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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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0화
180화
제10장 진가철방에 부는 바람
이십일호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달려서 독고무령 일행을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안내했다.
싸움이 벌어진 곳은 능정 동양 중간의 북쪽 야산 자락이었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방에 널려 있는 십여 구의 시신.
밟히고 꺾인 풀잎과 나뭇잎에 붉게 피어 있는 혈화.
상당히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것 같다. 거기다 흔적을 봐서는 적들도 상당한 자들처럼 느껴진다.
그때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십일호가 말했다.
“두 분이 놈들의 손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독고무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십여 구의 시신 중에는 그들의 시신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을 공격한 자들은 동료의 시신조차 처리하지 않고 떠났다.
추적하기 위해 다급히 떠났다는 말.
다시 말해 관조운과 사공화정이 적의 공격을 피해 도주했다는 말이었다.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아주 멀리만 가지 않았다면, 소리든, 기운이든 자신의 감각에 잡힐 터였다.
은룡산장에서 한 번 해봤기 때문인지, 감각에 걸리는 지역이 전보다 훨씬 빠르게 넓어졌다.
빨리 추적하자고 입을 열려던 진사혁이 고개를 모로 꼬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산바람이 독고무령의 몸 일 장을 돌아 지나간다.
진사혁은 한무종과 사공화정이 독고무령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다급히 말렸다.
“잠깐! 회주가 뭔가 알아보는 거 같수.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한무종과 사공화정은 눈을 크게 뜨고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고무령이 눈을 떴다.
그는 서북쪽을 바라보고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저쪽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살기를 띤 기운이 느껴지고 있소. 이십일호, 그대는 뒤로 처져서 상황을 지켜보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시오!”
찰나의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
독고무령은 네 사람보다 한 발 먼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바람을 탄 제비처럼 나지막한 산줄기를 십여 개 정도 넘어가자 폭풍처럼 휘도는 기운이 느껴졌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나 고함치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많은 숫자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강하고 정심한 기운이었다.
독고무령은 검을 빼들고 암천유성류를 펼쳤다.
대붕처럼 두 팔을 펴고 날아간 그는 단숨에 이십여 장 높이의 산줄기를 가로질러 능선을 넘었다.
순간 저만치 녹음이 우거진 계곡 아래에서 움직이는 무사들이 보였다.
언뜻 보이는 사람만도 대여섯 명은 되었다. 아마 보이지 않는 자들까지 합하면 열 명 내외일 듯했다.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
모두가 한곳을 향해 질주한다.
독고무령은 그들이 질주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앞은 도끼에 맞은 장작처럼 쩍 갈라진 절벽으로 막힌 상태였다.
높이는 이십여 장.
깎아지른 절벽은 파란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위에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가 보는 동안에도 대여섯 명의 무사들은 부챗살처럼 퍼져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독고무령은 즉시 절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단 두 번의 도약으로 사십여 장을 날아간 그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무사들을 덮쳤다.
선두에 선 무사들이 절벽에서 이삼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상황. 망설일 틈이 없었다.
서걱!
무사 하나가 영문도 모르고 목이 잘린 채 쓰러졌다.
독고무령은 그자의 어깨를 박차고 선두에 선 자를 공격했다.
쓰러지는 자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치자, 좌우에서 경악에 찬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웬 놈이냐!”
“조심해!”
독고무령은 이 장 허공을 격한 채 좌수를 흔들었다.
단월인과 귀월인이 펼쳐진 순간, 시퍼런 강기가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뻗어갔다.
절벽 안으로 들어가려던 두 명의 무사는 소름끼치는 기운의 엄습을 느끼고 홱 몸을 틀었다.
그들 역시 절정에 근접한 일류고수들이었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공세를 피하기에는 무위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쩍!
하나는 등이 벌어진 채 튕겨지고, 다른 하나는 바닥을 구르며 피하려다 독고무령의 검에 한 팔이 잘렸다.
“크윽!”
독고무령은 단숨에 세 명을 해치우고, 갈라진 절벽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을 늘어뜨린 채 고요히 서 있는 독고무령 주위의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듯 느껴진다.
갑자기 땅이 꺼지고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는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살기를 피워내며 절벽을 향해 달려들던 무사들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굳었다.
모두 열한 명. 그들은 청의와 갈의, 짙은 색의 회의를 입었는데, 그들 중 청의를 입은 중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잇새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독고무령은 앞에 사람이 없는 것마냥 고개를 돌려 절벽 틈 안을 바라보았다.
안쪽 사오 장 되는 곳에 한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관조운, 앉아 있는 사람은 전유곤이었다.
그러잖아도 낡은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에 젖어 있다.
창백하다 못해 회백색처럼 보이는 얼굴. 지혈을 했을 텐데도 뭉클거리며 배어나오는 선혈.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온몸이 상처다.
독고무령이 바라보자 두 사람은 피로 범벅된 상태에서도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니 놈들부터 처리하시구려, 회주.”
서 있던 관조운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무령의 두 눈에서 북해의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눈빛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바로 그때였다.
둘러싸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소리 없이 달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더 가세했다.
바람소리조차 나지 않는 암습!
도검과 겸(鎌)이 독고무령의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독고무령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쩡! 쾅! 퍽!
