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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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5화
125화
“오래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주의 절친한 친구인 백이 대학사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세상에 얼굴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기재였지…….”
그의 이름은 백장명. 그는 스무 살의 나이로 제왕성에 들어왔다.
황궁의 대학사 백이가 세상을 배워보라며 아들을 제왕성에 보낸 것이었다.
백장명은 워낙 조용한 성격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처럼 제왕성의 서고와 제왕지처만을 오가며 서원에서 배우지 못한 세상을 탐독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죽했으면 그가 제왕성에 들어온 지 반년이 되도록 제왕성의 간부들 중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성주는 그를 억지로 제왕구로에게 맡겼다.
성주의 부탁을 받은 제왕구로로선 책만 끼고 사는 백장명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책만 읽어서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는 약골인 줄 알았는데, 놀리기 위해 가르친 초식을 하루도 안 돼서 제법 정확하게 펼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변화가 서른여덟 개나 되는 초식을.
‘이것 재미있는데요?’하는 말과 함께.
살짝 약이 오른 제왕구로는 더욱 어려운 초식을 보여주고 한번 익혀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제왕구로는 자신들이 가르쳐 준 초식을 펼치는 백장명을 볼 수 있었다.
밤새 연습했는지 백장명의 옷은 땀에 절어 있었고, 온몸은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제왕구로는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이놈이 어디까지 익히는가 한번 볼까?
그때부터 제왕구로와 백장명 사이에 묘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시작한 것이 오기로 변하더니, 이 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버렸다.
그즈음 항산에 가 있던 성주의 딸 고은선이 삼 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첫눈에 성주의 딸을 좋아했지. 성주의 딸도 그를 좋아했고. 성주는 기뻐하며 백장명과 고은선을 맺어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결합한 지 팔 개월이 되던 날에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신속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워낙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이어서 성주 측에서는 기미도 눈치 채지 못했다.
눈치 챘을 때는 제왕성의 칠 할이 이미 그들의 손에 들어간 후였다.
“사람들이 놈들에게 회유당한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느냐?”
막위지가 물었다. 그러고는 독고무령이 묵묵히 바라만 보자 스스로 대답했다.
“성주는 온건한 분이셨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산서의 문파들이 고개를 숙이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피를 보냐고 항상 말씀하셨지.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달랐어. 강건파들은 산서 최강의 힘을 지닌 제왕성이 관제산에만 머물러 있는 게 늘 불만이었으니까. 위지천백은 바로 그런 강건파를 하나하나 자신의 사람으로 거두어들였다. 무려 오 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막위지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분개한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독고무령은 석상처럼 굳은 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곧 숨을 깊게 몰아쉰 막위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우리 중에도 강건파가 있었다. 하지만 성주를 배반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지천백도 그걸 알기에 우리에게는 접근하지 않았던 게야.”
위지천백이 이끄는 강건파는 제왕성을 완벽히 차단한 채 제왕지처를 쳤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호천위들이 몰살당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백장명이 조정에서 이름 높은 백이 대학사의 아들이라는 걸 알기에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제왕구로는 목숨을 걸고 강건파들과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성주가 결사적으로 말렸다. 이미 제왕성 전체가 그들에게 장악되었으니 나중을 기약하라고. 배신한 것처럼 자신을 치고, 위지천백을 따르는 척하며 자신의 핏줄을 지켜달라고.
제왕구로는 극력 반대했다. 그러자 성주는 처연히 웃으며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제왕구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성주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배고 있는 두진진과 고은선을 지키기 위해서. 두 여인의 뱃속에 있는 성주의 핏줄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어느 날, 성주의 핏줄을 밴 두 여인이 사라졌다.
제왕구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두 여인이 죽은 뒤였다.
“우리는 위지천백을 찾아가서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은밀히 전해진 한 가지 소식을 듣고 그조차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여인이 나은 아이 중 한 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제왕오로는 그 아이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비옥의 경비가 워낙 삼엄해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위지천백이 뭘 눈치 챘는지 제왕오로에 대한 감시를 늘린 상황이었다.
“우리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것을 알고, 위지천백의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아이를 모른 척하기로 했다. 우리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물론 아이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곧 지하수로에서 죽었다는 말도 들렸지.”
그 즈음, 제왕구로는 넷이 죽고 다섯만이 남은 상태였다.
제왕오로는 모든 의욕을 잃고 금원에서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금원에 들어왔다.
그의 턱에서 이마까지 이어진 선, 그 사이에 있는 입술과 코, 그리고 눈까지.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을 너무나 닮아 있었다.
막위지는 잘게 떨리는 노안으로 독고무령을 보며 나직이 말을 맺었다.
“그래서 그날 너를 쫓아간 거다. 혹시나 하면서…….”
독고무령이 입을 연 것은 막위지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백장명이란 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건 우리도 모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백이란 분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양반은…… 제왕성이 위지천백에게 넘어간 직후,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리고 일 년을 더 못살고 돌아가셨지.”
독고무령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막위지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태원을 떠났다. 그가 해준 이야기는 너무 엄청나서 당장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의 이름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땅이 된다 해도, 나는…… 독고무령일 뿐이다.”
그리고 독고헌은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였다.
마음을 정리한 그는 몸을 돌렸다. 분하를 바라본 지 세 시진 만이었다.
