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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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4화
164화
제4장 아버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
독고무령은 백천산을 떠난 지 정확히 이틀하고도 네 시진 만에 북경성을 앞에 두었다.
북경성 내에선 무기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했다.
성문 밖 포목점에서 봇짐을 하나 산 그는 검을 봇짐 안에 감추고 성문을 통과했다.
일단 성 안으로 들어선 그는 곧장 서북쪽으로 향했다.
막위지가 만나보라 한 사람은 백화명이었다. 그는 생부인 백장명의 형으로, 제왕성의 주인이 바뀔 당시 한림원의 시강학사(侍講學士)였다고 했었다.
그의 집이 정확히 어딘지는 몰랐다. 백화명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행방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깨끗한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서북로에 들어서자, 독고무령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혹시 백화명이라는 분이 어디에 사시는지 아십니까?”
십여 명을 잡고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그 이름조차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독고무령은 포기하지 않고 일대를 돌아다니며 계속 물어보았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자, 석양이 북경성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북로 일대를 세 번이나 돈 독고무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조부인 백이가 대학사였고, 그 아들도 시강학사에 있었다 했다. 그렇다면 황궁의 관리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로 인해 자신의 움직임이 동창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후우, 일단 오늘만 찾아보고, 안 되면 그렇게라도…….’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젊은이, 자네가 조금 전부터 백화명이라는 사람을 찾고 다녔는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주름진 눈꺼풀을 힘들게 밀어 올리고 독고무령을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우리 아들이 그러던데, 백화명을 찾는 젊은이가 있다고 말이야. 자네 아닌가?”
“예, 제가 맞습니다.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는가?”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알아볼 게 있어서라…….”
말꼬리를 길게 끈 노인은 경계의 눈빛을 띤 채 독고무령을 살펴보았다.
독고무령은 앞에 있는 노인이 백화명에 대해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름도 알고 있을 터. 그는 작심한 듯 또 하나의 이름을 마저 꺼냈다.
“혹시 백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노인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백이라면, 오래 전에 돌아가신 대학사 말인가?”
“백화명이란 분이 그분의 아들이어서 찾으려는 겁니다. 어디에 사시는지 아시면 가르쳐 주시지요.”
“무슨 관곈데,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찾는가?”
백이는 조부고, 백화명은 백부다.
하지만 그걸 밝히려니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독고무령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직이 말했다.
“저와 아주 가까운 분들입니다.”
노인은 한참 동안 독고무령을 바라보더니, 뭘 봤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백이 어르신과 제법 닮았군.”
독고무령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백가의 핏줄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조부인 백이와 닮았다는 말을 듣자 저릿한 충격에 몸이 떨렸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노인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사람을 다루고 지휘해본 사람이었다.
노인은 독고무령의 반응과 눈빛을 보고, 독고무령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았다.
“따라오게. 여기서 말하기는 좀 뭐하구먼.”
한 시진 후.
독고무령은 북문 쪽에 있는 낡은 장원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말이 장원이지 일반 사합원 건물에 마당이 조금 넓은 정도였다.
과연 이곳에 그분이 살고 있을까?
그는 숨을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탕탕!
두어 번 반복해 두드리자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독고무령이 물었다.
“혹시 이곳이 백화명이라는 분의 집이 아닙니까?”
잠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독고무령은 여인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곧 여인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문 바로 안쪽에서 들렸다.
“누구신데……?”
여인의 심장박동이 귀에 천둥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여인의 숨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독고무령은 갈색 칠이 벗겨져 허름한 나무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백…… 장명이라는 분 때문에 산서에서 왔습니다.”
“…….”
또다시 여인의 입이 닫혔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끼이익.
문이 조금 열리는가 싶더니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인은 오십 전후로 보였는데, 의혹과 놀람이 범벅된 표정이었다.
“방금…… 백장명이라고 했나요? 공자가 어떻게 그분을 아는 거죠?”
뭐라고 하지?
갑자기 대답이 턱 막혔다.
이를 악문 독고무령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는 분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화명이란 분이 계시다면 좀 만나고 싶습니다만.”
여인은 독고무령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들어와요.”
백화명은 독고무령을 보고 한참 동안 말을 잊었다.
그는 독고무령이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련님의 일로 왔대요.”
부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굳이 그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독고무령이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동생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이십 수 년 전에 산서에서 행방이 사라진 장명이가.
“독고무령이라 합니다.”
그는 독고무령이 인사를 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장명이와는 어떤 관계더냐?”
독고무령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알고서 묻는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분은…… 저의 생부이십니다.”
백화명은 당장 일어나서 독고무령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든 이상한 생각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생부? 한데 왜 성이 독고지? 양부라도 모신 것이더냐?”
