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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95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3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95화

 

95화

 

 

 

 

 

 

“벽산패도 유가중이 누군지 모르시는 분은 없겠지요? 그가 대주님의 손에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주님은 쉴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철검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라! 벽산패도가 죽었다고?”

 

“그게 정말인가!”

 

유가중은 제왕성 십이장로 중 한 사람이다. 오대세력의 주인들조차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초절정의 고수.

 

그런 자가 독고무령에게 죽다니!

 

그때 앞서가던 독고무령이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제왕성의 장로였소?”

 

사공화정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주.”

 

독고무령은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제법 강하다 했더니…….”

 

너무 담담해서 일반무사 하나 죽인 것처럼 들린다.

 

철검전에 남은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독고무령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심지어 관초악과 정일청조차 유가중의 죽음은 알지 못했기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팔십 명을 넘게 죽였다는 말이, 과장한 게 아니라 정말이었나?’

 

 

 

철검전을 나온 독고무령은 대원들을 쉬게 하고 곧장 구양손을 찾아갔다.

 

구양손은 침중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내상은 그럭저럭 나았지만, 예상대로 내력을 회복하지는 못한 듯했다.

 

“왔구먼.”

 

“몸은 좀 어떻습니까?”

 

“어떻긴, 살 만하지.”

 

“단전은 좀 차도가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도 천운인데 뭘 더 바라겠나? 너무 걱정 말게. 오히려 내력을 잃으니 마음이 그만큼 더 편해진 것 같네. 신경을 그만큼 안 써도 되니 말이야,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빛 한구석에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독고무령은 모른 척 담담히 말했다.

 

“좌우간 몸이나 보전하십시오. 혹시 압니까? 저에게 갑자기 재주가 생겨서 대주님의 단전을 완전히 고쳐줄지.”

 

구양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다 곧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전은 다른 곳과 달라 고치기가 쉽지 않다. 독고무령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로선 그나마 이삼 할의 내력이라도 되찾아서 건강을 잃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운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좌우간 말이라도 고맙네.” 

 

독고무령은 그런 구양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은 아시겠지요?”

 

구양손의 어깨가 축 처졌다.

 

“후우, 내가 어찌 모르겠나? 서연도 넘어가고, 일원궁도 당하고, 거기에 전궁산장마저 당했는데. 정말 큰일이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십시오.”

 

구양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응? 하하하, 내가 왜 자네를 오해한단 말인가? 걱정 말고 말하게나.”

 

독고무령은 구양손의 다짐을 받은 후에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라도 철검보가 공격을 받으면 무조건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시고, 준비할 것이 있으면 미리 해놓으십시오.”

 

구양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왕성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하나? 무천련은 이제 유명무실해졌는데도?”

 

“제왕성 때문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일원궁을 공격한 자들, 우현의 장원에 있던 자들, 제가 잘못 알지 않았다면 결코 제왕성의 무사들이 아닙니다.”

 

구양손의 눈이 커졌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왕성 말고 산서에서 일원궁을 뒤엎을 수 있는 세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독고무령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럼 대체 누가……?”

 

“아직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왕성, 아니 정확히는 위지천백의 배후와 연관이 있는 자들일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지천백의 배후?”

 

구양손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았다.

 

산서의 중견무사 중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헛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건 헛소문이라고들 하던데…….”

 

구양손 역시 헛소문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배후에 대한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독고무령이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그들이 누군지 확실히는 모릅니다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꼭 제 말대로 해주십시오. 그들도 많은 피해를 입은 만큼, 분명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 할 겁니다.”

 

“정말…… 우리가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보나?”

 

“놈들이 공격하면 제왕성의 무사들마저 움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안타깝지만 현 전력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썬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터전을 버리고 빠져나가라는 말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구양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왕성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거기에 배후마저 있다면 지금으로썬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공격을 받는다면 도망이라도 쳐야 복수를 하든 뭘 하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으으음, 알겠네. 형님과 상의해보지.”

 

 

 

구양손의 방을 나온 독고무령은 철풍검대의 거처로 갔다.

 

무천단의 삼대가 모두 그곳에 거처를 정한 상태였다. 철풍검대 중 반 가까이 손실을 입은 상황, 그들이 머무는데 방은 부족하지 않았다.

 

독고무령이 들어가자 조한상과 종리청 등 철풍 구조의 조원들이 죽은 부모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부상이 심해 누워 있던 사람들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무사들과 달리 활기가 넘쳐 보이는 모습. 단순한 동료가 아닌 가족 같은 분위기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다행히 안 보이는 사람은 없군.”

 

조한상이 어깨를 한번 으쓱 추켜올렸다.

 

“대주와 떨어져 있으니까 더 불안하지 뭡니까. 다음부터는 꼭 따라다닐 겁니다, 대주.”

 

“남의 신세를 안 지려면 앞으로 지금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수련해야 할 거요.”

 

“까짓 거, 하죠 뭐.”

 

독고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몇 독고무령을 알아본 사람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포권을 취했다.

