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0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0화
120화
다행히 모두가 즐거워하는 눈치다. 백 살에 가까운 노인들이어서 편한 생활을 바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삼괴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독고무령은 세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경고했다.
“대신, 앞으로 엉뚱한 일을 저지르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럴 거면, 지금 바로 삼불곡으로 가십시오.”
귀도가 오랜만에 씩 웃었다. 날카로운 눈에서 살기를 번뜩이며.
“훗, 걱정 마라. 그런 놈 있으면 내가 목을 따버릴 거다.”
“킁, 허리를 분질러서 아예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마.”
“허허허, 길게 말할 것 없다. 새로 만든 선단 두 알이면 간단히 해결되니까. 아예 지금 먹일까?”
독고무령은 삼괴에게 봉공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그리고 귀도는 도공(道公), 마불은 불공(佛公), 치선은 선공(仙公)이라 부르기로 했다. 북천삼괴의 별호를 그대로 부르는 것은 말썽의 소지가 너무 많았으니까.
처음으로 직함을 받은 삼괴는 희희낙락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밀호방 내부를 오락가락했다.
사람들은 이미 북천삼괴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어지간하면 그들 근처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날 들어온 육풍원과 우도진이 그들과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인데, 삼괴가 툭툭 쏴대며 건드려도 두 사람은 기분 나쁜 표정 하나 없이 받아주었다.
아무래도 막 들어온 처지라 아는 사람이 없던 차에 삼괴가 말을 거니 반가운 것처럼도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산서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북천삼괴라 해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 덕에 두 사람은 치선이 새롭게 만든 선단을 한 알씩 얻을 수 있었다.
“허허허, 제대로 연단하지 못해서 약효가 조금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거네. 어서 먹어 보게나.”
제8장 적에게 정보를 팔아라
오월 초이틀.
오시가 되기 직전, 은룡산장 무사들의 뒤를 쫓던 십일호에게서 두 번째 전서구가 날아왔다. 오백 무사 전원이 우현에서 서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귀원장에 집결했다는 소식이었다.
귀원장이라면 전날 분노한 관천악이 쳐들어갔던 곳이다.
“우현이라……. 우현의 그 장원이 저들에게 다시 찾아가야 할 만큼 중요한 곳인가?”
서신을 내려놓은 독고무령의 눈빛이 심해처럼 가라앉았다.
미리 읽어본 운양이 턱을 괴고 있던 깍지 낀 손을 풀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건가?”
“제왕성의 움직임에 대한 소식은 들어왔나?”
“아직 들어오진 않았네만, 그들 역시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들이 움직일 거라고 보나?”
“적어도 서연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겠나?”
독고무령은 잠시 입을 닫고 허공을 응시했다.
자잘한 정보를 모아 머리를 굴려 상황판단하는 것은 운양이 자신보다 나을지 몰랐다. 강호정세에 대한 것도 그가 많이 알 것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제왕성. 그리고 위지천백의 마음.
자신이 볼 때, 위지천백은 앞에 먹이가 있다고 냉큼 달려드는 사람이 아니다.
철저히 계획된 움직임.
칠 때는 치고, 기다릴 때는 기다리고, 돌아갈 때는 돌아간다.
무천련을 치면서도 은룡산장의 움직임을 기다렸고, 무천련이 거의 다 와해되었는데도 당장 산서를 집어삼키지 않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이 생각할 때, 이유는 하나다.
제왕성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건곤일척의 때를!
그런 자들이 서연에 있는 자들을 움직여서 당장 은룡산장을 자극할까? 그래봐야 양패구상의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텐데?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킬 공산이 크다.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들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을 거네.”
“그럼, 자네 생각은?”
“대신 다른 힘이 움직일 거야. 은룡산장의 판단에 혼돈을 주고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 말이야. 위지천백이 그걸 원할 테니까.”
“흠…….”
운양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독고무령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초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형, 초연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초운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작은 대나무통 하나를 운양에게 건네주었다.
운양은 대나무통을 순서에 따라 개봉하고는, 안에서 작게 말린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독고무령은 운양이 서신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초연이라면 제왕성에 들어가 있는 밀호방의 정보원이다. 다시 말해서 제왕성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는 말.
곧 운양이 고개를 들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왕성이 이렇게 가엽게 느껴지는 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하필 자네 같은 사람을 적으로 삼다니, 그들도 더럽게 재수가 없군.”
그 말에 독고무령의 깊어진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움직였나?”
운양은 대답 대신 손에 든 서신을 내밀었다.
[환무단(幻武團)이 제검전(帝劍殿)의 고수들과 함께 은밀하게 움직였음. 현재 파악한 바로는 총 일백 정도. 장로 두세 명이 그들을 이끌고 있다 함.]
같은 삼단에 속한 단체인데도 환무단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검혼단이나 도혼단의 무력을 앞선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게다가 제검전은 제왕성의 사대기둥이라 일컬어지는 사전(四殿) 중 하나였다. 숫자는 소수이나 중견고수로만 이루어진 제왕성의 정예 중 정예.
그들이 정면대결을 하려는 것은 아닐 터. 비록 숫자는 백에 불과하나,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독고무령은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흔들어 놓으면 서연의 무사들로 정리하려는 생각인가? 어쨌든 은룡산장이 곤란해지겠군.”
“누가 깨져도 우리야 손해 볼 것은 없지 뭐.”
“물론 그야 그렇지. 하지만 기왕이면 양쪽 다 깨지는 게 좋지 않겠나?”
운양이 독고무령의 말뜻을 알고 눈을 반짝였다.
“저들에게 알려주자는 건가?”
