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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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14화
114화
“놈들이 황궁과 연관되었다는 걸 알면 강호의 누구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무 급하게 마음먹지 마.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공자.”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고 용설과 나인창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졌다.
탁자로 다가간 독고무령은 찻잔에 식어버린 차를 한 잔 따랐다.
용설은 왜 황궁과 연관된 자들을 적으로 둔 걸까?
황궁과 연관된 그들은 또 누굴까?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용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군.’
물론 용설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걸 기피한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단체의 장으로서 수하의 사정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반쯤 비울 즈음, 밖에서 진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령, 안에 있나?”
“들어오게.”
곧 진사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왠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진사혁이 탁자로 다가와 털썩 의자에 앉더니, 힐끔 독고무령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구양 누님이 말도 하지 않고 죽어라 수련만 하고 있어. 저러다 병이라도 나면 안 되는데…….”
구양소현이 변한 것은 철검보가 무너진 그날부터였다.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이 몇 번 말려보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뜻을 꺾지 못했다.
독고무령은 그런 그녀를 그대로 놔두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날의 상황을 잊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병은 진사혁이 먼저 난 것 같았다.
그는 요 며칠간 수련도 게을리 하고 구양소현 곁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다 보니 곧 완성될 것 같던 관천뇌곤조차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독고무령은 간단하게 처방을 말해주었다.
“그럼 자네도 함께 수련하면 되지 않겠나? 둘이서만 수련할 수 있는 방을 따로 내줄까?”
“그래도 될까? 사람들이 더 와서 석실이 모자랄 텐데.”
“그들도 이해할 거네. 곰 한 마리가 풀죽은 채 수련장을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도끼눈을 뜬 진사혁은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자네……!”
“싫으면 말고.”
“누, 누가 싫다고 했나?”
진사혁이 벌게진 얼굴로 황급히 손을 저었다.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빨리 관천뇌곤의 중육식을 완성하게. 그래야 내가 자네 조부님과 한 약속을 지킬 것이 아닌가?”
순간 진사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럼…… 그걸 얻은 건가?”
“아홉 중 이제 겨우 셋을 얻었을 뿐이네. 아직 완벽하지는 않네만, 그래도 자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야.”
“자넨 정말…….”
비결도 주지 않았거늘, 가문을 백수십 년 동안 고민에 잠기게 한 숙원을 혼자서 풀어내는 독고무령이다.
진사혁은 가슴이 먹먹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령에게 비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그럼 더 빨리 풀지 모르는데.’
하지만 가문의 어른들이 허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진가의 마지막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니까.
진사혁은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비결도 없이 세 개의 비밀을 풀었는데 나머지를 풀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목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열심히 해서 최대한 빨리 중육식을 완성하겠네, 무령.”
독고무령은 진사혁이 나간 후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한 번 감고 뜨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먹었을 때 용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방을 나선 독고무령은 곧바로 용설의 방으로 갔다.
용설은 악착같이 지상의 방을 요구했다. 지하는 답답해서 도저히 지낼 수 없다며.
그런데 거기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있나?”
약간의 시간을 두고 용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당황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 왔다. 들어가지.”
독고무령은 그 말만 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잠깐!”
용설의 당황한 목소리가 다급히 들렸다.
그러나 이미 작정하고 온 터다. 독고무령은 망설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돌아선 용설이 보였다. 그는 돌아선 채 항상 두르고 있던 천으로 급히 목을 감고 있었다.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독고무령은 개의치 않고 방 중앙에 있는 작은 다탁으로 갔다.
몇 달 동안 본 모습. 얼굴에 흉한 상처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일단 앉지.”
독고무령은 마치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의자에 앉으며 용설에게 말을 건넸다.
천천히 돌아선 용설이 눈을 치켜뜨고 까칠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시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관에게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준 수하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예의를 찾는 것 같군.”
“그건…….”
그때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 터.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면 더 나을 것 같았다.
“좋아, 오늘 온 김에 자네 얼굴 좀 봐야겠어.”
“안 됩니다.”
“남자가 뭘 그리 따지는가?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있어도 상관없다.”
“그래도…… 안 됩니다.”
자꾸 안 된다고 하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나는 상관으로서 그대의 얼굴을 알 자격이 있다고 보네만. 만일 벗지 않겠다면 강제로 벗기겠다.”
독고무령을 노려보는 용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들 앞에서 약속한 게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피로 변한 그 참혹한 곳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 명령은 취소해주십시오.”
참혹한 곳?
“내 앞에서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군.”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웃음 대신 지나가듯이 몇 마디 했다.
“나는 생살이 찢어진 사람 옆에서 음식을 먹으며 자랐지. 그리고 매일, 온몸이 헤집어진 자의 비명을 들으며 핏속에서 뛰놀았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말이야. 만약 그보다 더 참혹한 상황에서 살아왔다면 자네의 말을 이해해주지.”
용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그렇게 자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악귀소굴이라 해도 아이를 그렇게 키우는 곳은 없다. 전설이 말하는 악마들의 단체, 혈교라면 몰라도.
