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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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07화
107화
그때 황보광의 굵은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그만!”
우뚝 멈춰선 도일성은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고 채찍을 거두었다.
“퉤! 겨우 이겼네.”
비록 편법을 쓰긴 했지만, 승부에서 이긴 것만큼은 분명한 상황. 도일성의 목이 뻣뻣하게 세워졌다.
반면,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표정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예상보다 강한 도일성의 무공에 내심 경악한 눈빛들이었다.
그때 감가기가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내 차례인가?”
황보세가의 사람들 중에서 검을 멘 한 사람이 마주 걸어 나왔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소가주.”
황보광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가 나설 줄은 몰랐다는 듯.
“충경, 당신이?”
그러나 한 사람이 패한 만큼 순순히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좋아, 해보시오.”
의외로 두 사람의 대결은 오 초 만에 결정이 났다.
둘 다 쾌검을 사용하다 보니 오래 끌 것도 없었다.
감가기는 자신의 가슴 옷자락이 찢어진 것을 내려다보고는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내가 졌소.”
하지만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섬단연(一閃斷燕) 우충경. 하남에서 손꼽히는 검객이 바로 그였다. 쾌검만으로 따진다면 능히 열손가락에 드는 절정의 검수.
그런데 그의 어깨가 베어져 있다. 단 오 초 만에.
우충경이 승리하긴 했어도 간발의 차로 겨우 이겼다는 말. 하거늘 누가 감가기를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단주.”
감가기는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독고무령은 담담히 말하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너무 아쉬워할 것 없소. 몇 달만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그리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가기가 물러나자 한무종이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한무종을 비웃었던 자가 도를 쥔 채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나는 위악이라 한다. 강호의 친구들은 붕산도라 부르지. 너도 도를 쓰는 것 같으니 내가 상대해주마.”
붕산도(崩山刀) 위악.
그는 하남에서 알아주는 절정 도객으로 황보세가의 십팔빈객 중 한 사람이었다.
한무종이 그를 보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도 도를 쓰는 사람. 붕산도라는 이름이 강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십 초를 상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바로 붕산도 위악이다.
하지만 긴장보다는 투지가 끓어올랐다.
지금의 그는 전날의 술주정뱅이 한무종이 아니다.
까짓 거, 죽음을 각오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한무종이오.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거요.”
위악은 부릅뜬 눈으로 한무종을 노려보며 도를 잡아 뺐다.
“칼이 있는데 말로 할 이유는 없겠지. 칼을 빼라, 애송이.”
한무종은 그를 바라보며 폭이 좁은 칼을 빼들었다.
도신에서 싸늘한 예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도첨에 뭉쳐 반짝였다.
순간 한무종이 팔목을 비틀며 위악을 향해 쇄도했다.
쉬이익!
위악은 빠르고 강한 한무종의 도세에 반사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쩡!
도와 도가 부딪치며 맑은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한무종은 숨 쉴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연달아 십팔 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위악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도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귀청을 찢을 듯이 울리는 충돌음.
전각 안을 난자하는 두 사람의 도기가 기둥의 등불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번뜩인다.
흐르던 대기가 갈기갈기 찢기며 흩어지고, 번뜩이는 도광은 독 오른 아수라의 손톱처럼 상대를 향해 밀려가고 부서진다.
직접 도가 부딪치지 않아도 이명처럼 계속 울리는 도의 울음소리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한무종은 위악이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 모습이 위악을 질리게 했다.
처음 칠팔 초까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받아냈다.
그러나 십 초가 넘어가자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의 중심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기세의 차이였다.
한무종은 지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도를 휘두른다.
하지만 위악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비무로만 생각할 뿐이다.
당연히 기세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그나마 위악이 내공에서 약간 우세하기에 당장 표가 날 정도로 밀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위악이 눈을 부릅뜨고 한무종의 도세를 파고들었다.
“이놈!”
산조차 무너뜨린다는 붕산의 도세!
쩌저정!
얼음장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한무종의 몸이 일 장가량 밀려났다.
기회라 생각한 위악은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리며 전력을 다해 도를 내리쳤다.
순간, 자세를 낮춘 한무종이 마주 쇄도하며 아래에서 위로, 도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한무종의 방어를 무시한 공격에 주위에서 다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으음…….”
설마 억지에 가까운 수를 쓰며 함께 죽자고 할 줄이야.
찰나 간 위악의 도첨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흔들림. 틈이라고 해봐야 바늘 끝도 파고들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한무종의 도는 바늘 끝 같은 그 틈을 파고들며 위악의 도를 옆으로 밀어내고는, 도신을 따라 죽 올라갔다.
취아앙!
위악의 두 눈이 홉떠지는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한무종의 도가 사선의 마지막 끝점에 도달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무기를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서로의 몸을 후려쳤다.
퍼벅!
쿵! 털썩!
한무종과 위악이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나가떨어졌다.
누가 이긴 것인가?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는 동안, 정적이 전각 안에 늘어선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내리눌렀다.
먼저 일어선 사람은 공력에서 앞선 위악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무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뒤늦게 일어선 한무종도 싸늘한 눈으로 위악을 마주보았다. 얼굴은 창백하고 옷도 여기저기 찢겨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저런……!”
사람들은 위악을 바라보았다. 위악의 어깨와 가슴 옷자락에 실선이 하나 그어져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선을 타고 붉은 핏물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결국, 그의 갈의가 검붉게 변하며 점점 아래쪽으로 퍼져나간다.
