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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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 * *
퍽!
날아간 찻잔이 이마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떨어졌다.
“내 네놈을 믿었거늘, 그딴 놈들에게 뒤통수나 맞다니!”
노태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다.
헌원조는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 않은 채 잇새로 대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님.”
노태군은 뱀눈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황자악은 창백한 얼굴로 희미한 조소를 짓고 있다가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노태군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자악을 바라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놈도 크게 다르지 않아! 철검보를 응징했다고는 하나 피해가 너무 많았어. 더구나 어린놈에게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으니……. 쯔쯔쯔, 하긴 너희들을 너무 믿은 내 잘못이 더 크다고 봐야겠지.”
“송구하옵니다, 아버님.”
황자악이 고개를 숙이지만 노태군의 눈빛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헌원조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위지천백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노태군의 한광이 일렁이는 두 눈이 헌원조를 향했다.
“위지천백에게 당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냐?”
“귀원장은 저들의 눈에 쉽게 띌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제왕성의 무사들이 서연을 친 터라 확신이 없으면 쉽게 움직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관천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지 겨우 서너 시진 만에 말입니다.”
노태군의 차가운 눈빛에서 사이한 광망이 일렁였다.
그는 헌원조의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네 말은, 너희들에 대한 것을 제왕성이 무천련에게 흘린 것 같다, 그 말이냐?”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버님. 그들은 귀원장이 당한 후로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황자악도 넌지시 한마디 했다.
“솔직히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철검보를 칠 때도, 그들이 우리보다 가까운 거리인데 우리가 일을 거의 다 처리한 상태에서 나타났습니다.”
노태군의 하얀 이마에 골이 파였다.
“그리해서 위지천백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노태군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사이한 눈빛이 얼음구슬 같은 두 눈에서 쏟아졌다.
“설마…… 놈이 매미가 되어보고 싶어서……?”
헌원조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그는 기회만 되면 껍질을 벗고 날아볼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자입니다. 누구보다 아버님이 그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놈을 잘 알지. 누구보다…….”
노태군은 나직이 입을 열며 하얀 이로 입술의 부푸러기를 물어뜯었다.
극한의 분노. 희열에 가까운 살욕(殺慾)의 발산.
헌원조와 황자악은 그러한 버릇의 의미를 잘 알기에 조용히 노태군의 반응을 기다렸다.
노태군은 반각가량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놈이다, 위지천백은.”
그러고는 헌원조와 황자악을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더욱 두려운 눈빛이 두 사람을 훑었다.
“일단 조사한 후 조치를 취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동안 몸을 추슬러라. 여차하면 산서로 가서 놈이 허튼 마음을 못 먹게 막아야 할 테니까.”
모험에 가까운 말 몇 마디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헌원조는 묵직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예, 아버님.”
황자악은 헌원조가 다시 살아났다는 게 약간 불만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제8장 광풍(狂風)이 불어오기 전에……
산서에 몰아닥친 혈풍이 강호를 뒤흔들었다.
늦겨울에 점화된 불길이 삭풍을 타고 산서 전역을 불태운 상태.
하남(河南), 하북(河北), 섬서(陝西)의 강호세력들은 산서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며, 핏빛 불길이 자신들을 향해 번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무천련의 오대세력이 차례차례 무너져 버렸다.
백마방을 시작으로, 전궁산장, 일원궁, 철검보까지.
그나마 남쪽에 치우쳐 있던 화천문만이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그들조차 문을 걸어 닫은 채 제왕성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너무 어이없는 결과에 강호인들은 숨을 죽였다.
적어도 삼 년은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던 무천련이 한 달도 안 돼 무너지다니!
진정 제왕성의 힘이 그토록 강하단 말인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봄이 완연해지자, 강호세력들은 산서의 불길이 너무 일찍 꺼진 걸 걱정했다.
제왕성이 무천련의 잔존세력을 쓸어버리고 산서 강호를 완벽히 통일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들이 천하를 향해 욕망의 칼을 들이댈지 누가 안단 말인가.
특히 하남의 종주 삼성맹(三聖盟), 섬서 북단의 지배자 신왕벌(神王閥), 하북제일세 천룡방(天龍幇)은 제왕성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 달리 산서 강호는 너무나 고요했다.
일원궁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화천문이 공격당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무천련 임시 총단이었던 서연의 대풍장 정문에, 산서 동부를 총괄하는 제왕성 동부 총타의 현판이 내걸렸을 뿐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정적.
암울한 어둠의 시간은 예상보다 길게 갔다.
* * *
이름 : 독고무령.
나이 : 이십 대 중반.
지위 : 철풍검대 구조 조장이 된 지 석 달 만에 철풍검대의 대주가 됨. 그 후 무천련 대회합에서 백마방주 서문태강을 물리치고 무천단 철검기의 기주로 임명되었음. 실종 당시 무천단 삼대주.
주시 이유 : 본성의 무사들은 그를 사신(死神)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무천련의 잔당들은 그를 암천의 별(暗天之星)이라 부르며 앞장서주기만 바라고 있음. 혹자는 두 이름을 합해 암천사신(暗天死神)이라 부르는 바, 들불처럼 번지는 무천련 잔당들의 희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자임.
위지천백은 종이를 내려놓고 공노명을 바라보았다.
“암천사신이라……. 어디에서 튀어나온 자인지 알아보았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만, 그 자의 출신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주.”
“본성의 장로와 도혼단주를 비롯해서 무사 백수십 명을 죽인 자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게 군사로서 할 말인가?”
