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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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63화
63화
비화각이 비록 이중으로 지어져 방음이 완벽한 건물이라 해도 지금은 새벽, 밖에 있는 경비무사들이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독고무령이 만약을 생각해 태천일심의 기운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있다는 걸.
‘빌어먹을!’
남조경은 이를 악물고 독고무령을 향해 검을 뻗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벗어나지 못할 것도 없다. 새파란 놈에게 밀려서 도주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나, 일단 목숨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앞으로 뻗은 검첨에서 시퍼런 기운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독고무령은 그런 남조경을 향해 한 발 내딛으며 쌍수를 엇갈려 떨쳤다.
십자 형태의 달빛이 일 장 떨어진 남조경을 덮쳤다.
삼월인 중 탈월(脫月)의 수법이다.
그로 그 순간, 남조경의 검첨에서 흘러나오던 검기가 시퍼렇게 뭉쳤다.
남조경은 자신의 검첨에 형성된 검강을 자신 있게 휘둘렀다.
“이놈!”
쩌엉!
보다 강한 충돌음이 방 안에 울렸다.
독고무령이 펼친 탈월의 기세와 남조경의 검강이 동시에 부서지며 두 사람의 거리가 일 장 반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차이가 컸다.
독고무령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인데 반해, 남조경의 일그러진 얼굴은 경악으로 물든 상태였다. 거기다 내부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독고무령은 잠깐의 틈을 타서 나직이 말했다.
“남조경, 누가 들어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라. 너와 나에게서 나는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니까.”
와중에도 우수에 태천일심의 내력을 집중시키며 천천히 들어 올렸다.
쫙 펼친 우장이 얼굴쯤 올라온 순간, 독고무령은 남조경을 향해 우수를 뻗었다.
맑은 청광이 해일처럼 밀려갔다.
남조경은 검을 들어 올리려다 입을 쩍 벌렸다.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오그라드는 충격!
‘크억!’
그는 이를 악문 채 혼신의 내력을 검에 쏟아 부었다.
쿵!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대기가 출렁였다.
“커억!”
남조경은 단 일 장에 피 화살을 뿜어내며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퍽!
벽이 울리며 남조경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왔다.
독고무령이 다가가자 억지로 몸을 일으킨 남조경이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누구……?”
독고무령은 숨을 몰아쉬고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때, 밖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경비무사들이 방 안의 사정을 눈치 챈 듯했다.
‘제길. 벽에 부딪친 충격이 밖에까지 전해진 것 같군.’
들을 말이 있어 검을 자제했는데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
스릉!
독고무령은 검을 빼들어서 남조경을 가리켰다.
단지 석 자 길이의 검을 뻗었을 뿐인데, 남조경은 검첨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기도 아니고, 검강도 아니다. 대체 자신의 정신을 억압하는 이 기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그때 독고무령이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조경, 의문을 풀지도 못한 채 죽고 싶지는 않겠지? 그대라면 죽을 때 죽더라도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남조경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앞에 있는 놈은 누군가? 이놈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가? 얼마나 원한이 깊기에 이곳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다. 묻는 투로 봐서 자신의 성격마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누구냐, 너는!’
의문을 풀지 않고는 죽어도 한이 맺혀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 것만 같다.
남조경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독고무령의 말대로, 죽을 때 죽더라도 의문은 풀고 싶었다. 그리고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말로 하는 싸움이라면 자신 있었다. 상대는 새파란 애송이가 아닌가.
그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밖에서 수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남조경의 악다문 입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 수하들이 방 안의 상황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빌어먹을! 이제야 오다니!
소리치면 앞에 있는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제왕성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럴 경우 자신 역시 의문을 풀지도 못한 채 죽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는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은 깊고 깊어서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보고 있으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 지경.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군!’
남조경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전히 독고무령을 노려본 채.
“아무 일도 아니다! 잠시 화가 나서 벽을 쳤을 뿐이니, 그만 물러들 가라!”
입에서 피가 튀었다. 튀어나온 피가 다섯 치도 뻗지 못하고 안개처럼 흩어진다.
검은 넉 자 앞에 있지만, 그 기운은 다섯 치 앞까지 뻗어 있다는 뜻.
남조경의 안색이 해쓱하니 질렸다.
솔직히,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문이 열리기도 전에 검의 기운이 자신의 머릿속을 휘저었을 것이었다.
‘젠장!’
독고무령은 그런 남조경을 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아버지에게 들었던 대로군.”
흠칫한 남조경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
“남조경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고 했지.”
사실이 그렇다. 그런데 이놈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네놈 아버지가 누군데……?”
남조경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눈이 터질 것 같았다.
“살고 싶나, 죽고 싶나?”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그 말을 들으니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아직 의문을 풀지도 못했잖은가 말이다.
“약속을 어기겠다는 말이냐?”
