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62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62화
62화
독고무령이 자신의 생각을 계속 말했다.
“그들이 감시하기 시작하면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는 장인들을 줄이시고, 생산량도 삼 할로 줄이십시오.”
철노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그런 수가 있었어. 더구나 질이 안 좋으면 굳이 우리 철방의 물건을 욕심내지도 않겠지. 화로에 넣어서 뼈까지 태워죽일 놈들!”
불꽃이 꺼진 그의 노안에서 다시 불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 * *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철방이 일을 하는 한 장원에 대한 것은 차후에 정리해도 될 터. 우선 급한 대로 장이생의 가족을 먼저 피신시키기로 했다.
그 일을 위해 십걸 중 한 사람을 먼저 운양에게 보냈다. 그라면 장이생이 숨어살 만한 곳을 마련할 수 있을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철검보 쪽이나, 제왕성이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피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대대로 이어온 장가장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장이생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마 가족이 아니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고무령도 그걸 알기에 장이생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게다가 잘만 하면 굳이 도망치듯 떠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남조경이 위지천백에게 말하지 않았을 경우, 그만 사라지면 자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설령 비화당이 장가장을 쳤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남조경이 왜 장가장을 쳤는지 모르는 한은 제왕성도 장가장을 핍박할 수 없을 거다.’
포목점의 책임자인 방기옥은 처참하게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초비경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 독고무령에게 말했다.
“이상하네.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아주 처참하게 죽었다는군. 아무래도 오늘 침입한 자들에게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네.”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런 전음에 초비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
<그 일을 당분간 장주님과 부인께 말씀드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보고하더라도, 그냥 도적들에게 당한 것 같다고 해주십시오.>
의아한 와중에도 초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무령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때 소설향이 한 걸음 먼저 나오고, 장유유가 장이생을 부축하고 방에서 나왔다.
고개를 반쯤 숙인 소설향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초비경의 말을 들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볼 뿐.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마차가 장가장을 빠져나오자, 독고무령은 진사혁을 불러 부탁했다.
“사혁, 자네가 십걸과 함께 가주게나.”
“자넨 안 갈 건가?”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네. 어쩌면 날이 샐 때까지 서연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네. 그러니 자네가 먼저 가서 대주께 말씀 좀 드려주게. 일이 있어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말이야.”
“대회합이 이틀 남았다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네. 내일 밤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흠, 뭐 그렇다면야, 재수 없는 대주가 뭐라 해도 꾹 참지, 뭐.”
독고무령은 진사혁이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장유유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오빠, 찾아올 거지?”
다행히 왜 같이 안 가냐고 떼를 쓰지는 않았다.
독고무령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최대한 빨리 찾아가마.”
“저번처럼 거짓말하면 안 돼? 알았지?”
독고무령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사혁과 십걸 중 아홉, 거기에 초비경과 호위무사 둘.
저들이라면 태원까지 무리 없이 갈 수 있겠지.
독고무령은 마차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서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4장 묻는 것은 나중에 내가 그대들에게 할 것이다!
삼백 리 길을 밤사이에 이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큰 강이 있고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다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려울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정도 어려움을 어찌 삼십 리 지하수로를 통과하는 것에 비할 수 있으랴.
독고무령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오십 리를 달렸다.
그리고 분하가 나오자 말을 버리고 강을 건넜다. 어차피 강을 건너면 장엄한 여량산맥의 산세가 시작되는 만큼 말은 필요가 없었다.
강을 건넌 그는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서 산세를 타넘었다.
우려되는 것은 자신이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행히 하늘이 맑아 눈가루를 뿌린 것처럼 별들이 반짝인다. 그 별들 중 비옥의 숨구멍으로 봤던 별이 그를 따라 달린다. 어서 오라는 듯.
정확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 별만 따라간다면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진중을 떠난 지 세 시진.
제왕성 동쪽 삼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태천일심법을 행하며 소모된 내력을 보충했다.
이제 해가 뜨기까지 약 한 시진 정도가 남은 상황.
해가 뜨기 전까지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몸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태천일심법으로 기운을 휘돌리자 관제산의 영기가 온몸의 숨구멍을 통해 흘러들었다.
내력을 제법 소모한 탓인지 스며드는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스며든 청명한 기운의 일부는 심장을 어루만지고, 일부는 단전으로 내려가서 비어 있는 호수에 물을 가득 채웠다.
두 번, 일각에 걸쳐 운기를 마치니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 손을 뻗으면 하늘이 빨려들 것 같고, 발을 구르면 땅이 울어댈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기분에 젖어 있을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어둠에 묻혀 있는 관제산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제왕성의 건물 지붕이 달빛 아래 어슴푸레 보였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독고무령의 눈빛이 바람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너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위지천백. 그날의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자신의 탄생을 알았을 때 미칠 것 같았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아버지라 생각했기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지만, 항상 꿈속에서 속삭였기에 더 아픔이 컸다.