그가 밀호방으로 들어가자, 운양이 득달같이 방에서 튀어나왔다.
“무령! 아니 회주! 괜찮아?”
“소란 떨지 말게. 남들이 들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군.”
눈을 가늘게 뜬 운양은 독고무령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정말…… 별일 아니지?”
독고무령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반달이 창공에 떠 있었다.
그 달 안에서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하다.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속삭이는 것만 같다.
-너는 내 아들이야. 그렇지?
그런데 왜 주위의 별들이 눈물처럼 보이는 걸까?
‘걱정 말아요, 아버지! 저는 독고무령이니까요!’
독고무령은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고개를 내리며 나직이 물었다.
“우현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아직은 없네.”
제10장 마침내 폭풍은 불기 시작하고
새벽바람이 지붕을 쓸고 지나갈 무렵, 한 마리 전서구가 밀호방의 건물 안으로 날아들었다.
전서구를 본 순간, 운양은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반 각 후.
그는 독고무령 앞에 한 장의 서신을 내밀며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놈들이 거래를 받아들였네.”
독고무령은 서신을 다 읽고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번 일로 제왕성이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 거라 보는가?”
“피해도 피해지만 사기가 크게 떨어질 거네. 물론 은룡산장은 반대로 그만큼 사기가 오르겠지.”
“그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군.”
“악착같이 버틸수록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독고무령과 운양은 마주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무령, 안에 있나!”
진사혁의 목소리다.
독고무령과 운양은 의아한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와라, 사혁.”
덜컹.
문이 열리고 진사혁이 들어왔다. 왠지 다급한 표정이었다.
운양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소현 누님이…… 피를 쏟고 있어.”
여기저기 피가 튄 방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독고무령과 운양이 방으로 들어가자, 구양소현은 입가의 피를 쓱 닦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독고무령을 보며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왜 왔죠? 높으신 회주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여자 방에 왕림하시다니, 영광이군요.”
독고무령은 그런 구양소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구양소현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독고무령의 손을 쳐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치워요! 회주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으니까.”
창백한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튀었다.
원망이 가득한 눈빛.
아마도 자신의 무관심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듯했다.
‘나 같은 사람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독고무령은 더욱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를 측은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혈맥이 꼬이고 뒤틀려서 내장에 출혈이 생긴 것 같다.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평생 무공을 익히지 못할 거다.”
“흥! 상관하지 마시죠.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거죠? 사혁! 왜 회주를 데려온 거야? 데려오지 말랬잖아!”
독고무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손을 뻗었다.
“치우란 말……!”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옆으로 밀치며 마혈과 아혈을 찍어 버렸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군.”
진사혁이 다급히 옆으로 와서 구양소현을 부축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여자들?”
독고무령은 그의 말을 못들은 척 침상을 가리켰다.
“거기 눕혀. 빨리. 더 늦으면 정말 무공을 잃을지 모르니까.”
화들짝 놀란 진사혁이 구양소현의 몸을 안아들고 침상에 눕혔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진사혁의 입에서 천둥소리처럼 흘러나왔다. 진사혁은 떼기 싫은 손을 억지로 떼며 슬며시 구양소현의 얼굴을 쓸었다.
“누님, 조금만 참아. 날 원망해도 나중에 하고.”
꼼짝도 할 수 없는 구양소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진사혁이 옆으로 물러나자, 독고무령은 허공을 격한 채 태천일심의 기운을 쏟아냈다.
구양소현의 몸이 다섯 치가량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몸 여기저기에서 툭툭거리는 소리가 났다.
구양소현의 방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독고무령이 구양소현의 혈맥을 다스리는 걸 쳐다만 보았다.
대부분이 절정 이상의 고수들인지라 그 광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소현욱을 비롯한 장로들도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뒤늦게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육풍원과 우도진, 삼괴마저 입을 반쯤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허공섭물로 사람의 몸을 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산서에서만 적어도 열 명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볍게 손을 뻗는 것만으로 그 정도의 허공섭물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많아봐야 다섯?
더구나 그 상태에서 허공에 뜬 사람의 혈맥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산서성을 탈탈 털어도 둘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말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누군지 알면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
제왕성의 주인이자 산서의 절대자, 천검무왕 위지천백.
일대일이라면 위지천백조차 승부를 자신할 수 없다는 무림오비(武林五秘)의 일인 밀천객(密天客).
하면 독고무령의 능력이 그들과 같단 말이 아닌가?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제왕성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막연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나마 암천회가 아니면 그들과 겨룰 곳조차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입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격동.
하지만 몇 사람의 얼굴은 그로 인해서 더욱 어두워졌다.
육풍원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어떻게 다시 한번 싸워보려고 했더니…….”
우도진이 힐끔 육풍원을 쳐다보며 구시렁거렸다.
“빌어먹을, 너 때문에 나까지…….”
귀도와 마불은 천장을 올라다보며 뒷짐 진 손을 꼼지락거렸다.
“흥, 제법이군.”
“킁, 생각보다 더 강할 거 같군. 아무래도 비무는 뒤로 미뤄야겠어.”
그때 치선이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들고 독고무령에게 다가갔다.
“허허허, 내 선단 두 알이면 나을 텐데, 왜 괜한 짓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