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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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0화
90화
그 시각.
관초악과 관조운 일행도 제왕성 무사들과 맞닥뜨렸다.
오십여 명의 무사가 길게 늘어선 채 숲을 지날 즈음, 양측의 무리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한 것이다.
순간 제왕성의 무사들이 무너진 암벽에서 바위가 굴러 내리듯 쏟아져 내려왔다.
언뜻 봐도 두 배나 되는 인원이다. 제왕성 무사들 역시 정예라 할 수 있는 자들. 게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공격한다.
스릉!
관초악은 검을 빼들고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물러서지 말고 철저히 진형을 유지해서 맞서!”
관조운은 선두에 서서 제왕성의 무사들을 몰아붙였다.
숲속에서의 싸움은 평지에서 싸울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나뭇가지가 앞을 막고, 풀에 가려진 돌들에 발이 걸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일류고수라는 자들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고, 휘어졌다 튕겨진 나뭇가지에 얻어맞아 몸을 숙였다.
그나마 절정에 이른 몇몇 고수만이 환경에 큰 구애를 받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난전은 더욱 격해졌다.
사람들이 뒤엉키자, 이제는 누가 적이고 동료인지조차 순간적인 감각만으로 판단해야 할 판이었다.
와중에도 비명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누렇게 마른 풀들에서 붉은 꽃이 피어나는가 싶더니, 숲속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그렇게 반각이 지나는 사이, 무천련의 무사들 중 십여 명이 쓰러졌다.
반면 제왕성의 무사들은 그 두 배가 넘는 무사들이 주검으로 변했다.
막상막하의 혈전!
그런데 치열한 격전이 절정을 향해 달릴 때였다.
“단주! 안되겠습니다! 물러납시다!”
피를 뒤집어쓴 벽계진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자 화천문의 무사들도 그를 따라 뒤로 빠졌다.
순간 팽팽하던 실 한쪽이 축 처진 꼴이 되어버렸다.
관초악이 벼락처럼 호통을 질렀다.
“무슨 짓이냐! 빨리 합류해!”
벽계진이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악을 쓰듯이 외쳤다.
“더는…… 더는 안 됩니다! 이러다 다 죽는단 말입니다!”
제왕성의 무사들은 벽계진을 쫓지 않았다. 대신 검을 돌려서 다른 자들을 공격했다.
그 여파는 무천련 무사들을 순식간에 궁지로 몰아넣었다.
악착같이 버티던 자들 중 서너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팽팽하게 싸우던 자들도 위기에 몰려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추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
관초악은 그동안 아꼈던 검초를 다 쏟아내며 서너 명의 적을 베어냈다. 그러고는 뒤로 훌쩍 물러나며 명을 내렸다.
“후퇴한다! 조운! 다른 사람이 후퇴할 수 있도록 일대와 함께 놈들을 막아라!”
이가 갈리도록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벽계진의 목부터 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벌부터 내리면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빌어먹을 겁쟁이 자식!’
관초악은 수하들이 뒤로 물러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적을 막았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충천하며 사위를 휩쓸자 그토록 사납던 제왕성 무사들도 그의 주위로 접근하지 못했다.
관초악은 기회를 틈타 뒤쪽으로 물러났다.
제왕성의 무사들은 무리하면서까지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 역시 끝까지 싸워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사상자를 챙겨라!”
그들은 사상자들을 들쳐 업고 서쪽으로 달려갔다.
한편, 독고무령이 이끄는 삼대는 철저히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지리를 잘 아는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이 적을 유인했다. 적이 포위망에 들어오면 삼대가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렇게 세 번, 쓰러뜨린 자만 서른이 넘었다.
단순한 작전이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독고무령은 세 번째로 만난 적을 모두 쓰러뜨리고 짤막하니 명을 내렸다.
“저쪽 능선을 넘어갑시다.”
삼대의 무사들은 머뭇거리자 않고 독고무령을 따라서 능선을 넘었다.
이제 누구도 독고무령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계곡에서 죽인 자들까지 포함해 제왕성의 무사 칠십을 넘게 처리하면서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직접 가담한 자신들조차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전과였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쉽게 죽지 않는다.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능선을 넘어간 독고무령은 방향을 두 번 튼 뒤 바위 위로 올라갔다.
철검기가 그를 따라오고, 포원기는 건너편 낮은 둔덕 너머에 몸을 숨겼다.
바위 위로 올라간 그는 전면을 주시했다.
“놈들이다! 잡아라!”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적들이 전유곤을 발견한 듯했다. 동시에 청강산을 휘어감은 기운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전유곤이 적을 유인해 오고 있다는 뜻.
어느 순간, 전면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수!’
지금까지 상대했던 누구보다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본다면, 진사혁이나 사공화정보다 강할 듯했다.
‘관초악이라면…….’
독고무령이 관초악을 떠올릴 때 전유곤과 전궁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곧 제왕성의 무사 십여 명이 나타났다.
그는 맨 나중에 모습을 보였다.
독고무령은 전유곤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진사혁과 사공화정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혁, 이번에는 네가 중심이 되어서 놈들을 쳐라. 사공 기주, 사혁과 손발을 맞춰주시오. 나는 뒤에서 오는 자를 맡겠소.>
그가 전음을 보내는 사이 전유곤이 전궁기의 무사들과 함께 앞을 지나갔다.
그 이후 제왕성 무사들이 욕을 퍼부으며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다.
