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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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1화
91화
팔백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중 생존자는 이백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나이어린 소년과 여인들 아니면, 무공을 모르는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전유곤의 악에 받친 외침을 듣고 숨어 있던 곳에서 기어 나왔다.
개중에는 설자웅의 부인인 모은산과 둘째 아들 설수홍도 있었다.
전유곤은 그들을 보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사모님! 홍아! 오오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유곤아!”
“사형! 놈들이…… 놈들이 장원의 무사들을……. 숙부님도…… 조부님도 모두…… 크흑…….”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사방에 널린 시신이, 시뻘겋게 물든 대지가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방으로 가서 쉬고 계십시오. 장원을 정리하고 찾아뵙겠습니다. 홍아, 어서 어머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라.”
“예, 사형.”
전유곤은 설수홍이 모은산을 부축하고서 방으로 향하자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찾아봐라! 구석구석을 살펴봐!”
비록 팔다리가 잘려지고,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만큼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모두가 형제나 다름없는 동료들, 그들을 살려야 했다.
삼대가 전궁산장에 널린 시신을 정리하고 있을 때 관초악이 도착했다.
그와 함께 움직인 오십일 명 중 남은 사람은 스물두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여섯 명은 심각한 중상을 입은 듯했다.
관초악은 바위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관조운 역시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단순히 무사들의 손실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독고무령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화천기가 보이지 않는군. 설마 다 죽지는 않았을 텐데, 어딜 간 거지?’
그의 궁금함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관초악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벽계진은 화천문의 무사들을 데리고 떠났네. 어차피 이곳의 상황이 끝난 것 같으니 화천문으로 간다더군. 겁쟁이 자식!”
관조운도 입술을 씹으며 이를 갈았다.
“제기랄. 그자만 물러서지 않았어도 열 명은 더 살 수 있었을 거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말투에서 풍겨 나온다.
독고무령은 벽계진을 떠올리고 상황을 짐작했다.
‘그는 방 안에서 자란 화초와 같은 자.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나 보군.’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중상을 입은 전궁산장의 무사들을 손보는 일에만 전념했다.
어둠이 청강산을 뒤덮자 곳곳에서 화톳불이 피어올랐다.
전궁산장의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뒷정리에 매달렸다. 그때만큼은 가슴을 짓누르던 공포조차 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무천련의 무사들이 들어선 지 한 시진, 전궁산장의 상황이 대충 정리될 무렵 관초악이 기주들을 불렀다.
“조운, 상황은 어떠냐?”
“일단 급한 상황은 정리 되었습니다.”
“그럼 일각 후에 출발하자.”
관초악이 출발을 서두르자 독고무령이 물었다.
“화천문으로 가실 겁니까?”
관초악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벽계진이 밉다고 해서 화천문을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야겠지.”
전에 비해서는 기세가 많이 죽은 목소리였다.
연이은 격전에서 많은 수하를 잃고, 거기다 벽계진의 항명사건까지 벌어진 상태다. 그러한 일들이 자신만만하던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듯했다.
독고무령은 전유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소?”
인원이라고 해봐야 부상자를 빼면 삼십여 명에 불과했다. 전궁기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여섯. 그들마저 빠진다면 스물대여섯 명만 가야 했다.
전유곤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머지 처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됩니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제6장 급변(急變), 바람은 어디로
뎅! 뎅!
멀리 산사에서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일원궁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간간이 보이던 전각 안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피워져 있는 화톳불만이 일원궁의 전각을 비추며 고고히 타올랐다.
무겁고 깊은 고요함, 적막감만이 산중을 짓누르는 밤이다.
일원궁 뒤쪽에 위치한 태원각을 돌아 나오던 두 명의 순찰무사는 몸을 후드득 떨었다. 몸을 엄습하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길,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군.”
“그러게 말이야. 부엉이새끼도 울지 않는군.”
“지미, 이런 날은 한잔하고 푹 자는 게 최곤데…….”
“술? 좋지. 계집 하나 옆에 있으면 더 좋고 말이야. 흐흐흐흐…… 어?”
외곽 순찰무사인 오자응은 동료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봐, 내가 방금 뭘 봤는데…….”
“보긴 뭘 봐? 처녀귀신 엉덩이? 크크크크.”
“그게 아니라니까…….”
오자응은 동료의 농담에도 웃지 않았다. 웃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겠다는 듯, 담장 밖의 백양나무숲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어? 오가야, 어디 가?”
동료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담장 근처로 다가갔다.
화톳불 근처에서는 어둠이 내려앉은 백양나무숲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담장 가까이 가자,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백양나무숲이 보였다. 정확히는 백양나무에 걸려 있는 기다란 물체였지만.
오자응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백양나무에 걸려 있는 기다란 물체. 그것은…… 목이 없는 사람의 시신이었다.
“헉, 저, 저거…….”
그가 말을 더듬으며 주춤주춤 물러설 때였다.
갑자기 백양나무 숲에서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새가 날아올랐다. 사람만큼이나 큰 새들이었다.
순간, 오자응은 몸을 홱 돌리고 동료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그는 두 걸음을 옮기기도 못한 채 입을 쩍 벌렸다.
