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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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5화
195화
“남들은 그렇게 부르지.”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람?
“그, 그런데 무슨 일로 회주님을……?”
“전에 무령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무령이는 어디 갔느냐?”
운양은 멍한 표정으로 다섯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제왕오로가 독고무령과 무슨 약속을 했단 말인가?
말투로 봐서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쁘긴커녕 독고무령에 대해서 말하는 노인들의 얼굴에는 그리움과 그늘이 동시에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제왕오로와 독고무령의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는 듯했다.
운양은 그나마 적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미치겠군.’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백천산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제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은 저번 백천산 싸움에서…… 그래서 저희도 회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는 제왕오로가 대경했다.
“뭐야? 사라져?”
“이런! 그럼 우리가 백천산으로 가봐야겠군.”
당장 백천산으로 달려갈 것 같은 모습.
운양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해서 그들을 말렸다.
“저희들이 샅샅이 뒤져보았습니다만 찾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깊은 곳 어딘가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막위지가 미간을 좁혔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손양 등을 돌아다보았다.
“이 아이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어찌 생각하나?”
“그게 낫겠네.”
“노부 역시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들도 운양의 말이 일리 있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양은 그쯤에서 결정을 지었다.
“그럼 후원의 별장을 내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 쉬시며 기다리십시오. 제가 모실 테니 따라오시지요.”
제왕오로를 후원의 별장으로 안내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운양은 털썩,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터져? 회주가 빨리 와야 내가 좀 편해질 텐데……. 에휴, 이러다 장가도 못가보고 죽는 거 아냐?”
그러나 그에겐 신세를 한탄할 여유도 없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긴 지 일각이나 지났을까, 문 밖에 서 있던 호위무사가 말했다.
“방주님, 진가철방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 진가철방에서? 사혁이 온 건가?’
그의 의문에 답하듯 문이 벌컥 열리고 진사혁이 들어섰다.
“운양, 잘 있었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운양은 진사혁과 함께 들어서는 진원명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르신?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도 제왕성과 싸우는데 한 손 거들려고 왔다.”
진원명의 한마디에 운양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고수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떠나서 진가철방이 도움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만군만마를 얻었다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진가철방이 암천회와 손잡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제왕성이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암천회든, 진가철방이든 제왕성의 표적이 될 게 뻔한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흥! 괜찮지 않으면? 놈들이 본가를 치려고 했다가는 놈들도 끝장날 게다.”
뭔지 몰라도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다.
하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오지는 않았겠지.
어차피 벌어진 일, 운양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 방 안으로 한 여인만 들어오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었다.
“오빠, 잘 있었어?”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여인. 나이는 이십 대 초반쯤 되어보였다. 키가 상당히 컸다. 그리고 몸도.
그녀를 본 운양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소, 소영이, 네가 왜 여기에 온 거지?”
“왜 오긴? 나도 싸우러 왔지. 하하하, 걱정 마, 오빠는 내가 지켜줄게.”
진소영, 그녀는 진사혁의 동생이었는데, 또래의 남자들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강했다. 충분히 운양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운양은 그 점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내가 왜 네 보호를 받는단 말이냐? 허튼소리 말고 얌전히 집에 가 있어.”
진소영은 성큼성큼 걸어서 운양의 앞으로 다가왔다.
턱! 운양의 어깨를 친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좋으면 좋다고 해. 내가 걱정되어서 그래? 걱정 마. 오빠가 생각한 것보다 강하니까.”
운양은 정말 걱정되었다.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빌어먹을! 이 선머슴아는 왜 데려온 거야?’
제6장 혈왕의 정체
쾅!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나가는가 싶더니, 일순간 몸이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비어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전의 공명과는 또 다른 아득한 기분.
몸도 정신도 텅 비어, 내 안에 아무 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도 잠시, 비어 있던 곳이 다시 채워지더니, 탄성을 내지르고 싶을 정도의 환희가 밀려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락의 감동!
도인들이 신선경에 이르면 이런 느낌을 받을까?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이, 희미한 미소가 독고무령의 입가에 떠올랐다.
앞이 환하게 보인다. 동굴 벽의 굴곡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촉촉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눈을 뜨고 보는 것도, 손으로 만져서 느낀 것도 아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감각, 제 육감인 초감각이 보지 않아도 보이게 하고, 손대지 않아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
마침내 태천일심이 승천만화를 넘어서 무심천지연(無心天地然)에 이르렀음이다.
독고무령은 가슴속에서 은은한 여명이 퍼지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은 더 이상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의 흐름이 확연히 보일 지경이다.
손을 뻗으면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은 바람은 한 올 한 올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손을 들어 검지를 뻗더니, 동굴 벽을 향해 내리그었다.
그의 검지가 움직일 때마다 울퉁불퉁한 동굴 벽에 선이 그어졌다.
때론 굵고, 때론 가느다란 선은 먹물이 물속에서 퍼져나가듯 동굴 벽을 뒤덮어갔다.
