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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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7화
197화
소전은 묵묵히 독고무령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절대 안 되는 법이지. 저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강호에 바람을 일으킬 거네. 자, 가보세! 가보면 우리가 든든한 동아줄을 잡았는지, 아니면 썩은 새끼줄을 잡았는지 알겠지!”
* * *
“크크크크, 지금쯤 그 늙은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겠군. 우리가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
소한은 소리죽여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혈왕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혈왕의 눈빛이 예전과 달랐다. 완연한 핏빛은 광분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잠령혈시가 발동되면서 혈왕의 정신이 완전히 제압된 때문이었다.
그는 혈왕의 초점이 사라진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대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가 없는 한 은룡산장의 전력으로는 제왕성을 막을 수 없을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숨에 무너지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때지. 유자황, 그 늙은이의 힘이 빠질 대로 빠졌을 때. 그래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때? 그 늙은이의 머리를 네 손으로 따면 즐거울 거 같지 않느냐?”
혈왕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서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를 쳐든 소한은 천장을 바라보며 이를 갈 듯이 말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놈이 네 목을 딸 것이다. 기다려라, 유자황!”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유 공공, 아니 정확한 이름은 유자황, 그를 철저히 괴멸시킬 때를.
이제 때가 다가온다.
부인과 자식들 앞에 그 늙은이의 머리를 바칠 날이.
그 생각을 하면 미친 듯이 즐거웠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장을 바라보느라 혈왕의 눈빛이 미미하게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장소천은 기이한 눈빛으로 소한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괴이한 자다. 노태군의 수하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노태군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다.
조금 전, 자신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부서진 혈왕로였다. 자신이 있는 곳이 은룡산장의 비처인 혈왕동이라는 말.
어이없게도 소한은 자신을 혈왕동으로 데려온 것이다.
처음에는 노태군의 명령이 있었기에 이리 온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꾸로 노태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노태군은 자신과 소한이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겠지.
정말 기가 막힌 은신처였다. 자신이 장소천이었을 때는 정신이 제압당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한은.
‘혈왕은 소한에게 완전히 정신을 제압당한 것 같군.’
그게 아니라면 놈이 머릿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게 세상이라더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당장 나서서 소한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혈왕의 정신이 소한에게 제압당해 있는 이상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혈왕이 되었을 때 어떻게 움직일지 아무도 모르니까.
소한을 죽인 후 세상에 나가 혈겁을 일으키는 마왕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일단은 소한의 말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혈왕의 정신을 제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자신의 정신을 되찾을 방법도 알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소한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수밖에. 그나바 다행히도 노태군을 죽이는 것 외에는 쓸데없는 피바람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당신도 꽤나 불쌍한 사람이군.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십 년이나 원수인 노태군 밑에서 살아왔다니…….’
그때 소한이 말했다.
“내가 왜 독고무령이란 놈을 쫓아가지 못하게 했는지 아느냐?”
일순간 장소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독고무령, 바로 그 이름 때문이었다.
소한은 천장을 보고 있었기에 장소천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지 못했다.
‘독고무령…….’
장소천이 ‘독고무령’이라는 이름을 곱씹는데 소한이 말을 이었다.
“그놈이 살아 있어야 위지천백과 노태군이 골치 아파지거든. 그놈의 이름도 내 마음에 들고 말이야. 크크크크…….”
제7장 친구를 위하여
구름 사이로 비치는 태양이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시각.
동문을 통과한 독고무령은 곧장 밀호방으로 향했다.
오가는 사람들 중에서 예리한 눈빛이 느껴졌다. 흑도삼당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고무령을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삼류낭인무사처럼 보이는 행색을 보고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중문대로로 들어선 독고무령은 운가고서점을 태연히 지나쳤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그를 본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백의를 입은 그는 나이가 사십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
추월루의 부총관인 모종경, 바로 그였던 것이다.
‘저자가 무슨 일이지?’
독고무령이 바라보는 동안 한 사람이 모종경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나직이 말을 나누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헤어졌다.
‘잡아서 물어볼까?’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다.
독고무령은 일단 그대로 놔두었다. 행동을 보니 바로 태원을 떠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모종경은 독고무령이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지나가고 잠시 지난 후, 독고무령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운가고서점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손님이 없어 조용했다.
운양이 있던 자리에는 초운이 대신 앉아 있었다.
“잠깐 나와 봐라.”
초운은 느닷없는 말에 빤히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독고무령임을 알아보고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회, 회…… 고, 공자님.”
초운은 황급히 말투를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고무령은 저만치 걷고 있는 모종경을 가리켰다.