“면목이 없습니다.”
“흐음…….”
당장이라도 노기를 터트릴 것 같던 위지천백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콧소리를 흘렸다.
“아주 재미있는 놈이 나타났군.”
공노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위지천백을 올려다보았다.
산서의 진정한 제왕이 된 사람의 눈빛이 반짝인다. 분노가 아닌 흥이 동한 눈빛이다.
절대자(絶對者)의 여유(餘裕).
안도하는 한편으로,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 놈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있으니 곧 자세한 신상정보가 밝혀질 것입니다, 성주.”
“이놈에게 노태군의 아이들도 상당수 죽었다지?”
“철검보를 쳤던 사백의 은룡산장 무사 중 백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사십여 명이 놈에게 죽었다 합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으로는, 셋째인 황자악도 놈과 싸워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위지천백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걸렸다.
“그럼 우리만 손해 본 것은 아니로군.”
“우현에서 죽은 자들까지 삼백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아마 지금쯤 분노가 머리꼭대기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하찮게 생각하던 강호 세력에게 당했으니 더 화가 나겠지, 후후후후…….”
현재 산서의 정세는 한 사람이 날뛴다고 해서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천련의 잔당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왕성이 신경 쓸 곳은 오직 하나, 노태군의 은룡산장뿐.
“어쨌든 군사는 이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는 하되, 놈을 잡겠다고 피해를 자초하지는 말도록 조심해라. 이제부터는 무천련보다 훨씬 껄끄러운 노태군을 상대해야 하니까.”
“존명!”
위지천백은 고개를 숙인 공노명을 바라보며 느릿하니 말했다.
“이제부터…… 노태군의 세력이 산서로 들어오면 적이라 생각하도록.”
흠칫한 공노명이 이를 지그시 물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성주.”
위지천백은 공노명이 나가자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이라……. 비록 적이긴 하지만, 어떤 놈인지 몰라도 대단하군. 이런 놈 몇 명만 있으면 노태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때 밝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위지천백은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활짝 핀 꽃처럼 웃으며 걸어오는 소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딸, 위지선유였다.
그녀를 본 순간 위지천백의 바위 같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허허허, 어인 일로 우리 공주께서 여기까지 오셨나?”
“피이, 바쁘시면 갈게요.”
“아니다, 아니야. 바쁜 일은 다 끝났다. 그래, 그냥 놀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이더냐?”
위지선유는 위지천백의 코앞까지 다가온 후, 잔뜩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무천련과의 싸움이 끝났으니 태원에 놀러가도 되죠?”
위지천백은 짐짓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독이 오른 무천련의 잔당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는 판이다. 놈들을 다 잡을 때까지 태원에 가서는 안 되느니라.”
위지선유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위지천백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끝나면 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싸움이 끝났을 뿐이다. 아직 한두 달은 더 있어야 조용해질 게야. 그때는 내 너의 부탁을 꼭 들어주마.”
“두 달이면 너무 긴데…….”
“그럼 한 달이라도 기다리려무나.”
“한 달이요? 정말 한 달 후에는 마음대로 다녀도 돼요?”
“대신 아버지가 붙여주는 호위들을 저번처럼 따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된다. 알았지?”
위지선유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펴졌다.
“알았어요, 아버지.”
위지천백은 조용히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오빠는 좀 어떠냐?”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더니, 요즘은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 바람에 저만 심심하지 뭐예요.”
위지천백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고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성아가 마음을 잡았으니 이놈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태강을 이긴 이놈만 성아가 잡는다면, 본성에 대항하려던 자들의 사기가 단숨에 꺾이겠지.’
둘이 비슷한 나이다. 한 사람은 산서의 절대자 제왕성의 후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암천에 떠오른 신성이다.
만일 자신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훨씬 쉽게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 위지선유가 고개를 쏙 내밀고 종이를 쳐다보았다.
“독고…… 무령? 그게 누구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위지천백은 종이를 접으며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네 오빠가 이자만 잡는다면 하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와아, 그럼,오빠가 그자를 꼭 잡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위지선유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비틀린 운명이 그녀를 휘어 감기 시작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 * *
철검보를 떠난 사람들은 양천에서 백 리 떨어진 백천산의 계곡에 있는 산골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곳이어서 인근 사람들조차 계곡 안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집은 다해봐야 이십여 호 정도. 마을 사람은 칠십여 명가량 되었다.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한 사람은 밀호방의 정보원인 모이곡이란 자였는데, 그가 바로 북을 쳐서 적의 공격을 알린 사람이었다. 백천산 계곡은 그의 고향이었다.
독고무령은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몇 달 지내시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공자.”
모이곡이 그리 말했는데,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몇 년이라도 지내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평온한 곳이었다.
“좋군. 일단 거처부터 마련해야겠어.”
그는 계곡 한쪽에 통나무집을 세우기로 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마을사람들도 조금씩 독고무령 일행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들에게 건넨 상당한 양의 은자 때문이 아니었다.
돈이란 주었다가 뺏어갈 수도 있는 것. 그보다는 두렵게 여겼던 무사들이 마을사람들의 집을 빼앗지 않고 통나무집을 짓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나흘 만에 통나무집 열두 채가 지어졌다.
독고무령은 통나무집이 다 지어지자, 철검보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사람들을 내보냈다.
밀호방의 정보원이 간간이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철검보가 불타 오른 지 이제 겨우 닷새째, 위험하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철검보의 상황이 자세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