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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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3화
93화
* * *
석양을 지켜보던 위지천백이 천천히 돌아섰다.
“태사자 헌원조가 나왔다고?”
“예, 성주.”
“의외군. 노태군이 그를 보내다니.”
헌원조는 노태군의 다섯 양아들 중 첫째다. 관천악도 없고, 세력의 반이 빠져나간 일원궁을 치는 일에 왜 그를 보냈을까?
위지천백은 그 일이 단순하게 보이지 않았다.
“왜 그를 보냈다고 보는가?”
“그만한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담담히 반문하는 위지천백의 입가로 보일락 말락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은룡산장의 피해는 어느 정도지?”
“삼백 중 칠팔십 정도를 잃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군. 일원궁이 그 정도였나?”
“본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힘을 키워온 자들입니다. 그 정도는 발악을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천악을 비롯해서 전력의 반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무천련의 최대세력이다. 그런 일원궁을 무너뜨리면서 칠팔십의 피해를 입었거늘, 그조차 많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관천악이 알면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져 쓰러질 말이었다.
“하긴……. 그래, 저들의 현재 위치는?”
“우현 동쪽에 있는 귀원장에 있습니다.”
위지천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쯤 감았다.
공노명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저들의 위치를 관천악에게 알려주라 했습니다.”
눈을 반쯤 감은 위지천백의 잇새로 잔잔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후후후, 관천악이 예상보다 강하면 좋겠군.”
“철검보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그들까지 동원할 겁니다.”
“흠, 좋아. 잘하면 노태군의 한 팔을 잘라버릴 수도 있겠어.”
“최소한…… 손가락은 잘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를 제 것인 양 생각하는 노인네가 성질 좀 나겠군.”
“완벽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작은 손실도 참지 못하는 법이지요. 피를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 할 겁니다.”
위지천백의 눈이 다시 석양을 향했다.
조금 전보다 더 붉어져서 핏덩이가 매달려 있는 듯했다.
“준비하게. 진짜 전쟁은 서연을 차지하면서부터 시작이니까.”
“예, 성주. 저들은 아마 우리 계획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후후후, 그래야지. 지금까지는 아주 잘 되고 있어.”
“하늘도 성주님을 돕는 것 같습니다.”
“나를 돕는 것보다 저들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겠지.”
싸늘한 웃음을 흘리던 위지천백이 공노명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좌비향의 행적은 찾지 못했나?”
“태원 쪽으로 간 것을 본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 이후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흔적을 쫓고 있으니 곧 또 다른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흐음, 철저히 알아보되, 애꿎은 심력을 낭비하지는 말게. 노태군이 움직인 이상, 앞으로는 그들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
“적절히 조치하겠습니다, 성주.”
공노명도 모르지 않았다.
노태군이 움직인 일에 비하면 좌비향 이십여 명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만 없었다면 그 일을 완전히 젖혀놓고 노태군을 살피는 일에 전념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제왕성에 무기를 대주던 장가장의 참화 소식이었다.
문제는, 그 일이 벌어진 시기와 좌비향이 사라진 시기가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좌비향의 무력이라면 장가장 정도는 간단하게 멸망시킬 수 있다. 그들이 장가장과 싸워서 생존자 하나 없이 전멸 당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연관되어 있다면?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왜? 무슨 이유로 한편인 장가장과 좌비향이 싸운단 말인가?
백 번을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고, 싸울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공노명은 이상할 정도로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으음, 사람을 보내서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어쨌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제왕성에 무기를 대주던 곳이 참화를 당했다. 사람을 보내서 위로해주는 게 당연했다.
계속 무기를 만들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만일 장가장이 무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무기를 공급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공노명은 문득 한곳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진가철방만 끌어들일 수 있으면 최상이거늘. 성주께서 그 일은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니 내가 먼저 나설 수도 없고…….’
* * *
사상자를 정리하고 핏물을 대충 씻어내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천악은 태응봉을 뒤덮은 피비린내를 맡으며 피해상황을 보고 받았다.
분노에 치가 떨렸다.
극한의 인내로 짓누르건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분노의 열기는 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심장을 태워버릴 정도로.
‘죽일 놈들!’
근 일천에 달하던 일원궁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사백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반 이상이 하인과 여인과 어린아이였고, 목숨이 붙어 있는 무사들은 태반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가족들 대부분이 비밀거처로 피신해서 살아남았다는 것과, 산 너머 계곡에서 비밀리에 기르던 일백 무사는 공격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관초악은 이를 갈며 적의 흔적을 뒤쫓게 했다.
하지만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적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추격조를 이끌고 나간 추혼당주 여계명이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놈들이 우현의 산속에 있다고?”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태일전을 울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여계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궁주! 사십 리 떨어진 산속에서 부상을 입은 비봉문의 무사 하나를 발견했사온데, 생전처음 보는 자들 수백 명이 우현 동북쪽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그는 단지 장원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들이 죽이려 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비봉문이라면 우현 근처에 있는 소문파다. 그곳의 제자라면 장원으로 들어간 자들이 인근 문파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산적인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수백 명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제왕성 놈들이 또다시 뒤통수칠 기회를 노리며 숨어 있는 듯하다.