“저기 백의를 입은 중년인 보이지? 그에게 사람을 붙여 놔라.”
누구의 명인데 어길까?
초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거리로 나가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을 했다.
곧바로 열대여섯 살가량의 소년 둘이 초운에게 다가왔다.
초운은 두 소년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두 소년은 모종경 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모종경의 뒤를 자연스럽게 쫓았다.
초운은 마치 어떤 조직의 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안으로 들어왔다.
“명대로 했습니다, 공자님.”
독고무령은 피식 웃고는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운양은?”
“방주님은 장원에 계십니다.”
밀호방에 있다는 말.
독고무령은 가볍게 손만 저어주고 고서점을 나왔다.
* * *
운양은 마주 앉은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하늘로 고개를 한번 쳐들더니, 툭 떨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차마 한 대 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한이라는 표정이었다.
“후우, 정말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수.”
“누가 자네를 괴롭히기라도 했나?”
독고무령은 왜 그러냐는 투로 물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운양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죽더라도 한 대 쳐?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독고무령이 때린다고 맞을 사람인가?
그러니 참는 수밖에.
제길!
“그런 사람이 있죠. 만나면 한 대 때리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니 때리지 못하겠습디다.”
“그게 누군가? 내가 대신 때려주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운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똑바로 뻗어서 독고무령의 코를 가리켰다.
“거기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내 속을 뒤집어 놨수. 어디 좀 힘껏 때려주쇼!”
독고무령은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퍽!
독고무령이 스스로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 대를 때리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퍽퍽퍽!
그냥 살짝 때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힘껏 때리는 독고무령이다.
가볍지 않은 타격임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운양이 황급히 말렸다.
“어어? 회주! 그냥 장난이었습니다. 장난이었다니까요! 멈춰요!”
독고무령은 자신의 뺨을 연속적으로 칠팔 대를 후려친 후에야 손을 멈췄다.
“어때, 이제 속이 좀 시원해졌나?”
“예? 예……. 그게, 뭐 시원해졌다기보다……. 흐, 회주는 정말 못 말릴 분입니다.”
운양이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독고무령이 그런 운양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금강불사공을 익힌 그였다. 그렇게 때린다고 아플 리가 없었다. 그저 남들 눈에 조금 보기가 안 좋을 뿐.
하지만 친구와 둘뿐인데 뭐가 어떤가?
친구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자네 마음이 시커멓게 탄 것을 생각하면 무릎이라도 꿇고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래도 명색이 회주니까 그렇게는 할 수가 없군. 대신 내 뺨을 때렸으니 그걸로 봐주게.”
운양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내가 뭐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인 줄 아쇼? 이렇게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 죽겠수.”
“그 말 사실이겠지?”
“물론이죠. 사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느라……. 뭐야, 제길, 왜 지금 눈물이 나오는 거야?”
진짜 운양의 눈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스스로 뺨을 때렸다.
천하의 암천사신이!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가슴에서 뭉클한 느낌이 들더니, 그것이 그대로 눈까지 솟구친다.
운양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씨, 옛날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는 울지 않기로 했는데…….”
독고무령은 못 본 척하며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음, 근데 너무 세게 때렸나? 무지 아프군.”
운양은 재빨리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고 피식 웃었다.
회주이기 이전에 친구다. 너무나 좋은 친구.
일거리를 너무 많이 안겨줘서 탈이지.
문득 일거리 생각이 떠오르자 운양의 표정이 다시 신중해졌다.
“험, 좌우간 내 회주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그동안 쌓인 문제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어디, 무엇이 문젠지 말해보게.”
“우선 그 말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독고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운양에게 말할 여유를 주었다.
운양이 독고무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제왕오로와 어떤 사이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독고무령의 눈이 좁혀졌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반문을 먼저 했다.
“그들이 왔나?”
이번에는 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왕오로의 합류.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여차하면 판세를 뒤집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독고무령의 표정도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빚이 있네. 아마 그 빚을 갚으려고 왔을 거네.”
빚을 진 자와 빚을 받을 자.
하지만 단순한 채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거네.”
그 이상 확실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운양은 설마 그 정도까지 깊숙한 관계일 줄은 몰랐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것도 초절정고수가 다섯 명이나 자신들에게 넘어왔다는 것에 한껏 고무되었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왕성에서 알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이제는 더 숨길 것도, 물러설 곳도 없네.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들도 은룡산장만 물리치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하긴, 은룡산장만 물리치면 산서강호는 제왕성의 천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우리 암천회가 없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단지 산서의 강호만이 아니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운양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
“아무리 생각해도, 위지천백이 노리는 것은 강호만이 아닌 것 같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