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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144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5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144화

 

144화

 

 

 

 

 

 

* * *

 

 

 

전쟁이 벌어진지 사흘 후.

 

암천회와 천룡방의 무사들이 백천산의 산골마을에 모두 모였다.

 

그들은 긴장감을 떨치려는 듯 수련에 열중했다.

 

우현에서의 전쟁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자신들 역시 언제 어느 때 그 지옥에 누워있는 자와 같은 신세가 될지 모르는 일.

 

그들은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동강나고, 내장을 쏟아낸 처참한 모습으로 지옥 속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강해진 자만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만한 표정이던 도정환과 사중인도 그랬고, 심지어 장만익과 북리사웅조차 자신들이 지닌 무공을 점검하며 몸의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그렇게 백천산이 무사들의 땀으로 젖어드는 동안에도, 독고무령은 운양에게서 제왕성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제왕성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다는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소수의 무사들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 그 정도 일이야 항상 있어왔던 일이어서 특별히 의심할 것도 없었다.

 

의외의 침묵.

 

그것이 더 마음에 걸린 독고무령은 운양에게서 소식이 올 때마다 그가 보낸 서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행여나 자신이 놓친 것이 없는지.

 

오늘만 해도 그랬다.

 

조금 전 이호가 가져온 서신만 해도 석 장이나 되었는데, 그는 지금 세 번째로 훑어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세 번을 훑어봐도 어떤 조짐이 있을 법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소수의 제왕성 무사들이 태원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이 그나마 신경 쓰일 뿐.

 

‘절대 가만히 있을 위지천백이 아니다. 그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히 준비하겠다는 뜻. 문제는 공노명이 말한 것이 진정 위지천백의 전부냐 하는 것…….’

 

공노명은 자신이 묻는 것에 대해 순순히 말했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공노명 정도 되는 사람이 고통에 굴복해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하기에 그가 열 중 여덟 정도만 말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은 그가 말한 것만도 훌륭한 정보였다.

 

문제는, 그가 말한 것 중 빠져 있는 그 ‘무엇’이 최후의 순간 결정적인 허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처럼 보이는 정보에서 빠져 있는 또 다른 무엇.

 

과연 무엇이 빠져 있는 것일까?

 

그것은 독고무령조차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한두 가지는 더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지만 이미 지난 일. 

 

독고무령은 일단 생각을 접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호를 바라보았다.

 

“일단 은룡산장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손을 써야겠소.”

 

“말씀하시지요, 회주.”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아직 귀원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해도, 그곳에 소식을 전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 귀에 들어갈 것이오. 가서 적수천이라는 자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고 날짜를 받아오시오.”

 

“예, 회주.”

 

 

 

* * *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은룡산장의 내실은 살얼음이라도 덮인 듯 긴장이 흘렀다.

 

노태군은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 찻잔을 느긋이 들며 물었다.

 

“제왕성이 왜 조용하다고 보느냐?”

 

그의 앞에는 헌원조와 적수천이 앉아 있었다. 군호광은 내상이 심해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창백한 안색의 헌원조가 겨우 입을 열었다.

 

“본장이 당분간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 동안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위지천백이 정말 그렇게 생각할 거라 보느냐?”

 

헌원조는 바로 대답을 못했다. 그는 이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적수천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들 역시 일천이 넘는 무사를 잃었습니다. 당장 움직이고 싶어도 무천련의 잔당들이 걱정되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호홋, 너희들은 위지천백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어.”

 

노태군이 웃으며 말했지만, 두 사람은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장난처럼 들리는 웃음 속에 칼날이 스며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내가 아는 위지천백은 무사 일천이 죽었다고 해서 기가 죽을 놈이 아니니라. 더구나 죽은 놈들 중 태반은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놈들이 아니더냐?”

 

“하오면, 아버님의 생각은 무엇인지요?”

 

헌원조의 물음에 노태군은 광망을 번뜩이며 붉은 입술을 벌렸다.

 

“놈은 기다리고 있을 게다. 내가 직접 산서로 오기를 말이다. 해서…… 나는 그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다.”

 

헌원조와 적수천이 다급히 말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아버님!”

 

“놈의 계책에 휘말려들 수 있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진정으로 노태군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말리는 것이 아니었다.

 

노태군이 직접 나서면 자신들은 일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싫었다.

 

하지만 노태군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클클, 놈은 나를 나이만 먹은 한물 간 늙은이로 보고 있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나를 배신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놈에게 내 똑똑히 보여줄 것이니라! 아니 그놈뿐만이 아니라, 앞에서는 겁에 질려 허리도 못 피면서, 뒤에서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모든 놈들에게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려줄 거다!”

 

가히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눈빛!

 

헌원조는 노태군의 눈빛을 보고나서야, 자신의 양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랬던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천하를 가진 것처럼 당당했던 당신도, 결국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건가?’

