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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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2화
182화
진가철방이 단순한 철방이 아님은 양무등도 모르지 않았다.
제왕성조차 진가철방을 강압하지 못할 정도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제왕성 사람들은 그것이 군과 관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진가철방을 일으킨 조상이 그 옛날 강호제일의 고수였다지만, 그것은 지나간 옛일일 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강호제일의 고수를 배출한 가문도 세월이 지나고 뒤를 이을 기재가 나오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주가 군과 관에 손을 썼다고 했다. 군과 관의 보호막이 떨어져나간 진가철방은 이제 단순한, 그저 산서에서 제일 큰 철방일 뿐이었다.
물론 진가철방 자체의 무력이 상당하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려면 제왕성에 비할 건가.
‘후후후, 군과 관이 더 이상 그대들을 돕지 못하는 한 그대들은 우리의 뜻을 거부할 수 없을 거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진관호를 압박했다.
“가주께서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오.”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아신다니 돌려 말하지 않겠소. 성주께서는, 진가철방이 우리 제왕성을 도와서 적을 몰아내는데 앞장서주기를 바라고 계시오.”
진관호는 생각할 시간도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는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소이다. 그 점은 귀성의 성주께서도 잘 아는 사실. 그 일이라면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요?”
차가운 음성.
진관호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우리는 권주도, 벌주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소.”
“꽤나 자신만만하구려. 혹시라도 누가 그대들을 도울 거라 생각하고 그런 거라면, 내 충고하건데, 생각을 바꾸시오. 군과 관은 더 이상 그대들을 돕지 않을 테니까.”
진관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건 귀하가 걱정할 일이 아니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귀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훗, 그렇게 말해주는데도 상황파악을 못하다니. 그러다 진가철방의 사람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비릿한 조소. 협박에 가까운 말투다.
지켜보던 진원명이 냉랭히 코웃음 쳤다.
“흥! 위지천백이 가서 그리 말하라든가?”
양무등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노인장은 뉘신데 성주님의 함자를 그리 함부로 부르는 게요?”
“함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대다. 진가철방은 그대가 모욕을 줄 정도로 하찮은 곳이 아니니라. 아니, 그대가 아니라 위지천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양무등의 좌우에 있던 두 명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진가철방이 그리도 대단한 곳인 줄 미처 몰랐군. 성주님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라니.”
두 사람 중 키가 큰 자가 냉랭히 말하고 진원명을 쏘아보았다.
양무등은 자신의 명이 없음에도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는데 그냥 놔두었다.
두 사람은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
두 사람으로 하여금 진가철방의 실력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때 진원명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서 위지천백에게 전해라. 우리는 전과 다름없이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이 사람을 보내지 말라고 말이다.”
키 작은 자가 한 손을 도병에 올리고는, 턱을 치켜들고 진원명을 꼬나보았다.
“거 노인장이 말귀가 어두운가 보군. 장로께서 말씀하지 않았소? 그럼 진가철방 사람들이 다친다고 말이오? 괜히 피 본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순순히 협조해 주시오. 우리 제왕성과 손을 잡으면 당신들에게도 많은 이익이 돌아갈 테니까.”
“흥, 네깟 놈들을 겁냈다면 지금의 진가철방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게다.”
키 작은 자, 임추성이 눈을 부라리며 도를 한 뼘쯤 잡아 뺐다.
“이 양반이……. 진짜 뜨거운 맛을 봐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 하려나…….”
순간이었다.
눈빛을 무심하게 가라앉힌 진원명이 성큼 한 걸음 내딛더니 손을 쭉 뻗었다.
임추성은 진원명의 손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대경하며 도를 뽑았다.
하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운데다, 진원명의 움직임은 그의 생각보다 몇 배나 빨랐다.
그의 도가 다 빠져나오기도 전이었다.
진원명은 좌수로 반쯤 빠져나온 도병을 누르고, 우장으로 임추성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임추성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손 그림자 어디로도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퍽!
진원명은 임추성의 얼굴을 후려치고는, 뒤로 튕겨지려는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건방진 놈! 어디서 함부로 도를 빼든단 말이냐!”
귀청이 멍멍할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임추성의 골을 흔들었다.
옆에 있던 키가 큰 자는 임추성을 도울 수가 없었다.
진원명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쇠도 으스러뜨릴 것 같은 무거운 기운에 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무등 뒤에 서 있던 자들은 진원명의 기세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대경하며 진관호와 진원명과 진원정을 에워쌌다.
양무등이 다급히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본성에 대항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진원명이 홱 고개를 돌려서 양무등을 바라보았다.
“본가의 사람들이 다친다 했더냐? 내 분명히 말해두지. 한 번만 더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눈이 마주친 순간, 양무등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대한 힘이 밀려드는 느낌.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는 그제야 진원명의 강함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이 압박감을 느끼다니!
‘성주님이 함부로 대하지 말라더니, 이래서였던가?’
그 사이 진원명은 임추성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본가의 의지를 알았으면 그만들 가봐라!”
양무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인장은 뉘시오?”
“나는 진원명이라 한다.”
