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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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38화
138화
“모… 몰…….”
“아쉽군. 그래도 그대의 지위를 생각해 깨끗한 죽음을 내리고 싶었는데…….”
검첨이 미묘하게 틀어지며 신경을 건드리고, 검첨에서 흘러나온 거미줄 같은 검기가 등줄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신음이 공노명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흐어어어……!”
독고무령은 여전한 목소리로 공노명을 재촉했다.
“그 비밀이 그대의 편한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던가?”
일각이라 했다.
천천히 차 한 잔 즐길 시간, 그 시간만 참으면 된다.
그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각이 마치 백 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공노명은 비옥에서 고문을 못 이기고 모든 것을 토해낸 죄수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일각이지만, 그들은 죽을 날도 기약 없는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 그…….”
그때 독고무령의 검을 쥔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 느려서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달팽이가 기어가듯이.
“일각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길지. 난 듣지 못해도 아쉬울 거 없어. 나중에 알아보면 되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게 아니겠지.”
공노명의 몸이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푸들푸들 떨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시간이 정지한 기분.
아득한 공포가 그의 모든 의지를 짓누른다.
그 시간만큼은, 공노명의 뇌리에 그토록 깊숙이 박혀 있던 위지천백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 서, 성주는…….”
살아남은 제왕성의 무사들은 모두가 도주한 상황.
넓은 대풍전 앞마당에는 삼괴와 호위무사대만이 남은 상태였다.
나름대로 철저히 뭉쳐서 움직였는데도 사망자가 나오고, 숨이 곧 끊어질 정도로 중상을 입은 사람마저 발생했다.
사망자는 암천위의 무사 중 한 사람인 정호국 그리고 중상자는 다름 아닌 나인창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자잘한 부상을 입어 옷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들로 인해 고통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특히 용설은 나인창의 몸을 붙들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인창…….”
자신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나인창이 자신을 대신해 적의 검을 몸으로 막을 이유가 없었다. 나인창의 심장에 검이 박힌 것은 결국 자신 때문인 것이다.
부상 때문에 삭주로 떠나보낸 오완과 나인창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집안을 섬기던 가신의 자식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오완과 나인창을 가신으로서 대하지 않았다.
친구.
그랬다. 그녀에게 오완과 나인창은 단 두 명뿐인 친구였다.
집안의 무공을 함께 익히며 보낸 세월이 몇 해던가.
수련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서로를 채찍질하며 수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녀는 나인창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평생 엮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가슴속에만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나인창이 자신 때문에 죽어간다.
미안했다.
“소, 소가주…… 난 괜찮…….”
나인창이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연다.
입을 열 때마다 검이 박힌 심장에서 핏물이 뭉클거리며 솟구친다.
“말하지 마…….”
“어차피…… 죽…… 을…… 거……. 그동안…… 행복……. 소공자를…… 꼭…….”
핏물이 흘러나오는 입으로 웃는다.
뭐가 그리 좋다고! 바보같이!
“알았어. 꼭 구할게. 꼭…….”
용설의 커다란 두 눈에서 끝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독고무령이 돌아온 것은 나인창이 웃는 얼굴로 숨을 멈춘 직후였다.
독고무령은 나인창을 끌어안고 우는 용설을 묵묵히 바라보고는, 그녀를 놔둔 채 진사혁에게 물었다.
“사혁, 계속 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
“셋이 죽고 다섯이 제법 큰 부상을 입었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따라갈 수 있을 거네.”
두 사람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 길을 멈출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단호히 말했다.
“최대한 빨리 상처를 돌보시오. 반각 후 출발할 거니까.”
무심하리만치 냉정한 명령!
용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명령에 무거워졌던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전쟁에서 삶과 죽음이 백짓장 한 장 차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사람이 죽어갈 때마다 항상 통곡하며 슬퍼할 수만은 없다. 애도의 마음은 가슴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동료가 죽을 것이니까.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상처를 손봤다.
와중에 현실을 자각하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백수십 명의 적을 상대한 걸 생각하면 손실이라 할 것도 없는 상황.
더구나 오늘 잡은 자가 누구인가.
제왕성의 총군사가 아닌가 말이다!
이제 곧 천둥벼락 같은 소식이 산서를 강타할 것이다.
산서 강호에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의 주역이 바로 자신들이다.
그들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다친 곳이 아픈 줄도 몰랐다. 나인창을 붙잡고 우는 용설 때문에 밝은 표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물론 삼괴들이야 예외였다.
귀도와 마불은 용설이 울든 말든 희희낙락하며 독고무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령아, 그놈은 어떻게 되었지? 내가 모가지를 제때 잡아채지 않았으면 놓칠 뻔했는데 말이야.”
“킁, 그놈이 공노명이라는 너구리라며? 귀도는 못보고 지나칠 뻔했는데 내가 발견했지.”
서로가 공을 세웠다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두 사람이다.
그마나 치선이 약 팔러 다니느라 다가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독고무령은 길게 말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마디로 말했다. 차가운 말투로.
“죽었습니다.”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며 귀도와 마불은 찔끔한 표정으로 슬며시 눈을 돌렸다.