처음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빗자루로 진흙바닥을 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단순하게 보이는 선이었다.
하지만 곧 단순하던 선들이 모이며 어떠한 형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회오리치는 바람의 모습 같기도 하고,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모습 같기도 했다.
수천제마구겁무 중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춤이 동굴 벽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독고무령은 그것을 따로 익힌 것이 아니었다.
무심천지연의 경지에 들어선 순간, 저절로 머릿속에서 환영처럼 펼쳐졌을 뿐이었다.
그가 동굴 벽에 그것을 남기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행여나 전처럼 잊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자신의 깨달았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 무심천지연의 경지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펼쳐진다.
마음이 가는 곳에서 기운이 나타나니, 태천일심의 기운을 억지로 운용할 필요도 없었다.
태천일심의 기운은 몸속에 그대로 놔두고, 마음이 닿는 곳에 기운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거야말로 심검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심력과 공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고도 펼칠 수 있으니, 극상승의 심검이라 할 수 있었다.
독고무령은 무심천지연에 들어서면서 또 한 번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태천무극(太天無極)은 과연 어떤 경지를 말하는 걸까?
무공을 되찾은 이상 수직으로 된 동굴을 벗어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단숨에 십여 장을 솟구친 다음, 검으로 벽을 찍고 다시 위로 솟구쳤다.
수직 동굴의 높이는 이십여 장 정도.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옆으로 뻗은 동굴이 보였다.
신형을 틀은 그는 옆으로 뻗은 동굴 안으로 내려섰다.
머리카락 날리는 것이 아래쪽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거리가 얼마가 되는지는 몰라도, 밖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했다.
독고무령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밖으로 향했다.
어이없지만,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덕에 무공이 또 한 단계 올라섰다.
극심한 내상과 오직 물밖에 없는 어둠에서의 생활.
이런 극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자신이 무심천지연을 이룰 수 있었을까?
고개가 저어졌다.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만, 가능성은 일 할도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허구한 날 무공만 익히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마음도 안정되지 않았을 테고.
그리 생각하면 자신의 깨달음에 위지천백이 한몫 거든 셈이 된다.
우습지만 사실이 그렇다.
‘위지천백, 그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군.’
독고무령은 어둠을 걸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무심천지연에 이른 이상 이제는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위지천백, 노태군. 그들이 설사 천하에서 제일간다는 고수를 끌어들였다 해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도 일대 일이라면 등후양과 혈왕에게 뒤질 마음이 없던 그가 아닌가.
하거늘 지금의 상태에서 누가 두려울 건가!
그때였다. 어떤 얼굴 하나가 갑자기 뇌리에 떠올랐다.
순간 표정이 급변한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혈왕…… 그 얼굴……. 설마……?”
몸이 후들거렸다.
심장에 대못이 박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다. 절대 그래서는 안 돼!’
마음은 그리 외치지만, 자꾸만 혈왕의 얼굴에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어릴 적 장소천의 얼굴이!
부정하려 할수록 두 얼굴이 겹치면서 완벽한 하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천…… 정말 너란 말이냐?”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마치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그래, 나다, 무령!
혈왕이 정말 장소천이라면 어떻게, 어떻게 장소천이 혈왕이 되었단 말인가? 그가 왜 자신을 몰라본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뇌리를 두들겼다.
자신이 생각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장소천은 대홍문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아닐 수도 있어!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둘인가?’
독고무령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
장소천이 자신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건 절대라 해도 좋았다. 기억을 완전히 잃지 않은 이상은.
‘가만, 기억?’
그때 문득, 전에 만났던 혈왕의 이상한 행동이 떠올랐다.
둘은 같은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얼굴이 달랐었다.
얼굴이야 인피면구를 쓰면 되는 일이니 그걸로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때의 혈왕이 했던 행동과 말이었다.
뭔가 갈등을 겪는 행동과 말투.
분명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혈왕이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독고무령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행동과 말투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너무나 다르다.
자신이 아는 한, 그럴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다.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때.
자신은 비옥십팔호실에서 많은 사람을 보았다. 개중에는 극심한 공포에 젖어서 미쳐버린 자도 몇 있었다.
미친 자들은 제정신이 들어도, 자신이 미쳤을 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반대로 미쳤을 때 역시 제정신이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장소천이 미친 걸까? 전에 만났을 때는? 그때는 제정신이었을까?
독고무령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직접 만나서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좀 전의 밝은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 * *
달조차 구름에 가린 야심한 밤.
우르릉!
백천산 남쪽계곡에 있는 거대한 고목나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뿌리 아래쪽의 흙이 어디론가 빨려들자 수만 근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고목나무는 반쯤 기울다가 바위에 걸려서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았다.
흙과 돌이 뒤섞여 구르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고목나무의 뿌리 아래쪽 뻥 뚫린 공동에서 한 사람이 솟구쳤다.
독고무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