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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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51화
51화
제10장 격변(激變)의 바람은 불기 시작하고……
일원궁(一元宮).
무천련의 오대세력 중 최강의 힘을 보유한 곳.
오당(五堂)의 일천 정예무사는 제왕성의 삼단과 자웅을 겨룰 정도이고, 일백 명으로 이루어진 일원단은 제왕성의 철혈전이나 제검전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디 그뿐이랴. 일원궁의 주인인 용화검제(龍華劍帝) 관천악은 위지천백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일원궁이 무천련을 이끄는 데는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서연 분타는 그런 일원궁의 분타 다섯 곳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 부지만도 십만 평이 넘고, 전각은 삼십여 개나 되었다. 결코 본궁에 못지않은 규모였다.
일원궁이 그렇게 서연 분타를 크게 지은 것은, 제왕성의 동부 진출을 견제할 겸, 여차할 경우 임시 총단으로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무슨 속셈인지 제왕성은 서연 분타를 공격하며 건물들을 거의 그대로 놔둔 상태였다.
구양손이 서연 분타의 정문으로 다가가며 독고무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왜 건물을 그대로 놔두었다고 생각하나?”
독고무령은 담담히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을 겁니다.”
불을 지르면 바로 습격 사실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일제히 뛰쳐나왔을 것이다. 은밀하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려한 목적이 반감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건물을 불태워서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것보다, 적을 하나라도 더 처치하고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는 게 더 이익이라 생각했겠지.
‘그리고 또 다른 속셈도 있었겠지. 조금이라도 늦게 알려져 추적이 늦어지길 바랐다든지……. 그도 아니면 무천련의 힘이 모이는 걸 원했다든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원궁이 제왕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곳을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무천련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그때 정문 앞에 서 있던 네 명의 정문위사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일개 위사들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본래의 위사들은 모두 죽은 상황. 일원궁의 본궁에서 내려온 정예무사들이었다.
“철검보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다네. 나는 철검보의 구양손이라 하네.”
정문위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상당한 기운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였다.
눈을 빛낸 그는 구양손을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인의철검 구양 대협이셨군요. 저는 위사장인 왕정이라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법 예를 갖춘 말투였다. 그러나 진심어린 공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취하는 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구양손과 삼 장의 거리를 두고서 걸음을 옮겼다.
희생자만 해도 이백이 넘는 대패를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패배의 흔적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기는커녕 한껏 고조된 상태처럼 보였다.
무천련의 대회합 때문인가?
‘짧은 시간에 완벽히 정리했군.’
사람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중 몇 사람이 구양손을 알아보고 쑥덕거렸다.
“인의철검이 왔군.”
“도혼단을 물리쳤다고 하더군. 사강목이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던데, 사실일까?”
“자랑하려고 왔나?”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 중 간간이 시기가 담긴 눈빛도 있다. 자신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 철검보가 도혼단을 물리쳤다는 것에 질시가 인 듯하다.
문제는 단순한 질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서로 다른 세력들이 손을 잡았을 뿐, 완벽한 하나라고 볼 수는 없겠지.’
독고무령은 무천련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걸음을 옮겼다.
왕정은 일행을 한 건물로 데려갔다. 일반 객방이 있는 건물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태상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양소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다. 게다가 오대세력 중 하나인 철검보의 대표로 온 사람들이다. 별원을 하나 내주지는 못할망정 일반 객방이라니.
“흥, 철검보의 대표로 온 우리를 일반 손님처럼 취급하겠다는 건가요?”
“어떤 손님이든 당분간은 객방으로 모시라는 명이 있어서…….”
“그러니까 일원궁에선 우리를 일반 손님으로 본다는 거군요.”
“그게 아니라…….”
왕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명을 따를 뿐입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태상께서 따로 명을 내리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시지요.”
구양손도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본래부터 그리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에 따지지는 않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바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정이 돌아서자 구양소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킁!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항상 지들이 최곤 줄 안단 말이야. 무천련이 뭐 지들 혼자 만든 것인 줄 아나?”
돌아선 왕정이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구양소현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철풍검대의 조원 같은데, 고운 얼굴 다치지 않으려면 말조심하시오, 낭자.”
구양소현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잖아도 독고무령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속이 상해 있던 터였다.
그녀는 잘되었다는 듯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왕정이 피식 웃으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칼자국 남기지 않으려면 말조심하라고 했지. 이번에는 잘 들었나?”
“예쁜 것은 맞는데, 당신이 왜 내 얼굴 걱정해? 꼬라지 보니까, 말단무사나 하다 칼 맞아 죽기 딱 좋겠군.”
왕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 좋게 도혼단의 공격에서 살아나니까 세상이 우습게 보이나 보군.”
그때 진사혁이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왜 우리 누님 건드리는 거요?”
당장이라도 몽둥이를 빼들고 달려들 것 같은 태도다.
당연했다. 저녁 한 끼 배불리 먹겠다고 은자 석 냥을 뺏긴 억울한 기분도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놈이 감히 하늘같은 누님을 건드려?
‘이 곰 같은 놈이 동생인가?’
왕정도 그의 기세에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직접적인 말싸움은 피했다.