달려들던 자들 중 검을 든 자는 부러진 검을 쥔 채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르게 튕겨지고, 도를 든 자는 허리가 뒤로 접혀 꺾이며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겸을 든 자는 가슴이 함몰된 채 독고무령의 손에 목이 잡혔다.
우드득.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둘러싼 자들의 뇌 속을 긁어댔다.
하지만 뒤이어진 독고무령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최선을 다해서 도망쳐라. 그러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의 목소리에 숲속이 얼어붙었다.
동시였다. 독고무령의 신형이 죽 늘어나는가 싶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갈의인을 덮쳤다.
벼락처럼 뻗어나가는 시퍼런 검광!
“헉! 조심……. 컥!”
“크억!”
손에 들린 무기로 반격할 틈도 없이, 두 명의 목과 가슴이 쩍 갈라지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단숨에 두 명의 무사를 죽인 독고무령은 암향호접무를 펼치며 또 다른 먹이를 향해 날아갔다.
사신의 손길은 단호하고도 잔혹했다.
도검으로 막으면 도검과 몸을 동시에 베어버리고, 피하려 하면 그림자처럼 뒤쫓아 심장에 구멍을 냈다.
녹음 우거진 숲이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변해버렸다.
사신의 도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악마 같은 놈!”
전 공력을 끌어올린 청의중년인은 악을 쓰며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절정의 경지를 오래 전에 넘은 그의 검첨에서 한 자 길이의 청광이 죽 늘어났다. 검강이었다.
쾅!
가볍게 휘두른 독고무령의 검이 그의 검을 후려친 순간, 청의중년인은 검을 쥔 채 이 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크읍!”
내장이 모조리 터져버릴 것 같은 충격!
검강을 일으킨 덕에 검은 무사하지만, 대신 검을 쥔 손이 찢어진 것만 같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저놈이 누군데……?’
믿을 수 없는 강함.
공포가 스멀거리며 그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악마 같은 놈의 도살에 이미 일곱이 죽었다. 자신과 남은 세 사람이 상대한다고 해도 놈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안 돼!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청의중년인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뒤로 몸을 날렸다.
“도망쳐!”
기다렸다는 듯 살아남은 세 사람이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곰 한 마리가 날아들며 포효했다.
“어딜 가려고!”
진사혁은 날아들던 기세 그대로 천에 싸인 곤을 내리쳤다.
대경한 무사 하나가 검을 들어 진사혁의 곤을 막았다.
쩌정! 퍽!
진사혁의 곤은 상대의 검을 그대로 부수고는, 어깨를 가슴까지 함몰시켜버렸다.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진 눈, 쩍 벌어진 입에선 비명 대신 핏물이 쏟아진다.
무지막지한 곤의 위력은 상대로 하여금 대항할 의지조차 앗아가 버렸다. 다른 두 사람은 진사혁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려는 곳에는 한무종과 사공화정이 있었다.
진사혁은 그들을 놔둔 채 청의중년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려면 나를 넘어라!”
진사혁은 이미 절정의 단계를 넘어 초절정의 단계에 들어선 고수. 또한 생사투의 경험도 적지 않다.
독고무령은 더 이상 자신이 손쓸 필요가 없음을 알고 진사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혁, 죽이지는 마라. 물어볼 게 있으니까.>
그러고는 관조운과 전유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관조운과 전유곤의 상처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처음 격전지에서 이곳까지 도주한 것이 대단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독고무령은 일단 지혈시키고,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그렇게 치료해서 될 것이 아닐 정도로 상처가 깊었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독고무령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고통이 잦아들자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살았다는 안도감. 강하지 못해서 죽을 뻔했다는 자괴감. 두 사람의 얼굴에서 여러 가지 표정이 교차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결국은 씁쓸한 웃음만이 남았다.
“일단 운기해서 내상부터 가라앉히시오.”
두 사람의 상처를 손본 독고무령은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미 싸움은 끝난 상태.
적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청의중년인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혈도를 짚였는지, 쓰러진 채 몸은 꼼짝도 못하고 이만 갈고 있었다.
곰처럼 둔하게 보이는 진사혁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힌 게 분하다는 듯.
독고무령은 청의중년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혈을 풀어주었다.
“어느 쪽이지? 은룡산장? 아니면 제왕성?”
청의중년인은 눈을 감고 대답을 거부했다.
혀를 깨물 힘만 있어도 자결을 할 것이거늘,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독고무령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차가운 눈으로 청의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고분고분 대답할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충성과 신의 때문이든, 자존심 때문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입을 열지 않으니까.
그러고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입을 연다.
나는 견딜 만큼 견뎠어. 이제 입을 열어도 다들 나를 이해할 거야. 그렇게 자위하면서.
어리석은 자들.
퍽! 퍼벅!
독고무령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지력이 청의중년인의 대혈 몇 군데에 꽂혔다.
숨을 두어 번 쉬었을 때다. 혈도가 짚여 있는데도 청의중년인의 몸이 오그라들며 얼굴에 핏줄이 돋았다. 그리고 입에서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으으…….”
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이기에 선혈이 낭자한 고문을 하기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가끔 시험하던 혈도고문은 피를 보지 않는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혈도 몇 군데를 순서에 따라 짚으면, 그 고통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몇 곱절의 극통으로 변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고문하는 것보단 고통이 덜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피를 거의 안 보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올 수도 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없고.
“말을 하고 안 하고는 그대 자유다. 단,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큼 고통이 커진다는 것만 알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