“공짜로 주지 말고 팔아. 정보장사꾼답게 말이야.”
운양은 고개를 모로 꼬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의심받지 않게 밀호방의 이름으로 알려주고 대가를 받으라는 말.
운양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크크크, 이제 자네도 강호인 다 되었어.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산에서 막 나온 강호초출 같았는데. 좌우간 아주 큰 거래가 되겠군.”
하지만 독고무령은 웃지 않고 무심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 일의 처리가 끝나면, 즉시 간부들 전부 불러들여서 회의를 소집하게.”
순간 운양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도 움직이는 건가?”
독고무령의 심해처럼 깊은 눈이 운양을 향했다.
“잊지 말게. 상대는 제왕성과 제왕성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자들이라는 걸. 한 치의 방심만 보여도 저들의 연합공격을 받게 될 거네. 그 결과에 대해선 자네가 잘 알 거야.”
운양의 상기된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독고무령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이다.
방심.
그랬다. 그동안 계획했던 일이 원만히 흐르는 바람에 방심했던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대로 일이 년만 지나면 제왕성을 무너뜨릴 수 있겠어.’ 그런 생각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이란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지금이야 태원이라는 특수여건 덕분에 자신들의 모습이 가려져 있고, 은룡산장으로 인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을 뿐. 언제 어느 때 제왕성의 눈이 자신들 쪽으로 향할지 모른다.
저들에게 암천회의 존재가 알려진 순간, 그때부터는 모든 상황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지며 태원이 피로 젖을 게 분명하다.
아직은 자신들이 약하니까.
잠시 그걸 잊었다. 냉심호리라는 놈이! 어리석게 말이다!
운양은 침중해진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 하늘이 무너져도 굴하지 않을 표정.
커 보였다. 자신보다 훨씬 더.
‘너는…… 하늘이 될 자격이 있다, 무령.’
그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네, 회주.”
* * *
정원에 핀 모란이 유난히 피처럼 붉다.
너무나 붉어 바람에 흔들리면 핏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위지천백은 햇살이 쏟아지는 전각 앞에 서서, 핏빛으로 젖어있는 모란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노태군, 그 늙은 여우가 왜 그들만 보냈을 거라 보느냐?”
한 걸음 뒤쪽에 서 있던 공노명이 나직이 대답했다.
“성주님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고자 함일 것입니다. 더불어 본성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겠지요.”
위지천백은 잠시 모란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보여줘야겠지. 내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말이야.”
“성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공노명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평소의 냉정한 그와 달리, 얼굴이 약간 상기된 상태였다.
어찌 들뜨지 않으랴. 이십 수 년 동안 암중으로 진행해온 일이 마침내 결실을 맺기 직전이거늘.
위지천백은 공노명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 역시 감회가 깊거늘, 어찌 공노명이라서 다를까.
그러나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위지천백은 하늘에서 눈을 내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공노명, 우현에 있는 놈들이 무너지면 늙은 여우가 분노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면 네가 직접 무사들을 이끌고 서연으로 가서 늙은 여우를 상대해라!”
“존명!”
공노명이 떠나간 후에도 위지천백은 한참 동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노태군을 무력화시킨 후 진가철방을 완벽히 내 편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산서의 군부 반은 내 손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지. 진정한 전쟁은…… 그때부터다.’
제왕은 하늘이 정해주는 거라고?
헛소리다. 제왕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위지천백은 그렇게 생각했다. 삼십 년 전부터.
‘노태군,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나를 몰랐다는 것이다. 후후후후…….’
그의 입가에 조소가 맺힐 때였다.
“아버지!”
뒤쪽 멀리서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위지선유의 목소리였다.
위지천백은 조용히 웃으며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날이 너무 좋아서 나왔어요. 우와! 모란이 정말 예쁘게 피었네요?”
“흠, 내가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피이, 좀 그냥 넘어가주면 안 돼요?”
“어이쿠, 그럴 걸 그랬나?”
위지천백은 짐짓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위지선유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한 달이 훨씬 넘었잖아요. 저, 태원에 놀러가도 되죠?”
이미 약속을 한 번 어겼다. 제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그것은 아무리 딸과의 약속이라 해도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이제 또 하나의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위험하기로 말하면 전이나 별다르지 않은 상황.
거기다 노태군이 보낸 간자가 감시하고 있을지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었다. 암암리에 솎아냈다고 해도 몇은 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숨어 있던 간자를 잡아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잘하면 거치적거리는 쓰레기를 깨끗이 제거할 수도 있을 테고.
‘흠, 호천위에다 제왕밀위(帝王密委) 셋을 더해 보내면, 최악의 경우라도 이 아이만큼은 다치지 않게 하겠지.’
위지천백은 위지선유의 기대감 가득한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두 가지만 약속해라.”
모란보다 더 환한 웃음꽃이 위지선유의 입에서 활짝 피어났다.
“뭐든 할 게요!”
위지천백은 딸의 웃음을 본 것만으로도 자신이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이틀 안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둘째, 혼자 함부로 돌아다니면 절대 안 된다.”
“예, 아버지! 약속!”
* * *
새롭게 떠오른 태양이 중천으로 치솟을 무렵, 독고무령은 장이생을 찾아갔다.
전쟁이 시작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장이생의 안전에 대한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해놓기 위해서였다.
“왔어, 오빠?”
장유유가 환하게 웃으며 독고무령을 반겼다.
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이었다. 장이생의 몸 상태가 현저히 좋아지면서 그녀의 마음에 끼었던 구름도 걷히고 있었다.
“아직도 소천이에게서는 소식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