양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아버지를 양부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저에게는 양부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있을 뿐이지요. 한데 그 아버지의 성이 독고이니 저 역시 독고 성을 쓸 수밖에요.”
백화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을 보고 단번에 동생의 아들임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해서 생긴 아들인지는 상관없었다.
백가의 핏줄이라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동창에서 받은 고문의 충격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그에게는 앞에 있는 청년이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청년이 독고라는 성을 고집한다. 백씨가 아니라. 거기다 양부가 아닌 친부처럼 칭하면서.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화가 났다. 흥분했던 만큼 불만이 커졌다.
가슴의 두근거림도 순식간에 가라앉고, 깊은 곳에서 아집이 꿈틀거렸다.
“왜 백씨 성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독고무령은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독고라는 성을 버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하지만 독고무령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백화명은 그것이 더 화가 났다.
“그럼, 왜 나를 찾아온 것이더냐?”
“황궁에 계셨다고 해서, 알아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비록 황궁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나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황궁의 일을 떠벌릴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화가 잔뜩 난 목소리.
“여보…….”
옆에 있던 부인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그래도 백화명은 굽히지 않았다.
“당신도 알잖소? 황궁의 일을 발설하는 게 어떤 죄인지.”
“그래도 도련님의 아들인데…….”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오. 앞에 있는 청년의 말을 못 들었소? 자신은 백가의 아들이 아니라 독고 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라잖소?”
백화명은 부인에게 말하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끝까지 백가의 핏줄임을 인정치 않는 독고무령이 괘씸하기만 했다.
차라리 찾아오지나 않았으면 모르고 살 것을. 한껏 들뜨게 만들어놓고 찬물을 뿌리다니. 감히 핏줄을 거부하다니!
독고무령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백화명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독고의 성을 가진 제 아버지는 저를 살리기 위해서 십오 년간의 자유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지요. 저는 부인과 부인의 뱃속에 든 아이조차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분보다 그분을 더 사랑합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굳이 더 이야기를 나눌 것이 없을 것 같군요.”
핏줄보다 더한 것이라 해도 아버지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까지 그의 삶에 있어서 핏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화명은 검버섯이 핀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며, 허리를 숙이는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허리를 편 독고무령이 몸을 돌리자 버럭 소리쳤다.
“거기 앉아!”
독고무령은 잠시 시간을 두고 돌아섰다.
백화명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씰룩이며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최소한 뭘 물어보려고 했는지는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순전히 핑계였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비록 독고라는 성을 고집하긴 해도, 어쨌든 백가의 핏줄인 것만큼은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더구나 독고무령이 말한 ‘독고’ 성을 가진 아버지의 일은, 간략하게 들었음에도 그조차 가슴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는 독고무령이 자리에 앉자,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싸늘하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네 아버지라는 사람이 너를 위해 죽었다는 게?”
“그분이 있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핏덩이로 죽어갔을 저를 그분이 받아내고 살려주셨지요. 자신의 평생 자유를 담보로 말입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 저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냐?”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을 전부 말해줄 순 없었다.
그래도 일부는 말해줘도 괜찮을 듯 싶었다.
자신이 독고 성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감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선 감옥의 간수였지요. 아버지께선 어머니가 저를 낳자, 저를 살리기 위해…….”
그는 고문기술자라는 말을 간수로 돌려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백화명과 그의 부인은 한동안 입을 닫지 못한 채 석상이 되어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고요.”
독고무령은 간략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입을 닫았다.
백화명도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기에 독고무령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으으음. 어찌 그런 일이……. 허어, 거 참…….”
이마를 찡그린 그는 신음처럼 침음성을 흘리며 탄식했다.
반면 그의 부인은 목 메인 목소리로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그런 분이 있었다니. 에구, 그렇게 힘들게 살고도 이렇게 의젓하게 큰 걸 보니 정말 대단하구먼……. 아암, 그런 분이라면 진짜아버지처럼 생각할 만도 하지.”
“어허……!”
백화명은 불만인 표정으로 부인을 흘겨보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 역시 독고무령의 마음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좋다. 사정이 그렇다면, 나도 인정해주마. 단, 네가 백가의 핏줄인 것 또한 분명하니, 그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독고무령이 부정한다고 해서 바뀔 것도 아니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훗날 자식이 생기면 백가의 대를 잇도록 할 수 있겠느냐?”
둘을 낳을 경우 하나는 백씨 성을 잇게 하면 된다.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미리부터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그제야 백화명의 끓어오른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가 끊긴 거라 생각했거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핏줄이 찾아왔다.
백화명은 조상을 뵐 면목이 없어 항상 죄스럽고 답답했는데,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