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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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일개 낭인 주제에, 이름 좀 얻으니까 보이는 것이 없나!’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한마디 했다.
“아무리 육 선배님이라 해도 아버님과 저를 모욕하는 발언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 취소해 주시죠.”
범여종이 북리사웅을 거들며 육풍원을 몰아붙였다.
“육 선배, 지금 본방을 무시하겠다는 겁니까?”
그때다. 육풍원이 머리카락 펄럭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서 서리서리 번뜩이는 차가운 광채!
산서의 싸움귀신, 진정한 전마의 눈빛이다.
북리사웅과 범여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머리를 뒤로 뺐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육풍원은 그런 두 사람을 직시한 채 싸늘하게 말했다.
“전쟁을 겪어봤나?”
없다. 하북에서 누가 감히 천룡방과 전쟁을 벌이려 하겠는가.
물론 간혹 가다 마도의 무리나 신생세력들이 슬그머니 천룡방의 영역으로 들어올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명을 내리면 될 일. 직접 가서 자신들이 검을 들 것도 없었다.
그래도 밀리기는 싫은지 북리사웅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우리라 해서 놀고 지낸 줄 아십니까? 천룡방이라는 거대 방파를 지킨다는 것이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는 일인 줄 압니까?”
육풍원이 왜 모를까? 그는 같잖기만 했다.
“천룡방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것들이 지옥과 같은 전쟁터의 의미를 어떻게 알겠느냐? 무인답게? 흥! 곧 수백 명의 팔다리가 잘리고 시뻘건 핏덩이로 물든 땅을 밟고 싸우게 될 거다. 어디 어떻게 싸우는가 보자.”
“나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놈의 목도 쳐야 할 거다. 그래야 동료가 살 수 있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그, 그건…… 도리가 아니오.”
“도리? 크크크, 순진하기는. 그럼 그놈이 벌떡 일어나서 너의 목을 뒤에서 칠 것이다. 그때 가서 도리를 찾나 어디 지켜보지.”
비아냥거리는 육풍원의 말에 북리사웅이 벌건 얼굴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육풍원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모르면 까불지 마. 전쟁은 지옥이야.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적이 내 몸에 칼을 대기 전에 내가 먼저 적의 목을 베는 거. 알았나!”
“그건 궤변일 뿐…….”
육풍원의 눈빛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그의 주위로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릴 것 같았다.
“내가 왜 회주를 따르는지 아나?”
북리사웅은 이를 악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
육풍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북리사웅의 심장을 후볐다.
“그는 이기는 법. 그리고 살아남는 법을 잘 아는 거 같거든. 굳이 하나를 더 말한다면, 위선을 떨지 않는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북리사웅이 악을 쓰듯 외쳤다.
“흥!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오! 무사의 명예를 버리고 사는 삶이 뭐 대단하단 말이오?”
“훗, 역시 애송이군. 전쟁에서는 수하를 최대한 죽이지 않고 승부에서 이기는 수장이 최고인 법이다. 명예? 어디 그 명예가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지.”
육풍원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북리사웅은 고개를 돌린 육풍원을 노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그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겠다!’
제4장 혈전(血戰), 산 자만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칠십 리를 빠르게 달린 독고무령 일행은 말이 지쳐서 거품을 뿜어내자, 즉시 말을 버리고 경공을 펼쳤다.
계곡의 폭이 사오십 장은 되는데다 길이 완만해서 달리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이십 리쯤 갔을 때였다.
왼쪽 산 아래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밀호방의 사람이었는데, 전에 보았던 십일호였다.
“밀호방의 십일호가 회주님을 뵙습니다.”
독고무령은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지금쯤이면 서연에서 온 지원무사들이 싸움에 합류했을 것입니다.”
“우리 쪽 사람들은?”
“십 리 앞쪽에서 몸을 숨긴 채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주.”
“갑시다.”
십일호의 말대로 암천회의 장로 네 사람과 무천단, 전궁산장의 무사들은 십 리쯤 떨어진 곳의 작은 계곡에 모여 있었다.
두 번째 싸움이 벌어진 상황. 상황을 보고받으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독고무령이 도착하자 반색하며 반겼다.
독고무령은 그들과 간단하게 인사하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일원궁의 관조운. 그가 일원궁의 무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의외라면 그와 함께 온 무사들이 대부분 젊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많아 봐야 마흔 초반. 장로나 원로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숫자는 칠팔십 정도. 대신 하나같이 정예무사들이었다.
‘혹시 저들이 일원궁이 자랑한다는 일원단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독고무령은 그들을 가볍게 훑어보고 관조운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관 형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관조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남하하던 중 싸움이 벌어진 걸 알고 우현으로 접근하는데, 귀회의 사람이 알아보더군.”
다행이었다. 만일 일원궁이 그 싸움에 연관되었다면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졌을 것이었다.
“궁주님과 대공자는 좀 어떻소?”
독고무령의 물음에 관조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버님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 같고, 형님은 일이 년 더 몸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네.”
“관초악 대협은?”