 

그런 마음이 들어서 그런지, 헌원조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노태군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그때 노태군이 사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아가 곧 출관할 거다. 그 아이가 출관하면, 역도 위지천백의 목을 치러 갈 것이니, 너희들은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이번에도 실패하면 내 더 이상 용서치 않을 것인즉…….”

 

순간, 헌원조와 적수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난 이십 년 간 열두 명의 아이가 은룡산장에 들어왔다.

 

그 아이들은 차례대로 혈왕동에 들어갔고, 마지막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칠 년 전에 들어온 ‘천아’라 불리는 막내였다.

 

문제는 자신들조차 혈왕동의 비밀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태군은 그저 선택된 자가 아니면 들어가 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만 했다.

 

혈왕동에 들어가서 열한 명이 죽었으니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그 안에 무슨 비밀이 있기에 자식들에게조차 숨기는 거란 말인가!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일뿐.

 

“예, 아버님.”

 

노태군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태군은 헌원조와 적수천이 나간 방문을 일각가량 바라보고 나서야 나직이 물었다.

 

“소한, 천아는 지금 어떤 상태더냐?”

 

뒤쪽의 휘장 안에서 소한의 대답이 들려왔다.

 

“구 단계를 넘어서서 혈마단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사옵니다.”

 

“호, 그래? 어디 가보도록 하자.”

 

“예, 주군.”

 

 

 

한 아름 크기의 핏빛 향로가 사면에 놓인 지하석실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향로에서 흘러나와 허공을 떠다니는 붉은 연기 때문이었다.

 

석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석 자 높이의 석대 위에는 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사이할 정도의 붉은 연기는 그 청년을 중심으로 천천히 휘돌고 있었다.

 

이제 스물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석대 위에 앉아 있는 청년은 옥으로 빚은 듯 하얀 살결에 영준한 얼굴을 지닌 절세의 미남자였다.

 

“후우우우…… 후으으읍…….”

 

청년이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주위를 휘돌던 붉은 연기가 진저리를 치듯 출렁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청년의 모습이 붉은 연기에 가려져서 희미한 잔상만 남았다.

 

그때부터 석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 연기가 청년의 몸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진정 사이하고도 기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석실 밖에서 바라보던 노태군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웃음을 지었다.

 

“호호홋, 이제 거의 다 되었군.”

 

“혈마단은 물론이고, 마혈로(魔血爐)에 든 혈왕분(血王粉)의 기운까지 내일이면 완벽하게 흡수될 것입니다, 주군.”

 

“좋아, 아주 좋아! 구 단계에 오르지 못한 상태로 강행을 해서 걱정했는데, 아주 순조롭군.”

 

“모든 게 주군의 덕이 아니겠사옵니까?”

 

“흘흘흘, 소한, 네가 그런 아부를 하다니, 어쨌든 기분은 좋구나.”

 

소한은 허리를 깊게 숙인 채 조용히 웃었다.

 

“감사하옵니다.”

 

“어쨌든 내일이면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넣게 되는구나. 흘흘흘, 위지천백, 어디 마음껏 날뛰어봐라. 내 귀여운 아이가 네놈의 심장을 취할 테니 말이다.”

 

노태군은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저 아이가 완성되면, 호광이가 내상을 치료할 겸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준비도 해 놓도록 해라.”

 

소한은 흠칫하며 노태군의 등을 바라보았다.

 

“혈왕분의 기운이 너무 강한데, 괜찮겠습니까?”

 

향로에서 태우는 혈왕분은 단순한 약가루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강호사의 극비 중 극비가!

 

더구나 혈왕분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은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그러나 노태군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 아이도 자질이 괜찮은 아이다. 혈왕분의 기운을 이용하면 소천이만은 못해도 괜찮은 물건이 하나 만들어질 거야. 호호홋.”

 

“알겠습니다, 주군.”

 

“그만 가자.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 하구나.”

 

소한은 그런 노태군의 뒤를 따라가며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붉은 연기는 청년의 몸으로 거의 다 스며든 상태였다.

 

‘내일 마지막 단계만 마치면…….’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소한의 눈에서 일순간 기광이 일렁였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노태군의 뒤를 따라서 지하석실을 벗어났다.

 

쿵.

 

두 사람이 지하석실을 나가고 석동의 문이 닫혔다.

 

그때였다.

 

거의 흔적만 남은 붉은 연기가 더 이상 청년의 몸으로 스며들지 않고 멈추었다. 그 직후, 죽은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던 청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흐으으…….”

 

괴이하게도 청년의 미간에 한줄기 파란 선이 그어졌다. 마치 뭔가의 경계를 가르듯.

 

갑자기 나타난 파란 선은 나타날 때만큼이나 빠르게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던 청년의 몸도 다시 고요를 찾았다.

 

끼이이익.

 

지하석실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소한이 다시 석실로 내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 후였다.

 

“크크크, 기다렸던 보람이 있었어.”

 

소한은 석대 위의 청년을 바라보며 억눌린 웃음을 흘렸다. 노태군 앞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던 희열에 찬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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