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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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77화
77화
구양은에게는 독고무령의 강함이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결코 늑대 정도가 아니다.
호랑이, 그것도 대호(大虎)다.
여차하면 자신이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일파의 주인인 그의 입장으로서는 독고무령의 의중을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에 따른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독고무령도 구양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하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강한 곳만을 원했다면 그리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강한 곳보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원했지요.”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
말을 되뇌는 구양은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과연 그게 이유가 될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독고무령은 구양은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는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 그 전까지라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제왕성을 상대하고 싶을 뿐입니다.”
의외였는지 구양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떠난다고?”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고무령 같은 대호에게는 철검보라는 울타리가 너무 작았다.
‘어쩌면 무천련 역시 이 친구에게는 작게 보일지도 모르겠군.’
그리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나?”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 * *
아침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서 차가운 날씨가 더욱 차게 느껴졌다.
군웅들은 사시부터 열릴 비무를 기다리며 우승자에 대한 내기에 열을 올렸다.
“이번에는 젊은 사람이 우승하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일원궁의 관초악이 우승할 거네.”
“어허, 무슨 말을! 항룡일수 나 대협이 우승할 걸?”
“그럼 내기하세. 내 두 냥 걸지!”
“좋아, 나도 두 냥 걸겠네.”
왁자지껄하니 떠드는 사이에 열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시가 다가오자 군웅들이 비무장으로 몰려들었다.
기진맥진한 말 한 필이 대풍장에 도착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리고 비무는 열리지 않았다.
관천악은 팔걸이를 내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팔기보가 백마방을 쳐?”
무릎을 꿇고 있던 청의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합니다, 대련주! 어젯밤에 갑자기 공격해서 이곳으로 오려던 서문광과 백마방의 이백 무사가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두이정이 다급히 물었다.
“상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들려온 말로는, 백마방의 건물들이 반쯤 불타고, 남아 있던 무사들 중 백수십 명이 죽었다 합니다.”
대동의 팔기보에서 백마방까지는 오백 리 길이다. 그들이 오백 리를 남하해서 백마방을 쳤다는 것 자체가 철저히 계획된 공격이라는 뜻이다.
관천악은 옆에 서 있는 관조운을 바라보았다.
“조운, 비무대회를 중지시키고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모이라고 해라!”
“예, 아버님.”
갑자기 비무대회 중지를 선언하자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무천단의 단주를 뽑는 비무다. 단순히 무천련의 화합을 위한 비무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비무가 결전을 앞두고 중지되다니.
그만큼 큰일이 벌어졌다는 말.
독고무령은 중지선언을 듣자마자 다급히 구양소현에게 명을 내렸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내가요?”
“보주께 바로 가봐.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어서!”
구양소현은 누가 뭐래도 보주의 조카다. 그녀라면 바로 구양은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구양소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무장을 떠나자, 독고무령이 적수등과 석도명을 비롯한 조장들에게 당부했다.
“조원들에게 개인행동을 하지 말고 별원으로 돌아가라고 하십시오. 아무래도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사혁, 구조도 마찬가지네.”
새로 구조장이 된 진사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공격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건 모르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군. 일단 별원에 가서 대기하세.”
별원에 도착하자마자 구양소현이 뛰어들어 왔다.
“조장! 아니 대주, 팔기보가 백마방을 공격했대요!”
순간 석도명과 유원위, 조원화, 연사성의 얼굴이 유난히 딱딱하게 굳어졌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표정이 급변한 이유를 알기에 구양소현에게 빠르게 물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자세히는 나도 모르고, 좌우간 그 일 때문에 백부께서 대풍전으로 가셨어요.”
비무가 중지되고 각파의 수장들이 모였다면 결코 단순한 침입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왜 갑자기 백마방을 쳤을까? 제왕성과 무천련의 싸움에 끼어들어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독고무령이 의문을 품을 때였다. 일원궁의 무사 한 사람이 별원으로 들어왔다.
“독고 조장님께 전갈이 있어 왔소. 어디 계시오?”
진사혁이 고갯짓으로 독고무령을 가리켰다.
“저기 있소. 그런데 말이오, 이제 조장이 아니라 대주님이시오. 철풍검대의 대주 말이오.”
무사에게는 독고무령이 조장이든, 대주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독고무령이 서문태강을 눕힌 사람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았다.
급히 독고무령에게 다가간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련주께서 부르십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 * *
대풍전은 대풍장에서 가장 큰 대전이었다. 그곳에는 내로라하는 고수 삼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대세력과 십이문파의 주인, 그리고 강호명숙들까지.
다만 오대세력 중 백마방만이 서문태강 대신 장로인 고원정이 참석한 상태였다.
그들은 팔기보의 백마방 공격 소식을 듣고 대경했다.
