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18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18화
118화
육풍원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우도진의 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그와 함께 다닌다면 그나마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때 진사혁이 넌지시 물었다.
“저…… 육 대협, 혹시 마개 육정기라는 분에 대해 아십니까? 펼치시는 검법이 전에 들었던 어떤 검법과 비슷한 것 같은데요.”
육풍원이 이마를 찌푸리고 진사혁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어떻게 그분을 아는가?”
“집안 일로 조금 관계가 있습니다.”
육풍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상관없다 생각했는지 간단하게 육정기와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내 선조 되시는 분이 그분의 무공을 물려받으면서 육가의 맥을 이었다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게 다야. 그런데 자네의 집안이 어딘데 그분과 관계가 있다는 건가?”
“저는 진사혁이라고 합니다. 뭐 지금은 잠시 연을 끊은 상태입니다만, 화진촌의 진가철방이 본가입죠.”
순간 육풍원의 눈이 한껏 커졌다.
“자네가 진가철방의 후손이란 말인가?”
“예.”
“흠, 그럼 우가와도 완전히 남은 아니군.”
“예?”
“알지 모르겠네만, 우가가 바로 신창의 맥을 이었다네.”
* * *
독고무령 일행이 육풍원과 함께 우도진의 집으로 달려갈 무렵, 태원의 남문으로 세 노인이 들어섰다.
후줄근한 검은 도복을 입은 노도인, 통통한 몸에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 백의를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 삼괴였다.
삼괴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마침 이를 쑤시며 지나가는 두 명의 건달이 보이자 그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가야,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어디로 가야 쉽게 벌 수 있지?”
누구에게 한 방 맞은 듯 코가 납작하게 주저앉은 건달이 귀도를 미친놈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늙은이, 그런 곳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줘.”
귀도는 그의 목과 허리, 다리를 접어서 둥글게 만 다음 한쪽에 던져놓고, 옆에 있는 뻐드렁니가 난 건달에게 물었다.
“너도 모르냐?”
겁에 질린 뻐드렁니가 잽싸게 눈알을 굴리더니 말했다.
“도, 도박장으로 가 보쇼. 재수 좋으면 쉽게 딸 수 있습죠.”
“도박장? 어디 있지?”
“저쪽으로 가면 만금도국이라고…….”
뻐드렁니는 진땀을 흘리며 만금도국에 대해 설명했다.
귀도의 말에 다 대답하고 나면 마불이 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치선이. 앞뒤만 조금씩 틀릴 뿐 질문은 똑같았다.
뻐드렁니는 꾹 참고 묻는 대로 대답했다. 속이 끓을 때마다 구겨진 채 한쪽에 처박혀 있는 동료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삼괴는 설명이 한마디만 틀려도 말꼬리를 잡았다.
“왜 나에게 한 말하고 틀리지? 다시 말해봐.”
뻐드렁니는 결국 속편하게 세 번씩 말했다. 그러다 삼괴에게 한 대씩 맞고 친구와 사이좋게 뻗어버렸다.
“흥, 우리가 늙었다고 귀까지 먹은 줄 아나? 왜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그래?”
“킁, 요즘 애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
“허허허, 요즘은 젊은 애들도 치매가 온다고 하더군. 내가 준 약을 먹으면 나을 텐데.”
삼괴는 한마디씩 하며 휭 하니 만금도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반각, 만금도국의 문이 열리고, 삼괴가 환한 표정을 지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흥, 이곳이 돈 놓고 돈 먹기 노름을 하는 곳이란 말이지?”
“킁, 맞아. 몇 번만 튀기면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다고 했어.”
“허허허, 거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많군. 우리가 왜 이런 곳을 몰랐지?”
“흥, 그거야 옛날에는 가만있어도 돈이 생겼잖아.”
“킁, 맞아. 그때는 제발 빨리 가라고 묵직한 돈주머니를 넣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지. 세월이 흐르니까 인심도 변했어. 그렇다고 옛날처럼 휘젓고 다닐 수도 없고…….”