죽더라도 제왕성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싸우고 싶었다.
피로 목욕을 하고, 위지천백을 찾아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며 자신의 울분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비웃었다.
-멍청한 놈! 그 정도에 흔들려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려 하다니! 애비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허망하게 죽는 꼴을 지옥에서라도 보기 싫다! 복수를 하려거든 힘을 길러서 완벽하게 무너뜨려라! 남자는 그렇게 복수하는 것이다!
그날, 그는 폭포 아래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의 고통을 아버지의 질타로 꿰매며 참아냈다.
태양이 뜰 때까지…….
그리고 오늘, 장이생의 일로 제왕성에 들어가려 한다.
꼭 장가장의 복수 때문만은 아니다.
지우기 위해서다. 남조경, 그가 하려했던 것처럼.
그래야 자신이 하려는 일도 조금은 더 편해질 테니까.
‘위지천백, 그대와의 만남은 좀 더 나중으로 미룰 것이다, 아직은 준비가 안 되었으니까.’
독고무령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심해처럼 깊숙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남조경이 반가워할지 모르겠군.’
* * *
어둠에 묻힌 제왕성은 고요했다.
제왕성의 사람들은 고요한 밤이 되면 더욱 조심해서 움직였다. 특히 내성에선 허락된 길이 아니면 아예 다니지 않았다.
밤은 만물이 잠드는 시각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비밀이 태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말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목 잘린 귀신이 될지도 몰랐다.
그게 지금의 제왕성이었다.
비밀과 공포의 대지!
하지만 그런 제왕성의 내성에도 간혹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곤 했다.
휘이잉.
한겨울 찬바람이 내성의 전각을 쓸고 지나갈 무렵, 독고무령은 이 층으로 된 전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대들보를 타고 곧장 자신이 목적한 곳으로 움직였다.
들보 위에서 눈알을 굴리던 쥐 한 마리가 깜짝 놀라 기둥을 타고 도망쳤다.
그 사이 독고무령은 건물 안쪽을 살펴보았다.
건물은 독특한 구조였다.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지어진 것처럼 두꺼운 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소리는 밖에 들리지도 않을 듯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최고의 조건.
‘소엽의 말대로군.’
내심 만족한 독고무령은 역시 이중으로 된 천장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 안에는 유등이 하나 켜져 있어서 굳이 안력을 돋울 필요도 없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법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이었다.
방문의 반대편 벽에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바로 자신이 찾던 자, 남조경이.
독고무령은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떨어진 깃털처럼 소리 없이 내려섰다. 남조경의 침상에서 일 장 반가량 떨어진 곳에.
그는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고양이발걸음보다 더 조용히 침상을 향해 움직였다.
소엽은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다하고 죽었다. 덕분에 제지 한 번 받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그가 곧장 비화당으로 통하는 길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고생 좀 했을 듯했다.
이제 남조경에게서 충실한 대답을 들어야 할 차례다. 남조경은 소엽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 알려줄 게 분명하다.
그가 두 걸음 앞으로 내딛음과 동시에 뭔가가 발에 걸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이었다.
닿았다싶은 순간 뒤로 뺐지만, 발에 걸린 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예민했다.
팅!
벽 쪽에서 맑은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남조경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런!’
독고무령은 지체 없이 신형을 날리며 우수를 뻗었다. 동시에 남조경의 침상이 홱 뒤집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였다.
퍽!
독고무령의 우수가 침상바닥에 틀어박혔다.
일순간, 팔꿈치까지 박힌 그의 손에서 웅혼한 경력이 뿜어졌다.
“흡.”
남조경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급박히 날린 일수에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아홉 치 나무판이 뚫렸다.
그것만도 놀라울 일인데, 그 손에서 뿜어지는 경력은 남조경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강력했다.
그는 침상을 밀어내고 뒤로 빠지며 검을 움켜쥐었다.
“웬 놈이냐!”
노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독고무령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삼월인 중 단월(斷月)의 수법.
손칼로 달을 쪼갠다는 말처럼 날카롭고도 쾌가 극에 달한 손짓이었다.
손에서 뻗친 파르스름한 기운이 번쩍하며 남조경을 향해 떨어졌다.
남조경은 눈을 홉뜨고 검을 휘둘렀다.
검이 미처 손과 닿지도 않았는데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쩡!
찰나였다!
독고무령의 손 그림자가 허공에 흩날리며 남조경을 향해 쇄도했다. 취접라와 귀월인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남조경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유등불빛에 비친 독고무령의 손 그림자가 악마의 손짓처럼 보였다.
그 위력이 어떠할지는 굳이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조금 전의 일수를 받아내며 내부에 충격을 받았다. 힘없이 나비처럼 흩날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 위력만큼은 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더 맞으면 끝장이다!’
쩌저정!
남조경은 눈 깜짝할 새에 검을 다섯 번이나 휘둘러서 겨우 독고무령의 손짓을 막아냈다.
‘밖에 있는 놈들은 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