특히 고원정은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련주!”
“물론이오. 해서 비무대회를 중지시키고 모이라 한 것이오.”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고원정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속히 사람들을 보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소. 허나 당장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오.”
고원정이 발끈한 말투로 소리쳤다.
“대련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본방을 돕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두이정이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어허! 고 장로! 어찌 그리 속단하는 게요! 누가 돕지 않는다고 했소? 제왕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니 조심해서 움직여야 한단 말씀이외다! 한번 겪고도 그리 모르겠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원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입에서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아니 갈 것입니다! 형제들이, 자식들이 팔기보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소이다! 그들의 비명이 귀청을 울리는데 어찌 이곳에 있으란 말이오? 무천련에서 도와주지 않겠다면 우리라도 갈 것이외다!”
“허어, 고 장로.”
“됐소이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그만 말하시지요!”
고원정은 말을 마치고 홱 몸을 돌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주먹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누가 그의 마음을 모를까. 그러나 지원무사들을 보내기에는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꾹 닫은 채 고원정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고원정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탕!
고원정이 세차게 문을 닫은 후로도 한참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관천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내 어찌 백마방을 돕고 싶지 않겠소?”
“서문 방주라면 생각을 달리할지 모릅니다. 조금 기다려보시지요.”
두이정의 말에 관천악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누구보다 빨리 돌아가고 싶을 거요.”
자존심, 체면, 몸까지. 모든 것을 잃은 서문태강이다. 아마 백마방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다가 죽더라도 이곳을 떠나려 할 것이다.
그때 구양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의견을 말했다.
“솔직히 의문입니다. 팔기보가 백마방을 공격하다니. 아무래도 독자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다?”
“팔기보가 제왕성의 하부조직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진즉부터 돌고 있었지 않습니까?”
“제왕성이 팔기보를 움직였단 말이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최소한 오대세력 중 하나는 떨어져나갈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관천악 옆에 서 있던 관초악이 입을 열었다.
“구양 보주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관천악의 두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놈들이 먼저 선제공격을 했단 말이지?”
“문제는 다른 곳도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관초악의 말에 벽도정과 설자웅의 얼굴이 굳어졌다.
백마방이 공격당한 상황.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지자 관초악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제왕성의 정보조직과 본련의 정보조직은 너무 많은 차이가 납니다. 정보조직들이 각 문파별로 분산되어 있다 보니 두어 단계를 거쳐야만 겨우 전달되는 상황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정보조직을 단일화해서 좀 더 강력하게 보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일 정보조직이 하나로 통일된다면, 그만큼 대련주의 힘이 강해진다. 여차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각파의 주인들은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관천악을 바라보았다.
그때 관천악이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않고 정보조직을 보강할 방법이 하나 있소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관천악을 주시했다.
관천악은 수염을 쓸어내며 말을 이었다.
“비무대회를 계속할 수는 없지만, 무천단 설립은 예정대로 진행합시다. 그들이 정보조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면, 본련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무천단은 일원궁의 조직이 아니다. 무천련 모든 문파의 무사들이 속한 조직이다.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최선일 수도 있었다.
묵묵히 앉아 있던 벽도정이 입을 열었다.
“비무대회를 진행하지 않고 어떻게 무천단을 구성할 것인지,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보시지요.”
“지금까지 진행되어 뽑힌 열 사람 중 한 사람을 단주로 선출하고, 나머지 아홉에 한 사람을 추가시켜 십기를 만들면 되지 않겠소?”
“비무를 하지 않을 거면 단주는 어떻게 선출할 생각이신지요?”
전궁산장의 장주 설자웅의 말에 모든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관천악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단하오. 여기에는 각 문파 대표들과 산서를 대표하는 명숙들이 서른여섯 명이나 모여 있소. 모두가 어제의 비무를 봤을 거라 생각하오. 지금부터 열 명의 이름을 나열할 테니, 적합하다 생각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손을 들어주시오.”
각파의 수장들이 웅성거렸다.
얼핏 들으면 아주 공정한 방법 같았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열 명의 이름 중 일원궁 사람의 이름이 셋이나 포함되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는 이상은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십이문파 중 하나인 성운보의 보주 상유전이 물었다.
“추가시킬 한 사람이 누굽니까, 대련주?”
“내 따로 생각한 사람이 있소이다. 그러니 일단 단주를 선출하고 그 다음에 의견을 묻도록 하겠소.”
좌중이 조용해지자, 관천악이 두이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열 사람의 이름을 말하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두이정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굳이 모두의 이름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관초악의 이름이 세 번째로 나오자, 사람들 중 반 이상이 손을 든 것이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때 밖에서 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신 분들이 모두 오셨습니다!”
두이정이 밖을 향해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