관조운이 난색을 표하며 머뭇머뭇 말했다.
“그게 좀……. 숙부님은 이번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시네. 힘을 키운 뒤에 훗날을 기약하시겠다는 생각인가 보더군.”
장로인 호영검객 우종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복수할 마음이 없나 보군.”
천응조 막동이 코웃음 치며 넌지시 한마디 거들었다.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예 싸울 마음이 없나? 거참 이상하구먼.”
그들의 말대로 이상했다. 복수에 불타 있어야 할 그가 왜 나서지 않는 걸까?
힘을 길러 나중을 바라보겠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그렇다고 그 일로 관조운을 추궁할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두 장로의 추궁 아닌 추궁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관조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관 형은 무천련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관조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독고무령이 왜 묻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숨을 두어 번 쉬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느릿하니 대답했다.
“나는 일원궁의 사람으로서…… 아직 무천련의 해체를 인정할 수 없네.”
“그럼, 무천단의 존재도 인정하는 것이오?”
관조운의 두 눈이 독고무령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무천단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독고무령을 무천단주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 몇 달 사이 관계가 역전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흐름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에게 거부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관조운은 천천히 두 손을 맞잡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원기주 관조운이 무천단주를 뵈오.”
비록 잠깐 사이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의 세력 중 삼 할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라지만, 일원궁의 이백 년 저력은 단순한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일원궁의 실세로 부상한 관조운이 독고무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무천단의 일개 기주로서.
그 의미는 작은 것 같으면서도 컸다.
잠시, 분위기에 휩쓸린 군웅들이 입을 닫고 있을 때다.
설자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넌지시 물었다.
“험, 그 일은 그렇게 하고, 예상보다 늦은 것 같은데, 왜 이리 늦은 거요?”
“서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설자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곳에는 무슨 일로……?”
독고무령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왕성의 머리를 자르고 왔습니다.”
누가 그의 말뜻을 모를까?
일순간 경악이 파도처럼 밀려가며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설마…… 공노명을……?”
“맙소사…….”
“어떻게 그런…….”
“그게 사실이오, 회주?”
독고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곳의 일만 마무리 지으면, 제왕성의 손발 중 적어도 하나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은룡산장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귀에는 그 어떤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오늘 이후부터 저들이 우리를 알게 될 겁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음 놓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철저히 움직여야 합니다. 살아난 자만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법,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으시길…….”
독고무령의 나직한 목소리가 대지로 스며들 무렵이었다.
저 멀리 산 너머에서 연기가 솟구쳤다.
단절되어 떠오르는 하얀 연기.
마침내 계곡에서 벌어진 싸움이 최후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지요.”
독고무령의 입에서 짧은 명이 떨어진 그 시각.
암천단과 천룡방도 그 연기를 보았다.
육풍원이 거검을 움켜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모두 준비해! 회주가 먼저 치면, 정확히 반각 후에 우리도 공격한다!”
북리사웅도 입을 꾹 다문 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의 주역은 네가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독고무령! 떠돌이 늑대와 산중의 제왕 호랑이가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알려주마!’
* * *
일만 평에 달하는 계곡의 공지가 온통 시신으로 덮여 있다.
풀도, 나무도, 대지도, 바위도 시뻘겋게 물든 지 오래다.
머리가 잘리고, 배가 갈라지고, 사지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자들이 부기지수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담한 광경!
인간 세상에 지옥이 펼쳐졌다!
검을 뻗는 자도, 칼을 휘두르는 자도, 창, 륜, 극 등 온갖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잊고 오직 상대의 심장과 머리를 부수기 위해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급습한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우세를 보였다.
그대로 조금만 지나면, 제왕성 무사들을 모조리 짐승들의 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각가량이 지날 때까지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삼백여 명의 적들이 나타났다.
은룡산장 무사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었다.
무천련의 잔당들이 막았을 거라 생각했던 적의 지원무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반면 제왕성의 무사들은 하늘이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했다.
“지원무사가 왔다! 모두 놈들을 공격하라!”
“죽여라! 지금까지 당한 것을 놈들에게 돌려줘라!”
그들은 후퇴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꺼져가던 불씨에 기름이 던져진 꼴. 또다시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며 계곡을 뒤덮었다.
죽이고 죽고, 죽이다가 죽고…….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앞에 있는 적을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일 뿐이었다.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 헌원조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도저히 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후퇴해서 남은 사람들만이라도 살려야 한다.
적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양패구상하자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후퇴를 알렸다.
“모두 돌아가…….”
그때였다.
적의 지원군이 온 방향에서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 헌원조는 그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적이라 생각했던 자들이 갑자기 적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
후퇴를 알리려던 그의 입이 얼어붙었다.
‘무천련의 잔당들!’
순간 헌원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자신들 역시 무천련과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무천련의 무사들은 제왕성의 후미만 치고 있는 상태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제왕성의 무사들!
‘좋아! 이판사판이다!’
헌원조는 끝장낼 작정을 하고 명을 바꾸었다.
“놈들을 저곳으로 밀어붙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