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11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11화
111화
지난 수십 년 간, 안개에 가려진 채 아무에게도 본모습을 보이지 않은 곳이 바로 은룡산장이다.
운양은 그들을 조사한다는 것 자체로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래선지 대답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걱정 말게. 아주 철저히 까발려 놓을 테니까.”
독고무령은 그런 운양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무천단 이대의 행방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고?”
“제왕성 놈들에게 당해서 심각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모두 열다섯 명이 살아남았다고 하네. 그중 나호민을 비롯한 아홉은 당장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나았다고 하더군. 막 귀환하려던 차에 일원궁과 서연의 임시총단에 이어 철검보마저 무너지니까, 몸을 추스르며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 같네.”
다 죽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해서 운양에게 알아보라 시켰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한 사람의 고수가 아쉬운 상황. 독고무령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을 데려오도록 하지.”
“태원 동문 쪽의 대원객잔으로 데려오라 했네. 지금쯤 왔을지 모르겠군. 직접 가보겠나?”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물었다.
“전에 말했던 사람들에 대해선 알아봤나?”
운양이 고개를 내밀고 씩 웃었다.
“일단 행적 파악은 거의 다 했네. 이제 그들의 뜻을 알아보는 일만 남았지.”
운양은 말을 맺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문득 독고무령과 만난 첫날이 떠올랐다.
‘아마 자네처럼 지독한 사람하고 마주 앉으면, 누구든 하루를 버티지 못할걸?’
독고무령은 운양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마인걸은 여전한가?”
독고무령의 말뜻을 알아들은 운양이 피식 웃었다.
“원래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힌 자지. 입은 자기가 열어놓고, 다른 놈을 모함한 후 직접 죽여서 노태릉의 눈을 벗어났다네.”
“그래?”
독고무령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운양은 그 눈을 보고 암흑의 공간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누가 암천사신이라 지었는지 몰라도, 이름 하나는 제대로 지었어.’
하지만 곧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그자는 왜?”
“다시 한번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네.”
운양은 문득 마인걸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가 독고무령의 말을 들었다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태원에서 도망치든지, 아니면 두더지처럼 땅속에 처박혀서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그 이전에 심장이 툭 떨어진 시체로 발견될지도.
운양은 그 생각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자네를 반기지는 않을 것 같군.”
독고무령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비틀렸다.
“그럴까? 나는 생각이 다른데 말이야.”
독고무령은 후원으로 가서 유원위를 데리고 나왔다.
그를 동행으로 정한 것은, 마인걸을 만나러 갈 때 그가 지닌 재주가 필요해서였다.
매일 심심할 때마다 주사위를 손가락으로 굴리더니, 그가 바로 대동에서도 알아주는 도박꾼이었던 것이다.
* * *
태원의 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보이는 객잔이 바로 대원객잔이었다.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고,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면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잡아끌지 않았다. 운양이 그곳을 연락처로 정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독고무령은 유원위와 함께 대원객잔으로 들어가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바로 회랑 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 회랑 앞에 한가한 건달처럼 서 있던 자가 독고무령을 보더니 슬쩍 고갯짓을 했다.
독고무령은 그가 가리킨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던 아홉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독고무령과 유원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독고무령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나호민이 마주 인사를 했다.
“살아 있다 보니 보게 되는구먼.”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생은 무슨, 오히려 자네들이 고생했지.”
독고무령은 겉치레 인사는 그쯤에서 멈추고, 한 발 뒤에 서 있는 여덟 사람을 둘러보았다.
섬전기주인 섬전객 유창은 보였지만, 창룡기주 위청학은 보이지 않았다. 상세가 심해서 오지 못했든지, 아니면 영원히 올 수 없는 몸이 되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독고무령의 질문에 나호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두세 사람은 무공을 되찾을 수 있겠는데, 나머지는 힘들 것 같네.”
“창룡기주님은?”
“그는…… 그날 죽었다네. 조원들을 살리기 위해서 혼자 이십여 명의 적을 막았지.”
독고무령은 애도를 표하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들어 나호민을 직시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무천단을 맡게 되었습니다.”
“자네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나호민은 물론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진다.
하긴 운양에게 말하지 말라 했으니, 일원궁으로 간 사람들에게 듣지 못했다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전 단주이신 관 단주께서 일원궁으로 돌아가며 무천패를 넘겼지요.”
그때 나호민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무천단도 해체된 거나 다름없지 않겠나?”
그는 항룡기에 속해 있는 사풍도 지호정이라는 자로, 산서 북단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였다.
그도 물론 독고무령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서문태강을 누르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봤고, 암천사신이라는 별호가 산서를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선 것은, 강하다는 것이 지휘자의 전체 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굳이 독고무령이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유원위가 발끈해서 나섰다.
“백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무천단이 존재하는 한 단주의 위엄은 지켜져야 합니다. 말씀을 조심해주셨으면 합니다, 지 대협.”
