본 낯빛을 되찾았다.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거두어들이고,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유하령은 일단 속에 쌓였던 울음을 먼저 터트렸다.
그리고 반각가량이 지난 다음에야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멈췄다.
독고무령은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사과했다.
“미처 몰랐소. 미안하오.”
유하령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이었든, 어떤 이유였든, 독고무령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가슴속에다 은밀히 키워온 꽃은 어쩌란 말인가.
이제 겨우 꽃봉오리를 맺어 활짝 피울 날만 기다렸거늘.
그녀는 바위처럼 뭉쳐 묵직해진 가슴을 억지로 짓누르고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당신을 의심해서 말하지 않은 제 잘못도 커요.”
“어르신의 일은…… 굳이 여러 말로 변명하지 않겠소.”
유하령은 다시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구겨 넣고 고개를 저었다.
“다 들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분명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더 참담한 고통을 당하시다 놈들 손에 돌아가셨을 거예요.”
역시 총명한 여인이다. 슬픔으로 인해 평정심이 심하게 흔들렸을 텐데도 판단에 흐트러짐이 없다.
“그리 알아주니 고맙소.”
“한 가지……. 그 비옥이라는 감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들었는데, 그 일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요?”
이미 이런저런 말을 다 한 상태.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말한 대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그 안에서 자랐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탈출해서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나에겐 그곳이 전부였소. 어르신을 만난 후…….”
유하령과 조병탁은 홀린 사람처럼 독고무령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문이나 자신의 신세에 대한 것은 빼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말을 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독고무령은 뼈대만 추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 유백하의 말을 전해주었다.
“……어르신께선 당신을 찾으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소. 어릴 때 아비와 함께 놀던 곳의 벽을 무너뜨리면, 아비가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오.”
끝내 유하령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버지와 함께 놀던 곳의 벽이라구요?”
“그렇소.”
그녀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아버지와 금이 간 후 항상 찾아가서 혼자 울었던 곳이니까.
독고무령은 유백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에 짐을 하나 덜어낸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이제 떠날 것이오. 혹시라도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겠소.”
유하령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암천사신 독고무령이죠?”
독고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왕성과 싸우고 있겠군요.”
“맞소. 정확히는 위지천백과 싸우고 있소. 그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숨을 쉴 수가 없는 자. 나는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오.”
“그럼, 그 일은 따로 부탁할 것도 없군요. 대신 다른 부탁을 하나 할게요.”
“말해 보시오.”
“나도 그 일에 참가하겠어요.”
뜻밖의 말에 독고무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을?”
“추월루도 그리 약하지 않아요.”
“제왕성과 위지천백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는 강하오. 너무 위험한 일이오.”
“추월루만 믿고 이러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지닌 가장 큰 힘이 뭔지 아나요?”
독고무령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유하령이 본래의 도도함을 되찾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어요. 당신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능히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제가 부탁하면 절대 거절하지 못해요. 아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게 될 거예요.”
* * *
모용설은 전각 안에서 나오는 독고무령과 추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독고무령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추월은 들어갈 때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 안타까움, 뭔가를 잃어버린 듯 아쉬움이 가득했다. 딱히 하나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표정.
‘회주야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저런 표정이지?’
여자이기에 느낄 수 있을 만큼 미미한 변화. 그 의미를 모르는 그녀로선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 안에서 둘이……?’
그러다 보니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 진사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어째 두 사람 다 표정이 별론데?”
“지금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나중에 이야기해 주지.”
진사혁은 단순한 성격답게 곧바로 의문을 털어버렸다.
“그렇다면야…….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여기에서 잘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모용설이 급히 끼어들었다. 행여나 독고무령이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는 듯.
“당연하죠. 나는 기루에서 자고 싶지 않아요. 나가서 객잔으로 가요.”
독고무령도 추월루에서 잘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렇게 하지.”
짧게 대답한 그는 유하령을 바라보았다.
“유 소저, 그만 가보겠소. 나중에 봅시다.”
유하령은 차마 잡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먼저 가세요.”
나중에 보자고? 먼저 가라고?
그 말인즉, 그녀가 곧 뒤따라간다는 말이 아닌가.
모용설은 힐끔 유하령을 쳐다보았다.
‘장유유에다가 추월까지? 설마 더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한편, 자신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복수에만 전념하기로 한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 * *
“놈들이 추월루에서 나왔습니다, 당주.”
“그래?”
황보도경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작은 눈을 반짝였다.