그런데 이상하다. 독고무령의 눈이 한 점 흔들림 없고, 자신을 놀리려는 표정도 아니다.
게다가 독고무령의 지나친 냉정함을 생각하면, 그 말이 결코 거짓말만은 아닌 듯하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독고무령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걸렸다.
더 깊은 내막을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용설의 흔들리는 눈을 보니, 언젠가 그와 비슷한 눈빛을 보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용설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자라는 줄 알았다. 열여섯에 그곳을 탈출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단순히 ‘말’을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끼어있던 찌꺼기를 털어내는 소리였다.
용설은 독고무령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끼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이제 자네의 얼굴을 보여라.”
용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제발 그것만은…….”
순간.
“끝내 강제로 손을 쓰게 만드는군!”
일갈을 내지른 독고무령의 신형이 앉은 자리에서 흐릿해졌다.
동시에 위기를 느낀 용설이 뒤로 몸을 젖혔다.
하지만 그가 피하기에는 독고무령의 손이 너무 빨랐다.
독고무령은 용설의 목을 두른 천을 잡아당기며 가볍게 손을 떨쳤다. 부드러우면서도 가공할 힘에 용설의 몸이 빙글 돌며 천이 벗겨졌다.
이를 악문 용설은 혼신을 다해 한손으로 천을 잡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독고무령을 쳤다.
독고무령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가볍게 젖히고는, 용설의 가슴을 밀치며, 천에 내공을 집어넣고 뿌리치듯 털었다.
그런데 용설이 천과 옷자락을 함께 잡고 있다 보니 손이 튕겨지며 옷자락까지 찢어져 버렸다.
찌이이익!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빙글 한 바퀴 돈 용설이 정면으로 멈춰 섰다.
독고무령은 천을 손에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용설은 원망어린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와중에도 찢어진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하늘이 무너져도 당황할 것 같지 않던 독고무령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눈 깜박할 순간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보았다.
가슴을 조이고 있는 색 바랜 천. 그리고 그 사이로 튀어나온 하얀 살결.
거기다 얼굴의 반을 덮은 천이 벗겨지면서, 꼬치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였다.
용설은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입을 열었다.
“내가 부모님 시신 앞에서 맹세한 말이 뭔지 알아요?”
“…….”
“원수를 갚을 때까지…… 여자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끝내 용설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독고무령은 그녀를 직시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비록 땟물로 인해 지저분해 보였지만, 분명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그가 본 어떤 여인보다 균형 잡힌 아름다운 얼굴.
그는 한참만에야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천을 내밀었다.
“미처 몰랐군.”
용설은 독고무령을 쏘아보며 천을 홱 낚아채고 돌아섰다.
“그만 나가줘요!”
그녀는 툭 쏘듯이 말하고는 천을 대충 목에 둘렀다.
독고무령은 머쓱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며 지나가듯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얼굴은 좀 씻어라. 눈물 때문에 얼룩이 져서 더 더러워 보이니까.”
용설은 목을 두른 천을 질끈 잡아당겼다.
여자라는 걸 알고도 얼굴이 더럽다는 말을 하다니.
‘바보멍청이!’
제5장 태원의 밤을 얻다
태원 제일의 주루인 선향루 삼 층은 예약을 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항상 만원이었다.
그러나 오늘저녁만큼은 예외였다.
선향루가 삼 층의 열두 개 방 중 열한 개를 비워놓고, 삼 층에서 가장 큰 천향실(天香室)만 손님을 받은 것이다.
그마저도 이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천향실이거늘, 손님은 달랑 여섯 명뿐이었다.
하지만 시비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기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수발을 들었다.
마운방의 방주인 마인걸과 부방주 도무적. 흑호방의 방주인 역초강과 흑호방 최강의 행동대인 흑살당의 당주 곽위. 그리고 백귀회의 주인인 대귀 적충과 이귀 호우당.
태원의 밤을 삼분하는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이 모인 지 일각.
마인걸의 맞은편 우측에 앉아 있던, 칼날처럼 눈매가 찢어진 중년인이 짜증내듯이 입을 열었다.
“마 방주, 대체 온다는 사람이 누군데 이리도 뜸을 들이는 거요? 설마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우릴 부른 것은 아니겠지요?”
대귀 적충의 말에 마인걸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내 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렇지, 두 분을 모셔놓고 어찌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겠소?”
흑호 역초강이 코웃음 치며 말을 받았다.
“흥! 듣자하니 제왕성의 거물 하나가 뒤를 봐준다던데, 그를 믿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마인걸은 속으로, 차라리 노태릉이 시킨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조금도 걱정 없이 목에 힘을 주고 밀어붙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히려 그의 귀에 어떤 사실이 들어갈까 두려워서 이판사판 일을 벌인 판국이었다.
‘지미, 니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한편으로는 약속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독고무령이 야속했다.
‘근데 이 양반은 왜 안 오는 거야? 오다가 똥이라도 밟았나?’
괜히 심통이 난 그는 두 사람을 슬쩍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