바로 그때였다.
“우리는 아직 그대를 무천단주로 인정할 수 없네.”
섬전객 유창이 나직이 입을 열고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유창의 의견에 동조하는지 별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여러분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럼 왜 온 건가?”
“무천단주로서, 그대들에게 명을 내리기 위해 왔소.”
독고무령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유창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훗, 명을 내린다고? 내가 듣지 않겠다면?”
“그럼 법대로 해야겠지요.”
갑자기 방 안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유창은 옆구리의 단창을 잡아가며 잇새로 몇 마디 뱉어냈다.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럴지도.”
비릿한 조소가 유창의 입술 주위에 맺혔다.
“네가 강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 역시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독고무령.”
독고무령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뭐야!”
유창이 와락 표정을 구기더니, 갑자기 손을 쑥 뻗었다.
순간, 앞으로 뻗은 그의 손에서 석 자 길이 단창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누구도 유창의 공격을 말리지 못했다.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번뜩이는 창끝이 독고무령의 코앞에 이르러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창끝이 번개처럼 독고무령을 꿰뚫으려 할 때다.
땅!
맑은 소리와 함께 창끝이 옆으로 튕겨지고, 허공에 손 그림자 하나가 너울졌다.
동시에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읍…….”
유창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세 걸음을 물러선 후 몸을 세우고는, 경악한 눈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유창을 직시했다.
“용서는 한 번뿐이오. 한 번만 더 항명한다면, 그때는 옷자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유창 본인은 물론이고, 나호민과 사공화정을 비롯한 모두가 유창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자그마한 손바닥 형상으로 뚫려 있는 게 보였다.
독고무령이 살심을 품었다면 심장이 부서졌을 터.
모두가 말을 잊고 숨조차 멈추었다.
오직 독고무령의 나직한 목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산서의 주인이 된 제왕성은 물론, 그만큼 강한 또 다른 적과도 싸워야 하오. 상황이 그런 만큼 나에겐 마음의 여유가 없소. 그대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적이 될 것인지, 아니면 친구가 될 것인지.”
단지 목소리가 울릴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식은땀이 났다.
적이면 죽이고, 친구면 함께 간다.
독고무령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런 뜻으로 들린 것이다.
와중에도 나호민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독고무령을 응시했다.
사실 유창이 반항하듯 행동한 것은 그가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항간의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맡기려면 좀 더 확실한 것을 알아야 했다.
제왕성과 대적하려는 독고무령의 의지를!
그런데 말을 듣고 보니 공연한 우려였다.
나호민은 두 손을 맞잡고 포권을 취했다.
“암천의 별. 사람들이 그대를 어두운 하늘에 뜬 별이라 부른다고 하더구려. 저녁 하늘의 별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시오, 단주.”
제4장 마침내 얼굴이 드러나고……
독고무령은 나호민 일행을 밀호방으로 보내고, 유원위와 함께 만금도국으로 향했다.
유원위는 생기 넘치는 눈빛을 반짝이며 졸졸 따라갔다.
“정말 제 맘대로 해도 된다는 거죠?”
달뜬 목소리. 먹이를 앞에 두고 침을 흘리는 배고픈 늑대와 같은 표정이었다.
독고무령은 만금도국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며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백 냥이오, 재주껏 해보시오.”
유원위는 주머니를 받아들며 씨익 웃었다.
만금도국은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독고무령과 유원위가 입구로 다가가자 두 명의 장한이 반쯤 풀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 얼굴 한번 살벌하게 생겼군.”
장한 하나가 독고무령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불빛에 비친 독고무령의 얼굴은 장한이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십여 개의 칼자국이 얼굴 여기저기에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살짝 찢어진 눈매에서 쏟아지는 눈빛은 독사의 눈빛처럼 날카로웠다.
귀면(鬼面). 정말 그 말이 딱 맞는 얼굴이었다.
물론 진짜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기에 인피면구를 하나 구해달라고 했는데, 운양이 하필 그런 모습의 인피면구를 구해온 것이다.
그래도 독고무령은 그런 모습에 만족했다.
특징이 강한 얼굴이라 보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다. 아마 누가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곧바로 인피면구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흐음, 분위기 좋군.”
한 걸음 먼저 안으로 들어간 유원위의 표정이 활짝 피어났다.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일단 지하로 내려갑시다.”
유원위에게 백 냥을 준 것은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가는 자격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유원위는 눈을 번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
도박장 끝에 있는 회랑으로 다가가자 두 명의 장한이 독고무령과 유원위의 앞을 막아섰다.
독고무령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내밀어 돈을 보여주었다.
유원위도 주머니를 슬쩍 흔들었다.
“좀 비켜주지?”
두 장한은 두 사람을 비웃으며 옆으로 갈라섰다.
‘어디서 호구가 둘이나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