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2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2화
142화
순간, 오른쪽 휘장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위지천백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공노명이 죽었다면 우현의 일도 최악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안 그런가?”
“분명…… 그럴 것이옵니다. 하나 저들 역시 공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터. 그 정도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지 않사옵니까?”
분명 그랬다. 그러나 무조건 그리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들어온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우현의 적을 몰살시키고도 삼 할은 남아야 한다. 충분히 그 정도의 전력은 되니까. 그런데 분명 그리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용회, 그대가 볼 때, 그게 정상적이라고 보나?”
잠시 휘장 뒤에서 들리던 말이 끊겼다.
위지천백은 휘장 뒤에 서 있는 모용회의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곧 휘장 뒤에서 모용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주군께선 누군가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다고 보시는 것인지요?”
허공을 응시하는 위지천백의 두 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번뜩였다.
“공노명이 죽은 것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야.”
“현재 산서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자들은 무천련의 잔당들뿐입니다. 지리멸렬한 그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위지천백의 입가로 가느다란 웃음이 맺혔다.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웃음인데도, 그의 얼굴에는 정말 즐거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없다고도 못하지. 그가 내 생각만큼 뛰어나다면 말이야.”
“대체 누구를 생각하시기에 주군께서 그리 높게 평가하시는지요?”
위지천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독고무령이라는 자일세.”
“본성의 무사들이 암천사신이라 부른다는 자 말이옵니까?”
위지천백은 고개를 느릿하니 끄덕였다.
“그래. 노태군에게 신경 쓰느라 그들을 너무 소홀히 했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목소리에서 서리가 내리는 듯하다.
모용회도 얼어붙은 듯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위지천백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무려 두 시진 만이었다.
“어쨌든 이제부터 모든 일을 내가 직접 지휘할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해야겠지. 모용회, 네가 제왕밀전(帝王密殿)의 무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이번 일을 처리해라.”
“어느 선까지 해야 되는 일인지요?”
“일단 진상을 밝혀라. 그리고 무천련이 관련되어 있다면, 그들과 관계된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그 와중에 백이 죽든 천이 죽든 상관없다. 누구든! 그들을 돕는 자는 본성의 적임을, 산서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알려줘라!”
“존명!”
* * *
그 시각, 전서구가 붉은 전서통을 달고 은룡산장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곧 노태군의 방에서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서신이 놓인 탁자가 가루가 되어 그대로 주저앉고, 노태군의 가느다란 눈에서 혈광이 넘실거렸다.
“무천련의 잔당과 천룡방이, 제왕성과 우리 뒤를 쳤다고?”
그의 분노에, 대답하는 갈의중년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렇다 하옵니다, 주군! 그 바람에 대공자와 사, 오공자만이 삼십여 명의 수하와 함께 살아나왔을 뿐, 삼공자는 본장의 무사들과 함께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하옵니다.”
팔백이 넘는 숫자에서 삼십여 명이 살아남았다면 전멸이나 마찬가지.
노태군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던 혈광이 더욱 짙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제왕성과의 공멸이야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 정도의 희생도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무천련과 천룡방이 뒤에서 검을 들이댄 것은 결코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도 언제든지 검을 들이댈 것이 아닌가 말이다.
특히 천룡방의 북리중현이 아들까지 보내서 싸움에 끼어든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북리중현, 감히 헛된 욕심을 부리다니!”
노태군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오규를 닦달했다.
“천룡방에 공문을 보내라! 본좌가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다!”
갈의중년인, 노태군의 좌우시위 중 우시위인 오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주군.”
“만약에 놈이 본좌의 말을 무시한다면, 한단 근처의 위소(衛所)를 모조리 움직여서 천룡방을 에워싸도록 해라.”
오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주군, 그리하면 금의위가 기회라 생각하고 물고 늘어질 것이옵니다.”
“걱정하지 마라. 공격하지 않고 단순히 포위하기만 해도 놈은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니라.”
“하긴 그 정도라면……. 명대로 하겠사옵니다.”
노태군은 오규가 밖으로 나가자 즉시 소한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아무래도 천아의 연공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날이 밝으면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아라.”
소한의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예, 주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연공이 끝나면, 내가 천아와 함께 직접 산서로 갈 것인즉, 사사(四邪)에게 따라갈 준비를 해놓으라고 해라.”
소한의 눈에 일었던 흥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을…… 모두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반면에 노태군의 눈에서 번들거리던 혈광은 더욱 짙게 물들었다.
“위지천백도 분명 자신의 모든 힘을 드러낼 거다. 놈을 철저히 짓밟기 위해선 힘을 아낄 필요가 없다. 사사뿐만이 아니라 구구객까지 모두 데려갈 것이니라.”