분명히 자신들이 봤을 때만 해도 멀쩡했었다.
그런데 죽었단다.
독고무령이 죽였다는 말.
왠지 모르게 목이 서늘해졌다.
“그, 그래?”
“킁, 뭐 죽을죄를 졌으니까 죽였겠지…….”
독고무령은 딱 한마디로 귀도와 마불을 함구시키고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석도명이 자신을 향해오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밝은 표정이었다.
곧 독고무령 앞에 도착한 석도명이 말했다.
“마구간에 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회주. 말을 타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상자가 적지 않다. 말이 있다면 시간도 단축하고, 부상자에게도 충격이 덜할 것이었다.
“잘 됐군요. 가면서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일단 백천산으로 보내도록 하고, 나머지만 우현으로 갈 것이오.”
“예, 회주.”
그때 치선이 다가오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말을 못타는데, 그냥 뛰어가도 되지?”
산서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말을 잘 타는 것은 아니었다. 전날 독고무령이 그랬듯이.
“그렇게 하시죠.”
* * *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계곡에 머물고 있는 제왕성의 무사들을 삼면으로 에워싼 채 접근했다.
스스스스스…….
흰개미들이 짐승의 사체를 뒤덮어가는 듯하다.
짙은 살기가 안개처럼 밀려간다.
빠르고 은밀한 움직임.
반드시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의지!
사백여 명의 무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발끝만으로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그렇게 계곡과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지고, 마침내 계곡의 푸른 숲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이었다. 앞장서서 달리던 황자악의 입에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순간, 수백의 인영이 일제히 신형을 날리며 계곡 안으로 날아갔다.
암천단과 천룡방의 무사들은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계곡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백의 무사들이 계곡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 아우성, 병장기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기운이 터져나가며 대기를 흔드는 소리.
근 일천에 달하는 무사들이 격전을 벌이는 소리는 오 리 떨어진 산정까지 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북리사웅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전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 정해진 어떤 대상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장만익일 수도 있었고, 육풍원일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 독고무령일 수도 있었다.
그가 대상도 없는 질문을 던진 이유는 하나다.
검을 들었으면 무인답게 무공의 고하로 승부를 가려야 하거늘, 술수에 의지해 적과 싸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붙었으니 곧 어떤 지시가 있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장만익이다.
북리사웅은 그런 장만익이 불만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장만익이 누군가? 대 천룡방의 소방주요, 장로가 아닌가?
그런 자신들이 왜 독고무령이라는 자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꼭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다른 생각이 있나?”
“이 각 정도 싸우다 보면 양쪽 다 기진맥진해 있을 겁니다. 그쯤 되면 우리만으로도 저들을 쓸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저들의 숫자 중 반만 남아 있어도 우리 피해가 엄청날 것이네.”
“숫자는 많을지 몰라도 힘이 다 빠진 자들입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때 저만치서 우도진과 함께 나뭇등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육풍원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가만 놔두면 지리멸렬할 텐데, 뭐 하러 나서서 땀 흘려? 자네,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싶나?”
“육 선배님!”
북리사웅이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육풍원이 천룡방의 소방주라는 지위에 기가 죽을 거면 전마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육풍원은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나무에서 등을 떼고 차가운 눈으로 북리사웅을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나에게 소리친 것이더냐? 천룡방의 소방주라는 지위가 나에게도 통할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북리사웅이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 점은 죄송합니다. 하나 분명히 말합니다만, 제가 사람 죽이는 걸 즐겨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검을 든 무인으로서 술수를 부리는 게 싫을 뿐이지요.”
“당장 뛰쳐나가서 검을 휘두르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육풍원이 누군가? 산서의 싸움꾼, 전마가 아닌가!
당연히 그러한 마음일 터.
순간 북리사웅의 눈빛이 반짝였다.
말만 잘하면 육풍원이 자신의 말을 따라줄 것처럼 보인다. 육풍원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자신이 모든 주도권을 쥘 수 있을 터.
북리사웅은 은근한 말투로 육풍원을 설득했다.
“그럼 왜 독고무령이라는 자의 말에 따르려는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와 함께 저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네와 함께 저놈들을 치자고?”
북리사웅 옆에 있던 범여종이 어깨를 펴고, 눈을 빛내며 힘차게 말했다.
“무인이면 무인답게 싸워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인도 좋고 싸우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그러다 회주에게 혼나면?”
“……예?”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범여종은 말문이 막혔다.
전마 육풍원이 누구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이 양반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하지만 육풍원은 자신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목에 힘을 주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했다.
“지금은 단순히 비무하는 것이 아니야. 죽고 죽이는 전쟁이지. 여차하면 동료들이 모조리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저들을 치자고? 그러다 일이 틀어지면, 자네가 내 대신 회주에게 혼날 건가?”
“그게 아니라…….”
“회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면, 조용히 입 다물고 기다려. 시답잖은 소리 말고.”
육풍원은 범여종을 같잖다는 눈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등을 나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천룡방주가 무슨 생각으로 아들을 보냈는지 모르겠군. 전쟁이 무슨 애들 소꿉놀인 줄 아나?”
중얼거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작지도 않아서 북리사웅이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북리사웅은 육풍원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