동료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불꼬챙이가 등을 파고드는 충격이 그의 목소리마저 집어삼켜버렸다.
‘컥! 저, 적이…….’
바로 그때, 새 한 마리가 동료의 머리 위로 날아 내리는 게 보였다.
‘아, 안 돼! 피해!’
목소리는 속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순간 동료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지며 굴러 떨어졌다.
그는 귓전에 메아리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최대한 빨리 쓸어버리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예, 태사자(太使者). 시작해라.”
나직한 명이 떨어진 순간, 수백의 흑영이 일원궁의 전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일원궁에서 전서구가 날아든 것은 인시 초였다.
“궁주님! 일원궁이…… 일원궁이 적의 공격을 받아…….”
관천악은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한 상태로 보고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 연이은 충격은 그토록 침착하던 관천악의 심기마저 완전히 뒤흔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초절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즉시 오대세력의 수장들과 중소문파의 주인들을 모두 불러라!”
반각이 지나기도 전, 일원궁의 수뇌부와 벽도정과 설자웅, 구양은을 비롯해 중소문파의 주인들이 모두 몰려왔다.
관천악은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자신이 맞은 날벼락을 그대로 선사했다.
“일원궁이 적의 공격을 받아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오.”
“마,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놈들이 움직인 정황도 없었는데, 언제 그곳으로 갔단 말입니까?”
“궁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외다! 즉시 가보셔야지요!”
경악이 전간 안을 휩쓸며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두이정을 비롯한 일원궁의 사람들은 관천악에게 일원궁으로의 회궁을 종용했다.
관천악은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에야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잠시 벽 문주가 련의 지휘를 맡아주시오. 멀지 않으니 내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와야겠소.”
벽도정의 눈빛이 찰나 간 흔들렸다. 비록 허울뿐이지만, 어쨌든 무천련의 총지휘를 맡지 않았는가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만일 일원궁이 큰 피해를 입었다면 무천련의 지휘체계가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위기상황이라 해도 꼬리보다는 머리가 나은 법.
“알겠습니다.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대련주. 저희도 함께 갔으면 싶습니다만, 놈들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아니오. 급박한 상황에 사람들을 빼내는 것 같아 미안하기만 하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소. 두 태상, 갑시다!”
관천악은 즉시 일원궁의 무사 이백을 대동한 채 태응봉으로 향했다.
그는 그제야 백마방주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대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였다. 백마방의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할 때도 속으로 혀를 찼다.
가까이는 화천문과 전궁산장이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도 양 문파의 주인들을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자신은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달려간다.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다.
대의?
다 헛소리다. 부인이, 자식들이, 제자들이, 수하들이 죽어가거늘, 대의는 무슨 얼어 죽을 대의란 말인가!
그는 이기적인 자신의 마음을 분노로 털어냈다.
“죽일 놈들, 비겁하게 뒤를 치다니! 내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 * *
서른두 명으로 이루어진 무천단이 양원(襄垣)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오시 초였다.
아직 화천문까지는 백여 리가 남은 상황. 그들은 일단 화천문의 양원지부인 고원장(高原莊)으로 향했다.
서른두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가자 정문을 지키던 위사가 바짝 얼어붙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촌각이 아까운 터, 앞으로 나선 관조운이 곧바로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우리는 무천련의 무천단이다. 장주께선 안에 계시는가?”
그러잖아도 얼어붙어 있던 정문 위사의 눈이 홉떠졌다.
“무, 무천련 무천단요? 무천단이 무슨 일로……?”
“시간이 없다! 장주께 안내하라!”
관조운은 위사를 밀치듯 안으로 밀어 넣고 곧장 정문을 넘어섰다.
뒤따라가던 독고무령은 눈을 좁힌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본다. 어느 누구 하나 긴장하고 있는 자가 없다.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뜻.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보고 왠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서연에서 전서구가 왔다면 이들에게도 제왕성의 공격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럼 적어도 긴장하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태연하다.
최소한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서연에서 전서구가 오지 않았다는 것.
그럼 자신들보다 먼저 떠난 벽계진과 화천기는 어떻게 된 거지? 양원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장치(長治)의 화천문으로 갔나?
그것도 이상했다. 궁금해서라도, 연락을 하기 위해서라도 고원장에 들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독고무령은 안으로 들어가며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정리해 보았다.
그 사이 관초악과 관조운이 장원의 건물 정면까지 다가갔다.
그때 서너 사람이 건물 안에서 다급한 걸음으로 나왔다.
거리가 이 장으로 좁혀지자, 그들 중 볼에 살집이 두툼한 중년인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화천문 양원지부장인 고지태라 하외다.”
“무천련의 무천단주를 맡고 있는 일원궁의 관초악이오.”
무천단주라는 말에 고지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천련의 무천단이 어인 일로 본장을 방문하신 겁니까?”
관초악은 그의 질문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관초악이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관조운이 그를 대신해서 물었다.
“저는 무천단의 일원기주 관조운이라 합니다. 정말 제왕성의 공격 소식을 듣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