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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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8화
148화
불안한지 구양조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곳 역시 안전하지 않을 것 같네.”
운양도 모르지 않았다. 그 역시 은신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문제는 적이 가까이 와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당장 움직이면 적의 이목에 걸릴지 모르는 상황.
그러나 적이 코앞까지 닥치면 그나마 남은 작은 기회마저 사라질지 모를 일…….
잠시 생각하던 운양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움직이기로 했다.
“할 수 없군요. 뒷문 쪽으로 빠져나가지요. 밖으로 나가면 거리를 두고 따로따로 떨어져서 움직여야 합니다. 저들이 우리의 인상착의를 알지 못한다면, 개개인이 일반 양민처럼 움직이는 게 더 안전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들이 얼굴을 알 경우, 적의 칼 앞에 목을 내놓는 거와도 같다.
그래서 여태 망설인 운양이었지만,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는 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으음, 알겠네.”
구양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인을 쳐다보았다.
구양조의 부인 손씨는 창백한 표정으로 구양조에게 다가갔다.
“너무 걱정 마시오, 부인.”
“저보다 당신이 더 걱정이에요.”
구양조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운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먼저 가겠네.”
“일단 제가 먼저 바깥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운양은 문을 열고 재빨리 밖을 살폈다. 저만치 태연한 자세로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자가 보였다.
“지금 뒷문 쪽은 어떻소?”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자가 좌우를 둘러보고 대답했다.
“아직 뒤쪽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운양은 그의 대답에 방을 나서서 뒷마당 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뒷마당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운양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구양조 부부가 손을 맞잡은 채 훌쩍 몸을 날려 내려오고, 곧 여량삼호가 내려와 합류했다.
“가시지요.”
운양은 주위를 살피고는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어딜 가려고!”
냉랭한 일갈과 함께 네 명의 흑의장한이 담장을 넘어왔다.
동시에 쾅! 소리가 나며 뒷문이 부서졌다.
운양은 급급히 물러서서 좌우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 사이 여량삼호가 황급히 구양조 부부의 앞을 가로막고 무기를 빼들었다.
“물러서십시오!”
어금니에 힘을 준 운양의 눈이 뒷문으로 향했다.
부서진 뒷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회색 눈의 장한, 제왕밀전의 이령주인 남호종이었다.
“흐음, 겨우 잡았군. 다행히 전주를 뵐 면목이 생겼어.”
제왕밀전의 누구보다 추적술에 능한 그였다.
그는 몇 가지 흔적만으로도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자들의 움직임이 북쪽으로 향한 걸 눈치 챘다.
그 사실을 안 그는 일일이 수소문하며 전진하는 것은 삼령과 사령에게 맡겨놓고, 거꾸로 북문에서부터 탐색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북문로를 탐색한 지 이 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골목 근처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흑도의 건달 하나가 보였다.
그는 곧장 그자를 붙잡아서 아혈을 제압한 후 손가락을 모조리 꺾어버렸다.
건달은 잠깐도 참지 못하고 무조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아혈을 풀어주자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몇 사람이 객잔에 숨어 있다는 것. 자신은 그들을 위해 골목 입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까지.
그걸로 상황은 이미 끝난 거와도 같았다.
남호종은 회색 눈을 번들거리며 뒷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구양조에게서 시선을 멈추고 조소를 지었다.
“철검보의 구양조, 맞나?”
여량삼호가 검과 도를 앞으로 뻗으며 악문 잇새로 말했다.
“쉽지 않을 것이다.”
남호종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치워라.”
그의 입에서 짤막한 명이 떨어진 순간, 흑의장한들이 튕기듯이 나아가며 여량삼호를 덮쳤다.
쩌저정! 따당!
찰나 간에 흑의장한들과 여량삼호의 도검이 뒤엉켰다.
그 사이 운양은 슬그머니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남호종이 운양을 뜻을 눈치 채고 피식 웃었다.
