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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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76화
176화
그때 이야기를 마친 독고무령이 북천삼괴에게 물었다.
“혹시 귀천사사보다 강하고, 눈처럼 하얀 백색도를 쓰는 자에 대해서 아십니까?”
삼괴가 서로를 마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귀천사사보다 강한 놈이야 적지 않지만, 그런 놈은 모르겠는데?”
하긴 삼불곡에 숨어산 지 사십 년이 넘은 삼괴가 아닌가?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때 한무종이 창백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회주, 방금 눈처럼 하얀 백색도라 하셨습니까?”
“아시오?”
“혹시 그의 몸에서 백무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것 같소. 그 자를 아시오?”
한무종의 창백한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그 역시 도를 쓰는 사람. 어찌 그를 모를까?
“천하를 피로 물들인 귀천사사보다 강한 자 중 그런 도를 쓰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한무종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한 사람의 이름을 잇새로 뱉어냈다.
“천하제일도, 도왕 영호진광. 회주께서 만난 사람은 분명 그일 겁니다.”
“도왕 영호진광?”
영호진광의 이름을 되뇌는 독고무령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그 역시 그 이름을 들어보았다.
사대천왕 중 하나인 그의 이름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한밤중에 절벽에서 만나 싸운 자가 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때였다. 막 통나무집으로 들어오던 육풍원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치며 다가왔다.
“방금 누구라고 했나? 영호진광이라고 했나?”
독고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왜 그자의 이름이 회주의 입에서 나온 건가?”
“어제…… 아니, 그젯밤에 만났습니다.”
육풍원의 눈이 경악으로 한껏 커졌다.
“만났다고? 그럼 영호진광이 산서에 나타났단 말인가?”
치선이 나서서 넌지시 말했다.
“싸우기도 했다는군.”
순간 육풍원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럼 그자가 은룡산장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독고무령이 잠시 당시 상황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은룡산장의 사람이 아닙니다.”
문 쪽에서 이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바라보자 이호가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어제 아침에 은룡산장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귀원장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헌원조를 비롯해서 삼십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을 회주께서 죽였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거라고 봐야 할 겁니다.”
육풍원이 얼굴을 씰룩이며 물었다.
“영호진광 말인가?”
“회주께서 그를 만났다면, 그가 그들을 죽인 사람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럼, 그가 어느 쪽 사람이란 말인가?”
이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하의 예상으로는, 제왕성에서 그를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호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대천왕의 한 사람이 제왕성의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 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를 추종하는 무리 역시 한둘이 아니다. 그들의 가세는 위지천백이라는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셈이었다.
육풍원이 입술을 씹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갈수록 태산이군.”
독고무령 역시 영호진광이 제왕성 사람일지 모른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위지천백, 그는 대체 얼마나 더 많은 힘을 숨기고 있단 말인가?’
더 큰 문제는, 도왕 외에도 위지천백에게 또 다른 한 수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가.
새삼 위지천백의 무서움을 실감한 독고무령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무심한 표정을 되찾고 이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사혁에게서 긴급한 소식이 전해졌다고 들었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시오.”
“분노한 노태군이 은룡산장의 모든 무사들을 동원해서 어제 오후 늦게 서연을 쳤습니다.”
“뭐요?”
경악성을 내지른 독고무령의 이가 절로 악물렸다.
하루는 그냥 지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너무도 중요한 싸움이 일어났다.
잃어버린 하루.
그것은 도왕 영호진광이 제왕성 사람일 거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변수였다.
“결과는?”
“서연에 있던 자들이 미리 알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여서, 결국 노태군은 빈집을 차지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제왕성이 무조건 물러갔다고?”
독고무령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자신이 아는 위지천백은 불리하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자가 아니다. 설령 위지성이 위험에 처했다 해도.
더구나 사대천왕 중 하나인 도왕마저 영입한 마당에 겁날 것이 뭐가 있을 것인가.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는?”
“오늘 새벽에 서연에서 들어온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만…….”
“말해 보시오.”
독고무령이 서두르며 묻자, 이호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풍장에 있던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셋으로 나뉘어서 서쪽 오 리 지점에 방어진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방어진?
평소라면 당연하게 생각될 일이었다.
적절한 방어진은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데 훌륭한 벽 역할을 한다. 한곳이 공격받는다 해도 나머지 두 곳이 협공하면 거꾸로 적을 무찌르기에도 좋았다.
과거 무천련은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엄청난 피해를 봤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공방의 전법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속전속결! 협공을 당하기 전에 강력한 힘으로 한쪽을 무너뜨린다면, 방어진은 자칫 힘을 분산시킨 결과만 가져올 뿐이야!’
제왕성에는 속전속결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전력이 있다.
제왕기마군 말이다!
물론 자신이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정면충돌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하루를 잃었다는 게 너무 아까웠다. 만일 전날 이 일을 알았다면 그에 맞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거늘.
그렇다고 해서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가 직접 서연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대기해 주십시오.”
육풍원이 염려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회주가 직접 갈 필요 있나?”
나호민도 같은 생각인지 한마디 했다.