“흥!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구나, 이놈들!”
바로 그때, 맨 뒤에서 따라오던 유가중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조심해라! 매복이다!”
유가중의 외침에 제왕성의 무사들이 주춤거렸다.
찰나 바위 위에서 철검기가 날아 내리고, 둔덕 너머에서 포원기가 뛰쳐나왔다.
앞서 도주하던 전유곤도 몸을 돌려 공세에 가담했다.
유가중이 노성을 내지르며 도를 뽑아들었다.
“건방진 놈들! 이제야 수하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겠구나!”
하지만 그의 상대는 따로 있었다.
독고무령은 병아리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날아가며 검을 빼들었다.
“그대는 내가 상대해주지.”
유가중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독고무령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흥! 오냐 이놈! 단칼에 두 쪽을 내주마!”
눈 깜짝할 새에 십 장의 거리를 좁힌 독고무령이 검을 내리쳤다.
단순한 일격!
유가중도 도를 쳐들어 떨어지는 검을 후려쳤다.
쩌엉!
일장 두께의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짜릿한 충격!
전신의 뼈가 얼얼하고, 숨이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유가중은 엄청난 압력에 이를 악물고 주르륵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뒤늦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이, 이놈이 혹시?’
독고무령은 반동을 이용해 빙글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유가중을 향해 쇄도했다.
유가중은 조금 전까지의 오만을 버리고 신중하게 도를 들어 올렸다.
순간이었다. 유가중의 눈이 홉떠졌다.
독고무령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창백한 청광을 발하던 검첨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해진 것이다.
유가중은 눈을 홉뜬 채 벼락처럼 도를 휘둘렀다.
쩌저정!
두 사람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바닥의 낙엽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독고무령은 뇌정일섬이 막힌 순간, 검세를 뇌정진천세로 변화시켰다.
콰르릉!
뇌음이 일며 시퍼런 검기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유가중은 전력을 다해 도를 열십자로 휘둘렀다.
도망(刀罔)에 휩쓸린 근처의 나뭇가지들이 산산이 잘려서 허공에 뿌려졌다.
콰과광!
산을 뒤흔드는 진천(振天)의 뇌음(雷音)!
뇌정진천세의 검력에 갈기갈기 찢어진 도망이 분분히 흩어졌다.
무사건이 끊어져 허공에서 흩날리는 반백의 머리카락. 창백해진 안색. 유가중은 뒤로 물러서며 경악한 눈으로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십 년 전 제왕성에 들기 전만 해도 한 자루 칼을 벗 삼아 천하를 종횡했다. 그때도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삼 초 만에 밀리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네, 네놈은…… 뇌정검마의 제자더냐!”
그는 오래 전에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독고무령의 눈빛이 깊어졌다.
‘뇌정십팔검의 흔적을 알아봤군.’
그는 대답 대신 검을 뻗었다.
유가중도 황급히 도를 들어 올려 검이 뻗어오는 동선을 막았다.
번쩍!
독고무령의 검첨에서 한줄기 광채가 솟구쳤다 싶은 순간!
쩡!
유가중의 도가 중동에서 부러지고, 한줄기 광채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유가중은 두 눈을 파르르 떨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그것…… 정말 뇌정…… 이더냐?”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연 그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대답을 듣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는 듯.
독고무령은 유가중의 구멍 난 심장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천뢰광혼이라 이름 붙였지. 뇌정이 녹아 있으니 완전히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저, 정말…… 무서운 검…….”
유가중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이 끊어졌다.
독고무령은 꼬꾸라진 유가중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림과 동시, 진사혁이 제왕성의 무사 하나를 때려눕히며 싸움을 끝냈다.
“자식들, 이번에는 제법 질기군.”
쓰러진 적은 유가중까지 모두 열넷. 진사혁의 말대로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이번 싸움에서만 다섯이 더 부상을 입은 것이다.
스물일곱 중 부상자가 열 명이 넘은 상태. 그중 포원기와 전궁기의 무사 셋은 중상이었다.
삼대 대원들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의 명을 기다렸다.
독고무령은 유가중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검을 집어넣었다.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떠납시다.”
삼대는 갈지자를 그리며 백여 장가량을 올라간 후 또다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매복했다.
어느덧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만큼 삼대 대원들의 얼굴에서도 차가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가공할 검법을 펼쳐서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죽인 독고무령을 믿었다.
특히 사공화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대주가 죽인 자, 분명 그였던 것 같았어…….’
그는 유가중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단순히 흘려보낼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을 가질 때까지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렇게 매복한 지 일각가량이 지날 즈음. 독고무령이 중상을 입은 자들의 상처를 대충 손보고 있는데, 적을 유인하러 갔던 전유곤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을 따라오는 적이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령에게 다가온 전유곤이 뿌연 입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놈들이 철수하고 있소. 우리를 찾는 걸 포기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는 것 같소.”
삼대원들은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은 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전유곤을 재촉했다.
“산장으로 안내하시오.”
전유곤은 전처럼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장의 상황이 누구보다도 궁금한 그였다.
“따라오시오.”
* * *
전궁산장은 청강산 중턱의 완만한 분지 칠만여 평을 차지한 채 세워져 있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서진 정문이었다.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은 전궁산장이 가까워지자, 이를 악물고 날듯이 뛰어갔다.
독고무령은 그들을 말리지 않고 삼대와 함께 뒤따라갔다.
곧 장원으로 들어간 전유곤의 입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개자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