“구구객이야 상관없사오나, 사사의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도…….”
“소한.”
노태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소한을 불렀다.
소한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속하는 그저 주군의 안위가 염려되어서…….”
노태군은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 만지며 말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삼십 년도 더 이전에 사라진 그들이다. 지금에 와서 사사를 알아볼 놈도 없을 테지만, 설사 그들의 정체가 알려진들 대수겠느냐? 강호의 천한 무부들 따위는 나를 조금도 위협할 수 없느니라.”
노태군의 말대로 별일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칫 엉뚱하게 일이 틀어지면, 그 일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아무도 모른다.
소한이 불안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소한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노태군이다. 조금 전만 해도, 내일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떤 벌이든 떨어졌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 나름대로 방책을 세우는 수밖에.’
* * *
독고무령 일행은 인적이 드문 산길을 이용해 계속 남하했다.
암천회의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며 따랐지만, 천룡방의 무사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특히 북리사웅은 불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 천오백 이상이 죽었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당장 자신들을 위협할 수는 없을 듯했다. 아니 위협은커녕 뒷수습하기에 정신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그토록 유리하거늘, 도망치듯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다녀야 하다니!
‘겁쟁이 같은 놈!’
그는 저만치 앞서서 움직이는 독고무령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불만을 터트리지는 못했다.
지금은 모든 상황을 독고무령이 지배하고 있었다. 불만을 말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독고무령도 천룡방 사람들의 불만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설명해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천룡방이 지금은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지만, 언제 돌아설지 아무도 모르는 일. 굳이 먼저 나서서 모든 것을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비밀은 비밀이었을 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다음 날 오후.
양천 동쪽 이십 리 지점의 산중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북리사웅이 더 참지 못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독고무령을 찾아가 불만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오? 굳이 이럴 필요가 있겠소?”
독고무령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간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소. 현재 우리 힘으로는 제왕성과 은룡산장, 어느 쪽도 상대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알기로는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 중 반이 이번 싸움에서 죽었는데,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잖소?”
북리사웅의 비아냥대는 말투에 육풍원이 즉각 반응했다.
“이제는 이동하는 것 가지고도 시비군. 싸울 때 누가 겁먹은 표정이었더라?”
육풍원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임을 북리사웅이 어찌 모를까.
육풍원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육 선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었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던데 말이야.”
“지금 저에게 모욕을 주겠다는 겁니까?”
육풍원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차갑게 맞받아쳤다.
“제왕성이 어떤 곳인 줄 아나? 산서의 사람들이 왜 제왕성을 두려워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나? 어제의 싸움에서 반이 죽었다고? 그래, 숫자는 반이 죽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제왕성의 전체 전력은 삼 할도 채 감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외부의 무사들이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북리사웅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신검룡 북리사웅, 그는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육풍원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도 않았다.
“흥! 그럼 제왕성이 본방보다 더 강하단 말입니까?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군요!”
“물론 그거야 나도 모르지. 다만 확실한 것은, 위지천백이 은룡산장과 싸우기로 작정했을 때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룡산장을 개 닭 보듯 하는 천룡방과는 확실히 다르지.”
제왕성과 은근히 비교하며 천룡방을 깔아뭉개는 육풍원의 말에 북리사웅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했다.
“그건…… 은룡산장이 황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봐 그랬던 것이지, 우리가 그들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좌우간, 중요한 것은 제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뭐가 어째? 회주가 겁을 먹어? 훗! 어제의 싸움을 보지도 못했나? 회주가 염려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수하들 때문이거늘. 쯔쯔쯔…….”
말싸움에서 밀린 북리사웅은 육풍원을 노려보기만 했다.
천룡방의 간부들도 분노가 끓었지만 막상 나서지는 못했다.
육풍원의 말이 크게 틀리지도 않은데다가, 자신들이 끼어들면 싸움이 커질 터, 조금도 득 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북리사웅도 속으로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왕성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겁쟁이들 같으니…….’
말다툼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새삼스런 눈으로 육풍원을 바라보았다.
‘육풍원이 칼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말싸움도 제법이네.’ 그런 표정을 한 채.
두 사람의 언쟁이 끝난 후에야 독고무령이 나섰다.
양천에서 더 내려가면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행동에 즉각적인 행동을 할 수 없을 터. 이제 방향을 틀 때가 된 듯했다.
“함께 다니면 적의 정보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지 모르니, 이제부터는 소규모로 조를 짜서 따로따로 움직여 백천산으로 가도록 하겠소.”
북리사웅이야 대환영이었다.
보면 볼수록 질시의 마음만 커지는 독고무령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고, 꼴 보기 싫은 육풍원과 헤어지는 것도 좋았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런데 백천산이 어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