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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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47화
47화
그는 어제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싸우다 다친 것을 나중에야 알고 구양소현에게 옷을 찢어주며 싸매달라고 했다.
구양소현은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걸 알기에 흔쾌히 천 조각을 받았다. 그리고 진사혁의 팔을 천 조각으로 싸매주었다.
그때 진사혁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픈 것을 참느라, 싸울 때보다도 더 이를 세게 악물어야 했다.
나중에 풀어보니, 천 조각이 벌어진 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천 조각이 살 속에서 톱처럼 오갔을 터, 얼마나 아팠겠는가.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누님은 제 걱정 말고 운기나 하십시오.”
“정말 괜찮아?”
“하, 하, 사나이 진사혁. 괜찮다니까요?”
독고무령은 진사혁이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풀어보고 다시 치료해 주었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옆구리에서 검을 검집째 빼냈다.
시간이 났을 때 검을 손질할 생각이었다. 검기로 인해 피가 거의 묻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기름기의 흔적이 미미하게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묵묵히 검을 닦는 그를 향해 진사혁이 다가왔다.
그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얼굴을 바짝 대고 물었다.
“어제 자네가 펼친 검, 정말 무섭더군. 무슨 검법인지 알려줄 수 있나?”
만들기만 했을 뿐 아직 이름도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제왕성에 들어갈 때 말했던 이름이 떠올랐다.
“천뢰무적파천검.”
진사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그런 무식한 이름의 검법이 있다니!
그런데 진사혁의 다음 반응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정말…… 엄청난 이름을 지닌 검법이군. 아주 멋져!”
감탄한 표정.
진사혁이 그렇게 나오니 독고무령이 오히려 무안해졌다.
‘정말로 믿나? 순진하긴.’
그는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냥 해본 소리네. 사실 만들긴 했는데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아서 말이야.”
진사혁의 눈이 더 커졌다. 자칫하면 눈알이 눈구멍에서 굴러 나올지 모를 정도였다.
“자네가 만든 검법이라고? 천뢰무적파천검이?”
“그 이름은 그냥 해본 소리라니까.”
“뭐 어때서? 멋진 이름인데.”
그 이름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사혁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특히 구양소현은 조소까지 지으며 한마디 했다.
“아마 그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웃느라 싸우지도 못할걸?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검법 이름이네, 뭐.”
“누님, 그 이름이 어때서요?”
“어떻긴? 꼭 삼류무사들이 상대를 겁주기 위해서 만든 이름 같잖아. 내 너를 천뢰무적파천검법으로 죽여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칼을 휘둘러대면……. 깔깔깔깔.”
끝내 깔깔대며 웃어대는 구양소현이다. 웃음 때문인지 해쓱한 얼굴에 조금 온기가 도는 듯했다.
진사혁이야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보기엔 멋진데…….”
독고무령은 피식 웃으며 검을 마저 닦았다.
침잠된 분위기에 웃음이 나오니 그나마 나아 보였다.
비록 내외상을 입고 기력이 소진되긴 했지만, 다른 조와 달리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많게는 칠팔 명, 적어도 세 명의 사망자가 난 다른 조에 비하면 천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원인은 자신과 진사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구명절혼수의 영향이 더 컸다.
자신과 진사혁이 미처 신경을 못 쓸 때 구명절혼수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좀 더 다듬으면 아주 괜찮은 게 하나 나오겠어.’
현재의 위력만으로도 진사혁은 무서운 수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보강할 것이 많았다. 만일 다 보강되면 천하의 어떤 절기 못잖은 수법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그때 종리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조장님.”
“왜?”
종리청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는 어제의 싸움으로 두어 군데 외상을 입었다. 거기다 내상도 가볍지 않아서 사실 구조의 조원 중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였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저도 이제부터 구명절혼수를 익히겠습니다.”
그 동안 구명절혼수를 깔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삼 일 만에 만든 무공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랴?
그걸 익히느니 자신이 지닌 무공을 갈고 닦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의 싸움에서 자신이 가장 큰 부상을 입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강한 적과 싸웠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조원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구명절혼수로 급한 상황을 벗어났다. 그 와중에 역공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부지했다.
구명절혼수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고 효과적인 무공이었다.
“구명절혼수는 네가 지닌 것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잘못하면 네 무공과 뒤섞여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익힐 생각이냐?”
“익히겠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많이 늦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할 거다.”
“노력하는 거라면 저도 남 못지않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종리청은 뛰어난 무공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한 무공을 만든 독고무령이 너무 높아 보였다.
고개를 숙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독고무령을 진심으로 따를 생각이었다. 독고무령은 자신을 수하로 거둘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독고무령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는, 담담히 말하며 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것에 대해선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네 목숨을 두어 번은 건져줄 수 있을 거다. 다음부터는 함께 수련해.”
“감사합니다, 조장님.”
* * *
사흘째, 눈이 모두 녹았다.
시신은 오 리가량 떨어진 야산 언덕에 묻기로 했다.
구양손은 표국의 마차를 총동원해서 시신을 싣고 밖으로 나가 언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다.
중천에 뜬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즈음 그 모든 일이 끝났다.
철풍검대와 철환검대의 대원들은 한동안 동료들의 시신이 묻힌 언덕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야만 했다.
적수등이 큰소리로 대원들을 독려했다.
“표국으로 돌아가서 부상자들을 마차에 싣고 출발해야 한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서둘러야 날이 지기 전에 보에 도착할 수 있다! 그만 내려가자!”