“쥐새끼가 어딜 도망가려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객잔 쪽에서 두 사람이 훌훌 떨어져 내렸다.
대경한 운양은 발을 엇갈려 밟으며 옆으로 이 장가량 물러났다.
객잔 쪽에서 떨어져 내린 자들은 멈칫하며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운양이 좌우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자신들의 공격권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남호종은 기광을 번뜩이며 운양을 바라보았다.
“괴이한 신법을 쓰는 놈이군. 네놈은 누구냐?”
운양이 양유대력을 전력으로 끌어 올리며 되물었다.
“알아서 뭐하게, 개눈깔?”
개눈깔?
“이…… 건방진 놈이…….”
남호종의 가늘어진 회색 눈에서 서서히 살광이 흘러나왔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운양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곱게 죽기 싫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애송이.”
“흥! 글쎄, 혹시 내가 아니라 개눈깔이 죽을지 누가 알아?”
“모르면 내가 직접 알려주마.”
순간, 남호종이 삼 장의 거리를 일보에 좁히며 두 손을 휘둘렀다.
운양도 전력을 다해 두 손을 떨쳤다.
콰광!
두 사람의 경력이 정면으로 부딪치자 운양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크윽, 지미……. 무공을 좀 더 열심히 수련했으면 저 개눈깔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반면 남호종도 두 걸음을 물러서서 의외라는 표정으로 운양을 바라보았다.
“큰소리치더니 한 수가 있었군.”
그 사이 여량삼호 중 셋째인 여문정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크윽.”
“셋째야!”
그러잖아도 흑의장한들과의 싸움에서 약세를 보이던 여량삼호였다. 한 사람이 빠지자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흑의장한들은 손을 늦추지 않고 여량삼호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삼 초가량 흐를 무렵, 흑의장한의 검이 여량삼호 중 둘째인 여호정의 검을 옆으로 비켜 쳐내며 가슴에 꽂혔다.
쩌정! 퍽!
“허억!”
신음을 삼킨 여호정은 혼신의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쉭!
방심하고 있던 흑의장한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있던 운양이 뒤로 물러서는 흑의장한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흑의장한이 운양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부드럽게 느껴지는 장력이 옆구리에 꽂힌 후였다.
퍽!
장력은 부드러웠지만, 그 위력까지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크윽!”
흑의장한은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진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여우같은 놈이!”
자신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분노한 남호종이 시퍼렇게 변한 쌍장을 앞세운 채 운양을 덮쳤다.
운양은 미리보(迷離步)를 펼쳐서 남호종의 공격을 피하면서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속이 울렁거려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상대하기에는 남호종의 공세가 너무나 강했다.
운양은 더 피하기가 힘들어지자, 이를 악물고 남호종의 장력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콰과광!
‘크으윽!’
심장이 터질 것처럼 저릿했다. 숨이 콱 막히고, 당장이라도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운양은 악착같이 참고 뒤로 몸을 튕겼다.
“흥! 여우같은 놈! 이번에는 어림없다!”
남호종이 코웃음을 치며 독수리처럼 날아 운양을 덮쳤다.
그가 손을 홱 뒤집어 떨치자, 시퍼런 장력이 운양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운 소협!”
그때 구양조가 남호종의 옆을 쳐갔다.
한 손밖에 쓸 수 없는 그다. 게다가 내공의 칠 할을 잃은 상태. 그의 공격은 남호종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남호종은 우수로는 운양을 치고, 좌수로는 구양조의 공세를 막았다.
쾅! 떠덩!
“흡!”
“커억!”
덕분에 충격이 줄어든 운양은 땅바닥을 세 바퀴 구르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문제는 구양조였다.
구양조는 남호종의 일장에 뒤로 훌훌 날아갔다.
“여보!”
손 부인은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구양조를 받아들었다.