“허허허, 하긴 이제 나이도 먹었는데, 조용히 살아야지. 저번에 낙양 갔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은가.”
“흥! 그게 어디 우리 잘못이야? 땡중들이 괜히 시비 걸어서 그랬지.”
“킁, 그놈의 땡중들은 기억력도 좋아.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허허허, 자, 그러지 말고 우리도 앉자고. 더도 말고 열 배만 벌어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다가 한 일 년 후에 돌아가자고. 그때쯤이면 무령이도 없을 거야.”
치선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다가가자, 사람들은 어디서 호구가 왔나보다 하며 삼괴를 노름판에 끼워주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했다.
귀도와 마불이 가끔씩 콧바람 소리 내는 것만 아니면, 친구들끼리 마주 앉아 노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채 반각이 되기도 전이었다.
와장창!
탁자가 허공을 날아 구석에 처박혔다.
“뭐야? 왜 계속 져? 이거 사기 치는 거 아냐?”
귀도가 살기 띤 눈으로 마주 앉은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마불은 쉬지 않고 킁킁거리고, 치선은 얼굴이 벌게져서 연신 ‘내 돈, 내 돈 열 냥!’만 찾았다.
잔뜩 골난 세 노인의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마주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은자를 주워 도망쳤다.
그때 만금도국의 건달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삼괴를 에워쌌다.
딱 보니 무기도 없고, 어딜 봐도 강호의 고수와 같은 풍모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삼괴가, 소란을 피워 어떻게든 몇 푼 뜯어내려는 노망난 늙은이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보쇼, 영감들,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쇼.”
“흥! 돈을 돌려주면 가지.”
“킁, 이자도 줘야 돼.”
“허허허, 많이는 필요 없네. 딱 두 배만 주면 되네.”
이마에 길게 칼자국이 있는 건달 하나가 피식 웃으며 침을 찍 뱉었다.
“큭, 별 웃기는 노인들 다 봤군. 이봐,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고 대충 달래서 쫓아내.”
곧 세 명의 장한이 삼괴에게 다가가 밀어냈다.
“그만 가쇼. 노인네 패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삼괴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이 사기꾼 놈들이!”
“돈을 돌려줘! 그럼 갈 테니까!”
“허허허, 좋게 말할 때 돌려주게나. 우리,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들이거든.”
이마에 칼자국이 난 건달은 기가 차지도 않은지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튕겼다.
“하아, 미쳤으면 곱게 미치지……. 얘들아, 밖에다 던져 버려라.”
순간, 귀도가 이마에 칼자국이 난 건달의 손가락을 향해 스윽 손을 뻗었다.
피할 새도 없이, 귀도의 손에 잡힌 건달의 손가락이 뒤로 꺾어졌다.
와직!
“끄어어! 이, 이 미친 늙은이가……! 으악!”
그때부터 한바탕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와장창! 퍽!
“흥! 나 안 미쳤어, 이놈아!”
“킁, 미친 건 네놈이지!”
“허허허, 이제 두 배로는 안 되네, 세 배는 내놔야겠어!”
눈 깜짝할 사이, 탁자가 모조리 뒤집어지고, 힘 좀 쓴다는 건달들 십여 명이 모조리 바닥을 기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곧 마운방의 무사 여섯이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섰다.
암천회에 합류한 이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무사들이 나서지 않았다.
혹독한 수련으로 전에 비해 월등하게 강해진 무사들이다. 내공만 뒤질 뿐, 초식만으로는 대문파의 제자들과 일전을 겨뤄도 쉽게 지지 않을 정도가 된 상태. 자칫하면 제왕성의 의심을 살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삼괴의 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흥! 제법 이빨이 날카롭군.”
“귀도, 흑도 놈들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아무리 약하게 때렸다지만, 이 마불 어르신의 주먹을 세 대나 맞고도 버티네?”
“허허, 성질 같아서는 모가지를 확 비틀고 싶다만…….”