“맞소이다. 회주는 이곳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조율하고, 그런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도록 하는 게 좋겠소이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적의 감시가 심해져서 밀호방의 정보원이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가 가지 않고 암천회의 사람 중 고수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보를 얻는 일은 무공만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가 전체 상황을 뒤흔들지도 모를 만큼 급박한 시기. 정보를 얻으면 그 자리에서 분석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야 했다.
“들어오는 소식을 듣고 움직이면 늦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동할 수도 없는 일. 일단 제가 몇 사람과 함께 가서, 보다 정확한 상황을 직접 파악해봐야겠습니다.”
사실은 정보를 얻는 일 외에 다른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펄쩍 뛰며 말릴 게 분명했으니까.
독고무령은 단호한 어조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답답하시겠지만, 참고 기다리다 보면 때가 올 거요. 내일일 수도 있고 모레일 수도 있지요. 그때까지는 힘을 기르는데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시진 후.
독고무령은 진사혁과 한무종, 관조운, 전유곤, 사공화정만을 대동한 채 백천산 계곡을 나섰다.
자신은 인피면구를 쓰고, 다섯 사람은 나름대로 모습을 바꾼 채.
비록 다섯이지만,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다. 급박한 일이 생겨도 자신들의 목숨 정도는 챙길 수 있는 고수들.
* * *
독고무령의 추측은 단순히 추측으로 그치지 않았다.
백천산 계곡이 긴장으로 물들 무렵, 서연 일대에 혈풍이 몰아쳤다.
선두는 사백 필의 말을 탄 제왕기마군이었다.
그들은 단숨에 서북부의 방어진을 두 쪽으로 쪼개며 은룡산장의 방어망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위지성이 이끄는 삼백무사가 그 뒤처리를 했다.
마치 하루 만에 모든 싸움을 끝낼 것 같은 기세!
뒤늦게 제왕성의 공격을 전해들은 노태군은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으로 하여금 구구객을 이끌고 지원하게 했다.
그들의 무력은 가히 공포였다.
질풍노도처럼 달리며 전장을 휩쓸던 제왕기마군이 그들에게 막혀 피를 뿌렸다.
위지성이 이끄는 삼백 무사도 두 번째 방어진을 무너뜨리려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만약 영호진광과 두어 명의 고수가 제때 나타나서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을 막지 못했다면, 전세가 거꾸로 역전되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제왕성의 공격이 시작된 지 두 시진.
양측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제왕성과 은룡산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독고무령이 전장의 소식을 들은 것은 해수촌을 지날 무렵이었다.
“양측 합해서 사백 이상이 죽고,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팔호의 보고에 독고무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쉬웠다. 서둘러 나섰는데도 한 발 늦었다. 직접 상황을 봤으면 더 좋았으련만.
“노태군이 직접 나섰소?”
“아닙니다. 다만……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이 제왕성의 무사들을 도살하는데, 도왕이 나타나서 한판 붙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승부를 못낸 것 같습니다.”
“혈왕은 나타나지 않았소?”
“그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상황을 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귀천사사가 모두 나타났다. 그런데도 혈왕이 나오지 않았다면 노태군의 뜻이라고 봐야 했다.
독고무령은 아직 혈왕의 정확한 모습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 한 사람에게만 신경을 쓸 수도 없는 일.
그는 일단 혈왕에 대한 것은 자신이 직접 알아보기로 하고 팔호에게 물었다.
“현재 상황은?”
“제왕성은 대우 근처까지 물러나고, 은룡산장은 세 개의 방어진을 두 개로 줄였습니다.”
‘그 정도 피해를 입었다면 당장 두 번째 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군.’
연이어서 정면대결을 벌인다면 누가 이긴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터. 그러한 싸움이 자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노회한 두 사람이 왜 모르겠는가.
더구나 무천련의 잔당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암천회와 천룡방에게 이미 뒤통수를 한번 맞지 않았던가.
전력을 재정비하고, 적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계획을 세워서 공격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짧으면 닷새, 길면 열흘.
적의 상황을 살피기에는 적절한 상황이고 시간이다.
“그대는 양쪽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백천산에 전해주시오.”
“예, 회주.”
독고무령은 팔호에게 두어 가지 명령을 더 내리고 곧장 서연으로 향했다.
* * *
노태군은 입을 꾹 다문 채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혈왕과 사령귀안과 백골마존, 헌원조와 적수천, 구구객을 이끄는 세 명의 대주, 삼군과 삼단의 수장 중 네 명 등 은룡산장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어디 고수가 이들뿐이던가?
자신을 암중 호위하는 호법들도 제왕성의 장로들과 능히 자웅을 겨룰 정도의 고수들이다.
게다가 밖에는 그의 말 한마디에 죽음을 불사할 수하들이 팔백이나 된다. 평균 무위에서 제왕성의 정예를 압도하는 최고의 정예들이.
그런데도 제왕성에게 계속 당하기만 하자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방법을 생각해 봐라! 위지천백의 목을 자르고 심장을 꺼낼 방법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