그제야 한무종은 도를 도집에 넣으며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내 운이 당신보다는 좋았던 것 같군.”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위악의 두 눈이 거센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질 즈음에는 그의 몸마저 흔들렸다.
그때 황보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위악에게 말했다.
“상처를 먼저 돌보시오, 위 대협.”
위악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면목 없소이다, 소가주.”
두 사람이 위악에게 다가갔다. 몸이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혼자 움직이기 힘들 만큼 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황보광은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 대 일.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 가슴이 무거워졌다.
“내가 이겨야 겨우 비기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서 무거운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독고무령은 묵직한 걸음을 옮기는 황보광을 보며 뒷짐 진 손을 풀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요.”
그 말은 상수가 하수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을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
황보광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훗, 오랜만에 투기가 끓는군.”
순간, 그의 전신에서 무거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독고무령은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거리가 이 장으로 줄어들자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가 나아가는 만큼 대기가 철벽처럼 전면으로 밀려갔다.
후우웅!
황보광은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찰나, 독고무령의 우수가 허공으로 들리고, 공간이 이지러졌다. 태천일심의 기운이 실린 탈월인이었다.
“좋아!”
황보광은 대뜸 한소리 내지르고는 쌍권을 뻗어 허공을 두들겼다.
콰아아아!
대기를 터트릴 것처럼 밀려간 두 사람의 기운은 정확히 중간에서 부딪쳤다.
쾅!
황보광은 이를 악문 채 한 걸음을 물러섰다.
독고무령은 물러서는 황보광을 향해 다시 한 걸음 내딛고는, 이번에는 우수와 좌수를 번갈아 내질렀다.
구명절혼수 중 비격뢰(秘擊雷)와 절명추(絶命錐)였다.
상대는 황보세가의 후계자. 어설픈 우세로는 승복시키지 못할 터. 완벽한 승리만이 불필요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내질러지는 독고무령의 손에서 팔성의 내력이 쏟아졌다.
뒤틀리는 대기! 눈앞이 이지러진다!
눈을 부릅뜬 황보광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문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쩌저적! 콰광!
찰나 간에 사오 초의 격돌이 이뤄졌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황보광은 끝장이라는 심정으로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독고무령의 두 손이 기이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무수한 수영이 허공을 뒤덮었다.
마침내 수천제마구겁무의 일식이 펼쳐진 것이다.
고오오오!
순간, 황보광의 부릅뜬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허공을 가득 뒤덮은 것은 단순한 손 그림자가 아니었다.
만사만악(萬邪萬惡)을 제압하는 천장(天將)의 일수!
마주한 것만으로도 심력이 짓눌리고 온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마, 맙소사!’
황보광은 아연한 표정을 지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패황권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패황권력은 상대의 공세를 조금도 차단시키지 못했다.
퍼버버벅!
일순간, 독고무령의 손 그림자가 황보광의 몸을 연달아 두들기자, 황보광의 몸뚱이가 사정없이 이 장가량 튕겨졌다.
“소가주!”
“멈춰라!”
대경한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보광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버럭 고함을 질렀다.
“머, 멈춰! 물러서!”
무기를 빼들고 독고무령을 빙 둘러싼 황보세가의 고수들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황보광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물러서라 하지 않소!”
황보세가의 고수들은 주춤거리며 조금씩 물러났다.
황보광은 그 사이 몸을 일으키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오연히 서 있는 독고무령의 모습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달려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
자신이 항상 꿈꿔왔단 그 모습이다.
황보광은 눈꺼풀을 잘게 떨며, 악문 잇새로 한마디를 뱉어냈다.
“내가…… 졌다.”
독고무령은 황보광의 패배선언을 들으며 두 손을 맞잡아 포권을 취했다.
“갈 길이 바쁘니 이만 가겠소. 언제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그러고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황보광이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이름이 뭔가?”
“무령. 일단은 그렇게만 아시오.”
알쏭달쏭한 대답.
하지만 황보광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던가? 그럼 언제든 본가로 와라. 기꺼이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독고무령 역시 황보광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미련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추월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독고무령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마 뒤에서 황보광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한동안 더 바라봤을 것이었다.
“루주, 저 사람에 대해 아나?”
추월은 몸을 돌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릅니다.”
“어이없군, 아우를 혼쭐내러 왔다가 내가 혼쭐난 꼴이 아닌가? 크, 크, 크하하하! 거 정말 시원하군. 형편없이 패했는데 왜 이렇게 시원하지?”
추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미친 듯이 웃는 황보광을 쳐다보았다.
“화나지 않으세요?”
“화를 내야 하나? 힘이 없어졌는데 왜 화를 낸단 말이냐? 아니군. 화를 내야겠군. 힘이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이런 못난 놈! 그렇게 잘난 척해놓고 십 초도 못 받고 지다니! 바보 같은 놈!”
황보광은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화를 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그의 걸음에 청석으로 된 바닥이 파일 것처럼 쿵쿵거렸다.
“본가로 돌아갑시다! 정이를 끌고 오시오! 루주, 더 강해질 때까지 오지 않을 거네. 잘 있게나.”
추월은 추월루가 정적에 잠긴 뒤에야 후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하 별실로 들어갈 때까지 조병탁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병탁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두 눈이 조병탁을 향했다.
“숙부, 그가 뭘 물어보던가요?”
조병탁이 곤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루주에 대해 묻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