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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17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0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179화

 

179화

 

 

 

 

 

 

진사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혈…… 왕? 은룡산장의 그 혈왕 말이야?”

 

“그가 직접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확실한 것 같네.”

 

“혈왕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독고무령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그걸 모르겠네. 다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

 

“그래도 자네에게 져서 도망치지 않았나?”

 

과연 그럴까?

 

독고무령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에게 져서 도망친 게 아니네, 사혁. 만일 끝까지 싸웠으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네.”

 

그제야 진사혁의 얼굴이 녹슨 쇳덩이처럼 굳어졌다.

 

 

 

* * *

 

 

 

장소천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대풍장으로 돌아갔다.

 

그 역시 약간의 내상을 입은 상태.

 

그런 상황에서 어디를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 혈왕이 옷이 찢어지고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대풍장으로 돌아간다면 노태군의 의심만 깊어질 뿐이다.

 

아니 그보다는, 혈왕이 자신을 의심할지 모른다는 게 더 두려웠다.

 

가끔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오긴 해도, 특별히 뭔가를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알게 될지 몰랐다. 그럼 큰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찢어진 옷을 뭉쳐서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침상에 앉아 운기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늘게 벌어진 그의 두 눈 깊은 곳에서 붉은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는 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구석을 주시하며 사이한 냉소를 지었다.

 

마침내 장소천의 의지가 밀려나고, 혈왕의 의지가 몸을 지배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내가 관여할 수 없다고 자꾸 엉뚱한 짓을 하다니……. 안 되겠군. 노태군 늙은이가 알게 되면 귀찮아질 텐데, 그 전에 놈의 정신을 더욱 강하게 압박해서 허튼짓을 못하게 해야겠어.’

 

장소천의 짐작과 달리, 혈왕은 어렴풋이나마 장소천의 행동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확실하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기에 가슴에서 치미는 살기를 자제할 수 없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야…….”

 

 

 

* * *

 

 

 

독고무령 일행은 동양의 객잔으로 돌아가지 않고 능정까지 내려갔다.

 

상대가 혈왕이라는 것을 안 이상 서연에서 멀어지는 게 나을 듯했다.

 

능정의 객잔에 들어간 독고무령은 날이 샐 때까지 밤새 운기한 후에야 내상이 회복되었다.

 

그나마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어 다행이었다.

 

혈왕이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내상이 심화되지 않은 것도 이유였지만, 승천만화의 운용이 내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안 덕이 더 컸다.

 

운기를 마친 독고무령은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공격 전, 그에게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었다. 자신이 승천만화의 운용을 하지 않으면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런 강함. 정상적인 상태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이 혈왕의 능력을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몸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의아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혈왕. 그는 왜 마지막 공격을 하지 않고 그냥 갔을까?

 

진사혁 등이 오는 걸 보고?

 

아니다, 그게 아니다. 혈왕은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만큼 강한 자였다.

 

끝까지 싸웠으면 자신이 패배했을지 모를 정도로 강한 자. 사대천왕 중 하나인 도왕 영호진광보다 더 강한 자!

 

그러한 자가 진사혁 등이 두려워 공격조차 안 해보고 도주했다고?

 

웃기는 소리!

 

독고무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때의 광경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다.

 

일그러진 얼굴. 그는 자신이 부른 ‘혈왕’이라는 말에 지나칠 정도로 분노했었다.

 

마치 두 번 다시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철저히 자기부정을 하는 사람처럼.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숨겨졌던 광기가 폭출한 것처럼.

 

그때 진사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무령! 무슨 일이야!

 

그 소리에 혈왕의 핏빛 기운이 흔들리며 흐트러졌다.

 

결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의미모를 정신적 혼란을 겪는 사람의 표정.

 

도대체 왜? 왜 그는 혼란을 겪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독고무령은 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후우,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무심천지연까지 익힌다면 더 좋겠지만, 일단은 승천만화라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최대한 빨리!’

 

위지천백과 노태군에게 패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혈왕에게 밀리다니.

 

씁쓸했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되었으니 전화위복일 수도 있었다.

 

혈왕에게 밀렸다지만 극히 미미한 차이.

 

단목승이 남긴 태천일심의 운용법과 수천제마구겁무를 완성한다면 이길 수 있으리라.

 

혈왕이든, 노태군이든, 위지천백이든! 

 

그 누구든! 

 

 

 

독고무령은 인피면구를 벗고 머리와 옷을 조금 손본 다음 방에서 나왔다.

 

독고무령이 방에서 나오자 진사혁이 다가왔다.

 

“괜찮아?”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무종을 비롯한 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갔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인근으로 흩어졌네. 곧 돌아올 거야.”

 

서북쪽에는 대우, 동북쪽에는 서연. 

 

쥘부채의 왼쪽 끝에 적사보가 있다면, 오른쪽 끝에는 대풍장 그리고 손잡이가 바로 능정인 셈이다.

 

두 세력 간에 끼어 있지 않으면서도 양쪽의 정보를 취합하기에는 최상의 위치.