정주의 선착장에서부터 놈들을 쫓았다.
굳이 바짝 쫓을 필요도 없었다. 정주에서 개봉에 이르는 지역은 황보세가의 눈이 쫘악 깔려 있으니까.
“본가의 사람들은 아직 안 왔나?”
“곧 도착할 것입니다.”
“좋았어!”
그는 독고무령 일행을 쫓는 한편으로 본가에 연락을 취했다. 황하를 건넌 놈들이 대거 개봉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고.
물론 형편없이 패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두어 수 겨뤄봤는데, 자신이 살짝 밀렸다고만 했을 뿐.
다행히 세가에서는 그의 말에 큰 의문을 품지 않고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밀렸다고 했으니 자신보다 강한 고수들도 올 터.
그들만 온다면, 놈들에게 당한 걸 갚아줄 수 있을 터였다.
“놈들의 뒤는 누가 쫓고 있지?”
“황등에게 맡겨놓았습니다.”
“가서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만 알아놓도록 해라. 아마 개봉을 나서지는 않을 거고, 분명 객잔에 들어갈 거다. 절대 함부로 건들지 말고,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도 마라.”
“예, 당주.”
* * *
독고무령 일행은 개봉성 북문 쪽 골목 안에 있는 풍양객잔으로 들어갔다. 전에 머물렀던 곳이었는데,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조용해서 하룻밤 지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객잔 안에는 손님이 십여 명 정도 있었지만, 무기를 든 그들이 들어가자 소리를 죽였다.
추월루에 먼저 들르느라 식사를 못한 상태. 방으로 가기 전, 먼저 식사를 하기로 하고 탁자 두 개를 차지했다.
곧 점소이가 다가와 엽차를 따라주고 주문을 받아갔다.
어정쩡한 침묵이 길어지자, 기회라는 듯 모용설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추월루의 주인, 정말 아름답죠?”
독고무령은 엽차로 입술을 축이며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전에 봤을 때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어. 그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이긴 해도 그다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더군.”
일행들은 슬그머니 모용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그런 눈빛으로.
하지만 모용설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뭐가 빠졌었는데요?”
독고무령은 당시의 유하령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을 보고, 바짝 메말라서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우물 같은 느낌을 받았지. 눈빛에서 일말의 정(情)도 느껴지지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눈에서 정이 보인다는 건가요?”
“원인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달라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눈빛이나 말투가 훨씬 부드러워졌어.”
그게 다 회주 때문일 걸요!
모용설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녀는 여인의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하령이 독고무령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만일 독고무령의 말대로 그녀가 변했다면, 그녀의 변화는 독고무령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했다.
모용설은 심통이 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근데 추월이라는 여인의 정체는 뭐죠? 진 조장님 말로는, 무공도 제가 상대하기 힘들 만큼 강하다고 하고…… 단순히 기루의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차에 모용설이 묻는다. 일행들은 침 삼키는 것도 참고 귀를 기울였다.
독고무령이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정 안 되면 강제로 정체를 알아보려고 했지. 그동안 빙빙 돌려서 거짓 정보만 전한 것도 괘씸했고.”
밖으로 나온 추월의 안색이 창백했었다. 힘든 일을 겪은 것처럼.
‘그래서……?’
모용설은 유하령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독고무령의 손이 오죽 독한가 말이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신의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것에 내심 안도했다.
“그녀가 말하던가요?”
“그녀가 바로…… 유하령이었어.”
순간, 일행들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독고무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추월이 유하령이라고?
모두가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데, 독고무령이 말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그녀의 무공을 폐지시킬 뻔했으니까.”
“마, 맙소사. 정말 큰일 날 뻔했군.”
진사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용설은 그제야 유하령이 왜 그리 힘들어 했는지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 했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손을 쓰기 전에 정체를 알게 되어서.”
“거기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바람에 심력이 많이 소모되었지.”
“저런…….”
모용설은 처음으로 유하령이 안쓰럽게 여겨졌다.
오면서 그녀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유하령은 제왕성에서 납치한 백운서원 원주의 딸이라 했다. 꼭 찾아서 전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복수를 하려고 하겠군요. 아! 혹시 그래서 태원으로 찾아온다고 한 건가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응, 그래도 다행히 나에 대해선 크게 원망하지 않는 것 같더군.”
“예? 왜 회주를 원망해요?”
“내가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거든.”
“…….”
모용설은 입이 반쯤 벌어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어떤 사이라는 거야?
은인이야, 원수야? 뭐가 이리 복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