 

독고무령도 마주 포권을 취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서연에서 철검보로 온 사람들은 철검보와 화천문과 전궁산장의 무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원궁의 무사들은 일원궁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총단이 당했으니 그들을 붙잡을 수도 없었겠지.

 

‘이곳에 있는 자들만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을까?’

 

철검보에 있는 무사는 대충 계산해도 팔백 정도다. 그중 쓸 만한 자들은 사오백. 서연에 있는 제왕성의 무사들조차 상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적은 제왕성만이 아니다. 단숨에 일원궁을 무너뜨린 자들이 제왕성과 함께하고 있다.

 

태양은 천공에 떠 있는데 짙은 어둠이 철검보에 내려앉은 듯하다.

 

독고무령의 마음도 깊게 가라앉았다.

 

무천련의 힘을 이용해 제왕성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힘든 상황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무천련에 몸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단숨에 큰 힘을 얻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빨리 진행되어서 미처 대책을 세울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독고무령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짧은 시간치고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강호에 나온 것은 이제 겨우 사 개월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제 시작일 뿐인 것이다.

 

‘위지천백, 지금은 웃어라!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독고무령은 마음을 냉정하게 가라앉히고, 뒷짐 진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그때부터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할 것이다.’

 

 

 

* * *

 

 

 

이틀이 지나도록 제왕성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은 적들이 아직 서연에 있다는 말뿐이었다.

 

철검보에 있는 무사들의 얼굴에서 어둠이 조금 걷혔다.

 

그런 와중에 비관적인 말들이 돌았다.

 

 

 

-무천련은 이제 끝났다.

 

-제왕성이 더 이상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살려면 제왕성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제왕성이 본보기로 철검보를 쓸어버릴지 모른다.

 

 

 

말단 무사들 입에서 나온 말이 빠르게 번지자, 간부들이 순찰을 돌며 확산을 차단했다.

 

하지만 한번 번지기 시작한 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더니 오후가 되자 중견무사들조차 반쯤은 인정한 눈치였다.

 

결국 구양은은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벽도정과 설자웅과 관초악을 불렀다.

 

그런데 의외로 관초악이 먼저 철검보를 떠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단 일원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구양은의 굳은 얼굴이 부서질 것처럼 잘게 흔들렸다.

 

구양손을 통해 독고무령의 말을 들은 터다. 사실이라면 언제 적들이 철검보를 칠지 모른다.

 

하거늘 무천단을 이끄는 자가 떠나겠다고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후우, 관 단주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네만, 놈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네. 게다가 자칫하면 가는 길에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네.”

 

“여기 있으나 궁으로 가나, 어차피 적을 상대해야 한다면, 죽더라도 형님을 한번 보고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만일 운이 좋아서 살아난다면 힘을 더 모은 다음 놈들에게 대항할 생각입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일원궁이다. 그로 인해 서연에 있던 일원궁의 무사들도 철검보로 오지 않았다.

 

이제 관초악과 관조운을 비롯한 무천단의 무사들마저 간다면, 일원궁은 완전히 철수하는 셈이었다.

 

워낙 강경한 표정.

 

구양은은 자신이 붙잡는다고 해서 관초악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긴 사경을 헤매는 형이, 무너진 가문이 걱정되어 간다는데 뭐라 할 건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관초악이 그리 말하자, 벽도정이 눈치를 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만 본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 무사들을 재정비해서 나중에 힘을 보태겠네, 구양 보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구양은은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들을 재정비해서 돕는다고?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이라는 것은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동한 이상 잡는다고 해서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구양은은 반쯤 포기한 채 설자웅을 바라보았다.

 

전궁산장도 일원궁과 마찬가지의 상황.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설 장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자웅이 입술을 씹었다.

 

제왕성에 의해 청강산의 터전이 짓밟혔다. 마음 같아서는 서연으로 쳐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불안에 떨며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는 이상 그리 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나도 돌아가겠소. 단, 무사들을 반만 데려가겠소. 그리고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돌아오겠소.”

 

가끔은 독불장군처럼 고집을 피우고 쓸데없는 말을 해서 남의 속을 잘 긁는 설자웅이다. 그러나 맺고 끊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자신의 터전이 짓밟힌 이상 그는 제왕성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사람이 아니었다.

 

반이면 오십 명 정도. 모두가 일류고수다.

 

구양은으로선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알겠소이다, 장주.”

 

 

 

독고무령이 수장회의 결과를 안 것은 일각 후였다.

 

구양소현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소식을 전했다.

 

“대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아요?”

 

“왜? 사람들이 자신들 문파로 돌아가겠다고 하나?”

 

구양소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떻게 알지?”

 

들어서 안 것이 아니다.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지 않은 것은, 붙잡는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관 단주도 가겠다고 하던가?”

 

“어? 예, 그러던데요.”

 

독고무령은 잠시 생각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사혁이 눈을 위로 치켜뜨고 물었다.

 

“무령, 어디 가려고?”

 

“단주를 만나야겠다.”

 

“소용없을 걸? 그 양반도 고집이 제법 세더라고. 더구나 형이 사경을 헤맨다는데…….”

 

“그게 아니다. 좌우간 갔다 와서 이야기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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