 

당연히 이곳에도 밀호방의 정보원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밀호방의 정보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정보원들이 암암리에 끼어서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밀호방의 정보원을 노출시키지 않아야 했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럼, 내려가지. 식사하고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으니까.”

 

객잔 일 층에는 손님이 반쯤 차 있었다.

 

능정의 객잔은 열 개가 넘지 않는다. 마을에 상당수의 외지 무사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 이른 아침이어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자리가 꽉 찰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공화정과 한무종이 돌아왔다.

 

까치집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사공화정, 단정하게 무사건을 두른 한무종의 모습은 남들이 보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잘 아는 독고무령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의 머리 모습이 어제 저녁과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삼류낭인처럼 옷을 입고 무기를 낡은 천으로 싸서 남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던 터였다. 거기에 머리를 반대로 하니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관조운과 전유곤도 많은 변화를 준 터였다.

 

혈왕이 그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진사혁이 조금 문제였는데, 큰 덩치를 줄일 수 없는 이상은 변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겉모습을 바꾸는 정도에서 만족하는 수밖에.

 

한무종이 자리에 앉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대우 쪽으로 이십여 리 정도 가봤습니다만, 너무 조용해서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회주.”

 

겁이 날 정도의 조용한 상황.

 

평화롭다는 말이 아니다.

 

태풍이 불기 직전의 고요.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말이다.

 

한무종이 그 말만 하고 입을 닫자, 사공화정이 보충하듯이 말했다.

 

“외부로 빠져나가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백 명 이상의 순찰감시조가 끊임없이 적사보 십 리 이내를 돌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일전에 대우에 갔을 때 경험했기에 독고무령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공화정의 말대로라면 그때보다 감시가 더 심해진 듯했다.

 

“밀호방이 정보를 얻으려면 애를 먹겠군.”

 

접근하지 못하면 즉각적인 움직임을 알 수가 없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저 오면 식사하고 움직여보도록 하지요.”

 

점소이가 다가와 잔에 물을 따랐다.

 

하지만 독고무령 일행이 묵묵히 입을 닫고 주문을 하지 않자, 입만 삐죽이고 돌아갔다.

 

‘삼류무사들 주제에 무게 잡기는……. 그래도 저 곰 같은 작자는 근수 좀 나가겠는 걸? 흑점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낄낄낄.’

 

그렇게 네 사람이 마주 앉아 단순한 담소를 나눈 지 일 각.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이렇게 안 오지?”

 

찻잔을 단숨에 비운 진사혁이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올 때가 지났는데 나타나지 않으니 걱정된다는 듯.

 

하지만 독고무령은 진사혁의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배고프면 음식을 먼저 시키게.”

 

진사혁의 얼굴이 당장 밝아졌다. 그는 사실 두 사람이 늦는 게 걱정된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래도 될까? 어이, 점소이!”

 

그가 점소이를 부를 때였다.

 

장한 하나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럽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독고무령은 엽차를 드는 척하며 객잔으로 들어온 자를 주시했다.

 

담담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두 눈에는 초조감이 배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독고무령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장한의 옆구리에서 흔들리는 손가락이 여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밀호방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상황.

 

누군가가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 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접근이었다.

 

어떻게 알고 자신들을 찾아온 것일까?

 

물어보면 알 일.

 

독고무령은 탁자 위에 올린 손으로 여우 모양을 만들며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쓸 줄 안다면 그쪽 탁자에 앉고, 아니면 내 옆에 있는 탁자에 앉으시오.>

 

장한은 전음을 쓸 수 있는지, 독고무령과 탁자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곧 가느다란 전음이 독고무령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이십일호가 회주님을 뵙습니다.>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다.

 

백천산에서 무슨 연락이 온 건가?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오?>

 

<동양 근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 이십여 명이 두 사람을 공격하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공격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무래도 일원기주인 관조운 소협인 것 같아서 팔호께 급히 연락했더니, 회주님께서 근처에 있을 거라고…….>

 

관조운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관조운은 사공화정과 함께 갔다고 했다.

 

그럼, 사공화정 역시 그와 함께 싸우고 있다는 말!

 

독고무령이 다급히 물었다.

 

<상황은?>

 

<두 사람이 위기에 처한 듯 보였습니다.>

 

<무사들은 은룡산장의 사람들이었소?>

 

<그게 조금 의문입니다.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은룡산장의 무사들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관조운과 사공화정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장소는?>

 

<여기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인데…….>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은 독고무령은, 즐거운 표정으로 주문을 하고 있는 진사혁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네. 식사는 좀 있다 하지.”

 

“……거기다 구운 오리도 한 세 마리……. 응? 어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는군.”

 

독고무령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탁자 위에 철전 몇 개를 대충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전은 점소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면 자신들이 간 후 욕이란 욕은 다 하면서 하루 종일 떠들어댈 테니까.

 

그럼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정보원들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건 자네가 갖게. 엽차를 마신 대가라 생각하고.”

 

벌겋게 달아 있던 점소이의 얼굴이 동산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아졌다.

 

“다녀오십쇼! 저희 객잔은 항상 손님들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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