“약속은 지키지. 단, 살고 싶으면 몇 가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라. 대답하지 않으면 그대만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남조경은 피로 물든 입술을 질겅거렸다.
빌어먹게도 검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허튼수작을 하면 그냥 죽이겠다는 뜻.
‘놈의 눈은 사신의 눈이다. 저 눈에 인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입술을 질겅거리던 남조경이 핏물과 함께 몇 마디 뱉어냈다.
“약속을 먼저 지켜라. 네놈은 누구냐?”
“세월이 흐르며 내가 변하긴 변했나 보군. 나를 기억 못하다니.”
“뭐라……?”
“나를 찾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에 소엽을 시켜 장가장을 친 것 아니었나?”
남조경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서, 서, 설마……?”
남조경의 입이 덜덜 떨리며 목소리가 단절되어 흘러나왔다.
“차라리 잊고 지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그리 집착했지? 그 성격 때문인가?”
“너…… 소악귀…….”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남조경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 내가 묻지.”
“빌어먹을…… 제기랄…… 네놈이라니…….”
이제는 입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후들후들 떨렸다.
“크크크크, 불안하다 했더니…… 결국…….”
독고무령은 그런 남조경을 보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위지천백에게 보고했나? 내가 봐서는 안 했을 것 같은데.”
남조경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미친 줄 아느냐? 하긴 성주께서 어떤 분이신지 네놈이 어찌 알겠느냐? 보고하는 그날로 내 목숨도 끝이거늘.”
보고를 안 했다는 말.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두 번째. 남조경, 그대는 누구지?”
남조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누구냐고? 그야…….”
“그대의 진실 된 정체를 묻는 거다.”
계속된 독고무령의 추궁에 남조경의 얼굴이 석회를 부어놓은 것마냥 하얗게 굳어졌다.
“…….”
“비화당주 남조경이 되기 전의 당신이 누군지, 그걸 알고 싶어서 묻는 거다. 소엽에게 물어봤는데 그도 그것만큼은 모르더군.”
“그…… 웃기는…….”
“위지천백의 배후와 관련되어 있겠지?”
갑자기 남조경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잿빛으로 변한 안색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비밀인가? 하기야 그러니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
남조경의 눈이 죽은 자의 눈처럼 빛을 잃었다. 입이 열리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삶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네놈을 죽이려 했던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우습지만, 비옥에서 살아온 네놈을 불쌍하게 여겨서 충고 하나 하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알려하지 마라.”
“말할 수 없다는 건가?”
“네가 강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알면 너도 죽어.”
“그럼, 말해줄 수 있겠군.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문제는…… 내 가족도 죽는다는 것이지. 모두 다. 그러니 포기해.”
그때였다. 갑자기 남조경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순간 독고무령이 검을 뻗어 그의 혈도를 찍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남조경의 심맥이 완전히 끊어진 직후였다.
그는 자조의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달싹거렸다.
“차라리…… 이게 편하…… 지.”
노태릉도 두려워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날아갈지 모르는데도. 하기에 남조경의 입에서도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마하니 그 질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이야.
대체 위지천백의 배후가 누군데 그렇게 비밀을 지키려는 것일까?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바라보고 있는데,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댄 남조경의 입에서 선홍빛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마…… 나가기…… 쉽지 않을 것…….”
독고무령의 눈빛이 무저갱의 해저처럼 가라앉았다.
경비무사들이 너무 쉽게 물러간다 생각했는데, 뭔가 자기들만의 신호가 있었나 보다.
이제 와서는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 후회한다고 해서 바뀔 일도 아니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독고무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남조경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
그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는, 징벌(懲罰)이었다.
* * *
독고무령은 남조경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지붕 위로 나가자 그물처럼 펼쳐진 기운이 비화각을 향해 밀려들었다.
적어도 일백 명 이상으로 느껴진다. 모두가 일류 이상의 정예무사들.
그들의 기세에 어둠이 회오리친다.
다행이라면 절정고수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서넛.
그런데 살펴보는 동안에도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독고무령은 제왕성의 무사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지붕을 박차고 바람에 몸을 실었다.
“놈이 도주한다!”
“몇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보고, 나머지는 놈을 잡아라!”
“쥐새끼가 감히 이곳까지 침입하다니!”
대여섯 명은 비화각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무사들은 독고무령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고무령은 땅으로 내려서지 않고 다시 도약했다.
동쪽하늘이 조금씩 밝아오는 시각.
사위는 어둠이 어슴푸레하니 깔려 있는데다 옅은 안개마저 끼어 있다.
암향무(暗香舞)와 호접류의 장점을 따서 만든 암향호접무를 펼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스윽!
소리 없이 나무를 하나 타넘은 독고무령은 곧장 다른 나무로 신형을 날렸다.
“놈이 나무를 타고 이동한다! 쫓아라!”
“저쪽이다!”
아래쪽에서 백여 명의 무사들이 그를 따라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