그들마저 쓰러지자, 지하 이 층에 있던 마인걸의 귀에까지 사실이 알려졌다.
“뭐야? 늙은이들이 난리를 친다고?”
“예, 방주. 돈을 두 배나 줘도 안 가고 자꾸만 더 내놓으라고 합니다.”
“끄응. 대체 어떤 늙은이들인데…….”
무사들까지 모조리 때려눕혔다면 절대 일반 노인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비록 허름하긴 해도, 도복과 승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혹시 도가와 불가의 기인들이 아닐까?
마인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명을 내렸다.
“가서 늙은이들의 이름을 알아봐.”
그때 보고를 올리던 수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속하가 그 늙은이들끼리 부르는 걸 들었는데, 귀도, 마불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주.”
마인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검은 도복, 붉은 가사, 신선 같은 풍모. 그리고 미치광이 같은 노인. 그것만으로도 오래 전에 강호를 뒤집어놨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순간 마인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하필 그 골칫덩이들이…….”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버럭 소리쳤다.
“원하는 대로 다 줘! 줘서 빨리 보내! 소금 뿌리는 거 잊지 말고!”
귀도는 만금도국의 무사 하나가 내민 서른 냥을 바라보았다.
열 냥을 잃고 서른 냥을 받게 되었으니 엄청난 이익을 본 셈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열 배를 달라고 해도 줄 것 같은 기분.
그때 마불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킁, 일단 배를 채우고 보자고. 여기는 밥 안주나?”
“허허허, 그러고 보니 벌써 밥 때가 지났군. 우리, 밥이나 먹고 가세. 급할 거 없잖아?”
“흥! 나는 술도 한잔하고 싶군. 설마 술이 없다고는 않겠지?”
* * *
삼괴가 만금도국의 뒤쪽에 있는 별채에 퍼질러 앉았을 즈음, 우도진은 이를 갈며 간단한 봇짐을 챙겼다.
“빌어먹을 놈!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와서…….”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데 육풍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해선 집을 떠나지 않는 놈이 왜 왔는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평상시 거의 안 맞는 육감이라 순순히 집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역시 자신의 육감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육풍원이 함께 온 어린놈과 대결 운운할 때만 해도, 자신이 심심해 할까봐 노리갯감을 데려온 줄 알았다.
마주서서 검을 뽑아드는 걸 보면서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제법 강해보이는 첫 인상, 그 역시 마음에 들었다.
무사란 강한 자와 부딪쳤을 때 즐거운 법이니까. 물론 자신이 이길 경우에.
간만에 뭉쳐진 근육도 좀 풀고 땀 좀 흘리면 기분이 상쾌할 것 같았다.
기분 좋게 땀 좀 흘린 후, 숨겨 놓은 술을 꺼내서 친구와 오랜만에 한잔할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즐거운 상상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와보게!”
자신 있게 일갈을 내지르고 창을 뻗은 지 정확히 오 초.
자신의 몸이 창과 함께 땅바닥에 처박혀 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이런 놈이 있어?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목이 서늘했다.
상대의 검이 한 치만 더 뻗었다면, 제때 멈추지 않았다면, 목에 구멍이 뚫렸을 테니까.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육풍원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육가 놈도 자신이나 별반 다름없는 꼴을 당한 것 같지 않은가!
그제야 모든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빌어먹을 육가 놈이 물귀신처럼 자신을 물고 늘어졌다는 걸!
‘후우,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닌데, 저놈을 믿은 내가 미쳤지.’
우도진은 고개를 저으며 봇짐의 끈을 질끈 동여맸다. 마치 육풍원의 목에 밧줄을 매고 확 잡아당기듯이.
“아직 멀었나?”
그때 밖에서 빌어먹을 친구가 불렀다.
우도진은 방문을 노려보며 빽 소리쳤다.
“다 됐어, 이놈아!”
육풍원과 함께 강호를 누비다 둥지를 튼 지 삼 년 만에 우도진은 봇짐을 싸고 방을 나섰다.
날씨는 빌어먹게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