“설마 철풍검대가 도혼단보다 강하다는 걸 믿으라는 말은 아니겠지?”
“왜 못 믿어? 우리가 그들보다 강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어디 정말인지 아닌지 당신이 직접 시험해보겠어?”
“그만!”
마침내 구양손이 나섰다. 일원궁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더 소란을 피워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진사혁이 보기에는 꼭 자신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나선 것만 같았다.
“대주는 좀 가만 계십시오, 제가…….”
구양손이 눈에 힘을 주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손님으로 왔네. 손님이 주인을 때리면 안 되지. 안 그런가? 뼈라도 부러지면 미안해지지 않겠나?”
그는 노회한 강호인답게 말 한마디로 왕정을 두들겨 패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가서 말씀 드리게.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이야.”
“예, 구양 대협.”
대답하는 왕정의 표정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철검보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깨에 힘을 주었지?’
말이 오대세력이지, 일원궁의 힘은 나머지 네 곳 중 둘을 합친 것만큼 컸다.
게다가 철검보의 힘은 두 번째도 아니고, 겨우 세 번째와 네 번째를 다투는 곳이었다.
추원당의 오향주인 왕정에게는 철검보의 조장도 눈에 차지 않았다. 하거늘 일개 조원이 눈에 찰까.
그런데 생각을 바꿔야 할 듯했다.
간덩이가 부었든, 추운 날씨에 잠시 이성이 얼어버렸든, 일개 조원들조차 과거와 달리 일원궁이라는 이름에 조금도 눌리지 않는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보통 아닌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는 돌아서서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제왕성의 도혼단이 당한 게 운이 아니었단 말이지?’
바로 그때 독고무령이 그의 옆을 스쳐갔다.
왕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후드득 떨었다.
‘이, 이건 또 뭐야?’
* * *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이 수염을 쓸며 물었다.
“조운, 어떻게 생각하느냐?”
노인의 앞에는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원궁의 이공자인 관조운이었다.
“왕정이 결코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도혼단을 물리친 자들입니다. 그것도 일백 이상의 도혼단을 죽이고 단 삼십여 명의 피해만 봤습니다. 물론 철환검대는 거꾸로 칠십이 넘는 피해를 봤습니다만. 어쨌든 그러한 자들이 평범하다면 저희 일원궁이 너무 비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노인, 조천자 두이정의 입가로 쓴웃음이 번졌다.
“그건 그렇지. 그동안 너무 안이했어.”
“그렇다고 너무 깊게 신경 쓸 것까지는 없습니다. 아직 일원궁은 무천련의 종주고, 일원동이 열리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테니까요.”
“흠, 그것도 그렇지. 좌우간 내가 늙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 도무지 젊은 사람들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관조운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대신 어르신께는 저희가 갖지 못한 경륜이 구층석탑보다 높게 쌓여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마저도 없다면 벽에 똥칠이나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두이정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관조운의 형인 관조광은 서른네 살의 나이로 무척 강직한 성격이었다. 무공도 어쩌면 관천악보다 강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관조운은 관조광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대신 관조광에게 없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강함 속에 적당한 부드러움이 있는 청년, 그게 관조운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관조광보다 관조운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일단 그들을 만나봐야겠군.”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독고무령은 석도명과 함께 구양손의 뒤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보였다. 육십 대의 노인, 사십 대의 중년인, 그리고 이십 대 후반의 청년.
청년은 관조운이었다.
그가 자신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를 알아봤나 보군.’
그의 옆에는 육십 대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상황으로 봐서 그가 바로 일원궁의 삼태상 중 하나인 조천자 두이정인 듯했다.
일원궁의 삼태상은 단순한 원로가 아니었다. 궁주인 관천악조차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이 꼭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관천악의 부친인 관위홍과 함께 강호를 질타한 원로여서만도 아니었다.
일원궁에는 그들보다 더 나이든 사람도 많고, 배분이 높은 원로도 상당수 되었다.
하지만 그들만큼 강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대주가 상대하기에는 벅차겠군.’
그것이 독고무령이 본 두이정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독고무령의 감각을 자극한 사람은 두이정도, 관조운도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가까이 다가가자 두이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양손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 년 만에 뵙는 듯싶습니다, 두 노선배.”
“허허,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 한번 빠르군.”
“세월은 그렇게 흘렀는데, 노선배의 모습은 여전하시군요.”
“허허허, 이제 내 나이도 칠십이 다 되어간다네.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구먼.”
구양손은 빙그레 웃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이공자도 오랜만에 보는군.”
독고무령을 바라보던 관조운은 구양손의 말이 떨어진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뵌 게 삼 년 전이었지요.”
“그렇게 되었나? 하긴 보주님의 생신 때 봤으니…….”
“삼 년이란 시간이 길긴 하지만, 막상 일에 쫓기다 보면 금방이라고들 하지요. 그런데 그 삼 년 동안 철검보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놀랍기만 합니다.”
“놀랄 것까지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네.”
“어디 제왕성의 도혼단이 운만으로 물리칠 수 있는 곳입니까?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허, 허. 그거야…….”
구양손은 대충 웃으며 얼버무렸다. 기세에서 눌리지 않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관조운도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선 입을 닫고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는 그가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