“좋소, 오늘은 이만 가겠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어떤 게 진가철방에 이익이 되는지 말이오.”
양무등이 이를 갈며 떠난 지 이각 후.
진가철방 깊숙한 곳의 커다란 탁자 주위로 다섯 사람이 둘러앉았다.
진문화, 진원명, 진원정, 진관호 그리고 진원정의 바로아래 동생인 진원추까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지 탁자 위의 찻잔에 든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진관호는 식은 차 한 모금으로 칼칼한 목을 달랜 후 입을 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진원명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어떻게 하긴? 우리가 언제 강호문파에 고개를 숙였더냐?”
“허어, 어디 가주가 그걸 몰라서 말하는 건가?”
진문화는 나직이 입을 열어 진원명을 말렸다.
진가철방이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백 년도 더 전부터 그래온 사실이었다.
위지천백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을 보내 진가철방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관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시간을 끌어볼 생각입니다.”
진원명이 곤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자가 시간을 주겠느냐?”
“위지천백도 우리가 지닌 힘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당장 무력을 쓰지는 못할 겁니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 보고, 나중에 정 안 되겠으면 그때 가서 위지천백을 만나보도록 하지요.”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진원정이 입을 열었다.
“어떤 협박을 해도 그들에게 무기를 만들어 줄 수는 없네. 물론 사람을 보내 도와주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고 말이야.”
“소질도 알고 있습니다. 해서 다른 걸로 대체할까 합니다.”
진원명의 하얀 눈썹이 누에처럼 구부러졌다.
“다른 것?”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꼭 무기와 사람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금이라도 주겠다는 건가?”
“다행히 우리에겐 그동안 쌓아 놓은 황금이 상당히 많습니다. 전쟁을 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할 테니 그들도 거부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으음, 위지천백이 그걸로 만족할지 모르겠군.”
“일단 그걸로 시간을 벌어보고, 뒷일은 그 다음에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그때쯤이면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진원명은 노기를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 없지. 당장 마땅한 방법이 없는 바에야…….”
다섯 사람은 그렇게 대충 의견을 조율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몰랐다. 위지천백,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진가철방을 건드린 진정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 * *
백천산의 계곡으로 돌아온 독고무령은 동굴 안에서 단목승이 남긴 세 가지 공법에 대한 수련에 전념했다.
식사조차 하지 않고, 급박한 연락이 아니면 누구도 자신의 수련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혈왕과의 대결에서 밀린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혈왕조차 이기지 못하면서 위지천백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는 오직 태천일심법만을 행하며 모든 것을 비우고 공(空)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전념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머릿속을 떠다니는 온갖 상념, 심지어 가슴에 너무 깊이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원한조차 하나하나 지워갔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자, 어느 순간부터 일체의 잡념이 사라지고 자신 안의 모든 것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독고무령은 모든 것을 마음이 가는 대로 놔두었다. 얻지 못할 거라면 어차피 욕심을 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때부터 태천일심의 기운은 자유자재로 독고무령의 몸을 누비며 끊임없이 휘돌았다.
그 상태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전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미미한 움직임이 몸속에서 느껴졌다. 태어나서 세상의 공기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잠들어 있던 전신의 미세한 신경이 태천일심의 기운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느끼고 싶어서 느낀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절로 움직이며 그렇게 느껴진 것일 뿐.
태초의 아이나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열락의 기쁨!
머릿속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찬 느낌!
독고무령은 몸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반개했다.
손을 뻗으면 태천일심의 기운이 쏟아져나갈 것만 같다.
나무막대기든 쇠로 된 도검이든, 그 무엇에라도 그 기운을 실어 자신의 맘대로 변화를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손을 뻗어 일 장 앞에 풀어놓은 자신의 검을 당겼다.
스르릉.
검집을 조용히 빠져나온 검이 그의 손안으로 날아들었다.
찰나였다. 어둠 속에서 영롱한 광채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곧 삼 장 앞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굴 벽이 둥글게 깎이면서, 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단순한 검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검강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기운. 태천일심의 기운이 검을 통해 발출되며 삼 장 밖의 바위를 깎아낸 것이다.
승천만화가 신외지물을 이용할 경지까지 올라섰다는 말!
바위가 깎여나간 곳을 쳐다보는 독고무령의 무심한 두 눈에 잔잔한 희열이 떠올랐다.
보이는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적어도 칠팔성의 내력을 쏟아내야 한다. 그런데 오성의 내력으로 힘들이지 않고 바위를 깎아낸 것이다.
자신의 내력이 이삼성은 증진한 것과 같은 효과. 게다가 공력의 소모도 적다.
독고무령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혈왕과의 싸움으로 공력증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그로선, 승천만화의 예상치 못한 뛰어남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천지연과 태천무극을 완성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제는 그것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독고무령은 손에 들린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태천삼법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승천만화를 완성하면 자연스럽게 무심천지연으로 들어서는 길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자신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면, 현재 승천만화의 경지는 팔구성의 상태. 조금만 노력하면 무심천지연의 길을 열 수 있을 듯했다.
그때, 동굴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주, 태원에서 긴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이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