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들이 조양표국으로 돌아가자, 의외의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검보로부터 급보가 도착한 것이다.
구양손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여기서 대기하라고?”
철검보에서 온 전령이 서신을 내밀었다.
“보주님의 명입니다, 대주님!”
구양손은 전령의 손에서 서신을 낚아채 빠르게 펼쳤다.
스윽,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런!”
이조장인 마영조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주님?”
“일원궁의 서연 분타가 당했다는군.”
“서연 분타가 당했단 말입니까?”
적수등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구양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날 당한 것 같다.”
“그럼 양쪽을 함께 쳤단 말이군요.”
“음, 사망자만 해도 이백이 넘는다는군. 그 정도면 서연 분타는 거의 전멸이라고 봐야겠지.”
독고무령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서연(西煙)이라면 이곳에서 이백 리 북쪽. 사망자가 이백이나 된다면 저들도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눈이 많이 온 상태라 연속적인 공격은 힘든 상황. 그렇다면 며칠간은 공격이 없다고 봐야겠군.’
독고무령이 나름대로 적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한 낙화인과 철환검대의 오조장인 곽인이었다. 아직 거동이 쉽지 않은 듯 낙화인의 걸음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 서연 분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다니?”
“말 그대로네. 도혼단이 우리를 공격하던 그날, 또 다른 자들이 일원궁의 서연 분타를 공격한 것 같네.”
“역시 제왕성이겠지?”
“그들밖에 더 있나?”
“미친놈들. 한번 해보자는 건가?”
“보주께선 이곳에서 대기하며 연락을 기다리라고 하셨네. 혹시라도 놈들이 또 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지원은?”
“삼대 중 하나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올 모양이네. 양식은 이곳에 충분하니 당분간 상황을 보며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끄응, 일원궁도 정신이 없겠군.”
“그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즉시 서연으로 사람들을 보낸 것 같네. 하지만 적의 꼬리를 잡지는 못했다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눈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았을 테니까. 빌어먹을 놈들! 아예 철저히 노리고 움직였어!”
낙화인은 이를 뿌드득 갈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철환검대의 현재 남은 조장은 오조장인 곽인이 유일했다. 한 사람이 더 살았지만, 그는 부상이 심해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반면 철풍검대의 조장들은 칠조장을 뺀 여덟 명이 살아남았다. 너무 큰 차이에 화가 날 정도다.
‘제기랄, 조금만 침착했어도…….’
낙화인은 참담한 마음으로 철풍검대의 조장들을 둘러보다 독고무령에게서 시선이 멎었다.
“자네, 그때의 일을 좀 설명해줄 수 있나?”
독고무령은 낙화인이 무엇을 묻는지 알기에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의 행적이 수상해서 확인하려 했지요.”
“뭐가 그리 수상했단 말인가?”
“제가 아는 제왕성은 꼬리를 보이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해서 확인하려 한 것이지요. 혹시 연락망이 끊긴 것은 아닌지.”
낙화인의 창백한 얼굴이 잘게 떨렸다.
“그런데 왜 그때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는가?”
화가 난 어투. 지금 이 지경이 된 게 네 탓일 수도 있다는 말투다.
독고무령은 무심하게 반문했다.
“연락망이 끊겼으면 적이 공격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지요. 한데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믿으셨겠습니까?”
“그래도 자세히 말했으면 준비는 했겠지.”
“예의를 따지기 바빠 대답도 미룬 분들이 저를 믿고 준비했을 거란 말입니까? 그럴 거면 처음부터 대비를 했겠지요.”
“그건 양 국주가 미뤘지 내가 미룬 것이 아니잖은가?”
독고무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바로 대답만 들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건 그렇지만…….”
“양 국주는 제가 물었던 것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황 표두에게 미뤘지요.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낙화인은 바로 대답을 못했다.
그 당시, 독고무령이 조양전을 나간 후 양유당이 비웃으며 중얼거렸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말해달라면 내가 ‘예.’ 하고 말해 줄 사람으로 보였나? 알고 있어도 너에겐 말해줄 수 없다, 이놈.”
‘그 인간 때문에……!’
낙화인은 이를 갈며 양유당을 원망했다.
그때 독고무령이 못을 박듯 말했다.
“어쨌든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따진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그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심기가 상하자 낙화인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그렇게…… 하세.”
독고무령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양손을 바라보았다.
“서연으로 사람을 보내서 일원궁의 대처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으면 싶습니다, 대주.”
독고무령이 갑자기 묻자, 구양손은 마치 자신이 낙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흠칫했다.
“음? 일원궁?”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내 곧 알아보도록 하겠네. 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일원궁의 대처를 알아야 손발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하긴 제왕성 놈들을 상대하면서 손발이 어긋나면 안 되겠지. 이봐, 적 조장. 즉시 사람을 서연으로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게.”
철환검대의 대주가 철풍검대 조장과의 말싸움에서 밀려 입을 닫은 상황.
적수등의 목에도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예, 대주!”
적수등이 사람을 서연으로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구양손이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놈들이 이곳으로 내려오지는 않겠나?”
“길을 잃지 않은 이상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흠, 그래? 그거 말이라도 다행이군.”
“그래도 보에서 지원무사들이 오면, 일단 이곳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다시 조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양손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네만…… 제왕성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곧 돌아가게 될 텐데,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나?”
독고무령이 단언하듯이 말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