관천악은 중년인의 뒷머리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무사들을 모아라! 즉시 놈들을 칠 것이다!”
“예, 궁주!”
“철검보에도 전서구를 날려라! 우현이면 그곳에서도 멀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줄 것이다! 죽일 놈들, 내 그놈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니라!”
“서연에도 알리오리까?”
서연에서 고수들이 온다면 좀 더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일원궁 무사들을 이끌고 나온 상황. 무사들이 더 빠져나오면 자칫 제왕성의 역습에 당할지 몰랐다.
“그깟 놈들을 치면서 서연까지 연락할 건 없다! 우리와 철검보면 충분해! 내 이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일 것이니라!”
누구도 관천악의 분노를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적이 제왕성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일원궁을 공격할 자들이 제왕성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저도 가겠습니다, 아버님!”
한 사람이 분노한 관천악 앞으로 나섰다.
팔에 피 묻은 천을 두른 서른 전후의 장한이었는데, 얼굴이 관천악과 많이 닮아 있었다.
“조광, 너는 이곳에서 상처를 돌보도록 해라.”
“이 정도 상처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관천악의 관조광의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한 사람의 고수가 아쉬운 상황.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관조광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관조광은 일원궁의 다음 대를 이을 장자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명이다, 조광! 너는 이곳에서 네 어미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궁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해라!”
관조광은 이를 악물었다.
밤새 벌어진 격전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적은 너무나 강했고, 자신은 너무 무기력했다.
특히 삼태상 중 한 사람인 덕천기를 십여 초 만에 죽인 자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능히 용화검제라 불리는 부친에 비할 수 있는 고수.
관조광은 그의 검이 자신을 향하자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덕천기는 결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십여 초 만에 죽었거늘, 자신이 그의 검에서 목숨을 구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겨우 그의 눈을 벗어난 관조광은 천장의 대들보에 몸을 숨기고 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적이 물러간 후 한참 만에 밖으로 나온 그는 무릎을 꿇고 참담한 울음을 터트렸다.
죽을 때까지 싸우다 처참하게 죽어간 수하들의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과 술잔을 기울였던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그들을 보니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대들보 위로 도망간 자신이 비참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는 한참만에야 울음을 멈추고, 수하들의 시신에 대고 맹세했다.
다시는 수하들보다 먼저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겠노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지 않겠노라고!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번만큼은 아버님이 이해해 주십시오.”
관천악은 그제야 관조광의 눈빛이 전과 다름을 느꼈다.
항상 강하기만 하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고통과 번민이 정제된 눈빛.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담긴 눈빛이다.
관천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나 어떤 경우든 목숨을 부지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아버님.”
관조광은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시는 대들보에 숨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각 후.
관천악은 일원궁의 무사 이백과 서연에서 일원궁을 돕기 위해 온 삼백 무사와 함께 일원궁을 출발했다.
그 시각, 육백에 달하는 제왕성의 무사들이 서연의 무천련 임시 총단으로 접근했다.
제7장 명분은 얻었으나, 어둠이 하늘을 덮으니……
무천단은 삼백 리 길을 달리며 잠깐씩 운기를 해서 피로와 잠을 해결했다.
계곡을 지나고 몇 개의 산을 넘는 강행군이었다.
잠깐만 멈추어도 땀에 젖은 옷 위로 서리가 내렸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은 그나마도 편히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 덕에 여섯 시진이 지날 무렵, 무천단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수양에 도착했다.
의외로 수양은 너무나 조용했다. 조양표국이 놈들에게 당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관초악은 수양의 분위기를 보고 곧장 상황을 짐작했다.
“놈들이 수양은 그냥 지나친 것 같군.”
독고무령은 내심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시간을 다투며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공연한 소란을 일으켜서 서연과 철검보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요.”
관초악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그럼 바로 서연으로 갔겠군.”
“일단 조양표국으로 가보도록 하지요.”
어차피 지금 간다 해도 늦었다. 조양표국이라면 자신들이 미처 모르는 소식이 들어와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하세.”
조양표국으로 다가가던 독고무령은 묘한 위화감에 눈을 좁혔다.
‘전체가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결국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닥친 것인가?’
관초악도 뭔가를 느꼈는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그들이 정문으로 다가가자, 정문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호, 혹시, 철풍검대 구조장님 아니십니까?”
진사혁이 바로 그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지금은 철풍검대 대주시네. 그리고 무천단의 삼대주시지. 은 대주께 무천단이 왔다고 말씀드리게!”
“예? 예, 알겠습니다. 일단 따라오십시오.”
조양표국에는 여전히 철양검대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가려는 것처럼 모두 마당에 나와 있었다.
독고무령이 그들을 둘러볼 때였다. 대주인 은창산이 거처에서 다급히 나왔다.
“어서 오시오, 철양검대의 은창산이외다.”
“무천단의 관초악이오.”
“일대주 관조운입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독고무령은 은창산을 바라보았다. 은창산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