그녀 역시 무가의 여인으로서 강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닌 터였다. 그녀는 남호종의 공세에 튕겨진 구양조를 받아들고는,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몸을 세웠다.
그때 남호종이 또다시 소리쳤다.
“저놈 잡아!”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른 운양이 벌떡 일어나더니, 담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어림없다!”
“감히 어디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흑의장한이 운양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검을 뻗었다.
멀쩡해도 한 사람을 상대하기 힘든데, 두 사람이 달려든다.
앞은 담장, 옆에는 개눈깔이 막고 있다.
피할 곳도 없는 상황. 영락없이 검에 꽂힐 상황이다.
운양은 두 사람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하며 욕을 퍼부었다.
“비겁한 놈들! 개눈깔만큼이나 재수 없는 새끼들!”
그 소리에 남호종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목숨만 살려놓으면 된다! 팔다리를 잘라버려!”
두 명의 흑의장한은 악독한 눈빛을 번뜩이며 운양의 팔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손발이 둔해진 운양이 피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끝내 몸 여기저기에 검기가 스치며 살이 쩍쩍 갈라진다.
운양은 바닥을 구르며 어떻게든 공세의 권역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순간!
어둠을 뚫고 번쩍! 두 줄기 뇌전이 떨어졌다.
진저리가 쳐지는 위력의 뇌전!
눈앞이 아득해진 운양은 문득 독고무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끝인가? 그 친구의 얼굴이라도 보고 죽었으면 덜 억울할 텐데…….’
독고무령 일행은 북문로를 향한 동선을 타고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건물을 타넘고 장원을 가로질렀다.
독고무령의 감각에 기이한 움직임이 느껴진 것은, 그렇게 삼백여 장을 쉬지 않고 이동한 후였다.
상당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 어느 한곳을 향해 움직인다.
언뜻 느껴지는 것만도 이삼십에 이른다.
자신들이 지닌 기운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낸 자들.
현재 태원에서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제왕성의 무사들뿐이다.
독고무령은 모든 감각을 집중해서 일대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싸늘한 눈빛으로 한곳을 바라보더니 신형을 날렸다.
상당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 골목 안으로 빠르게 몰려간다.
제왕성의 무사들이다. 그들 중 절정에 이른 자만도 서넛은 되는 듯하다.
문제는 그들이 몰려가는 안쪽에서 제법 강력한 기운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양, 조금만 기다려라!’
단 세 번의 도약으로 두 채의 집과 북문로를 건넌 독고무령은 제왕성의 무사들이 들어선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
“웬 놈이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며 독고무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독고무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로막은 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취접라와 귀월인이 절묘하게 조화된 일수.
일개 제왕밀전의 수하가 막기에는 너무나 빠른 수법이었다.
번개처럼 상대의 목을 움켜쥔 독고무령은, 손에 쥔 자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리고는 땅을 박찼다.
우직!
“끄으!”
그곳에 있던 흑의장한은 하나가 아닌 네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워낙 빨리 벌어진 일이다 보니 나머지 흑의장한들은 손도 쓰지 못했다.
그때 독고무령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온 호위무사대가 그들을 덮쳤다.
독고무령은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면만보며 달렸다.
스릉! 챙!
앞쪽에 있던 두 명의 무사가 무기를 빼들고 앞을 막아섰다.
땅을 박찬 독고무령은 검을 빼며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쉬이익!
어둠속에서 한 줄기 시퍼런 벼락이 번쩍인 순간!
앞을 막아선 흑의장한들은 도검과 몸이 한꺼번에 베어진 채 사정없이 튕겨져 버렸다.
독고무령은 두 사람을 단 일검에 떨치고는 오 장 허공으로 떠올랐다.
담장 너머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석으로 몰린 운양의 온몸이 피로 젖어 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지경!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뻗었다.
순간, 두 줄기 벼락이 어둠을 관통하며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운양의 귀청에서 죽기 전에 보고 싶었던 친구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뒤로 물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